질그릇에 담은 보배 - 연약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
권수경 지음 / 복있는사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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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었다. 책을 덮고 처음으로 드는 생각!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 이 책 질그릇을 담은 보배는 책 자체가 보배를 담고 있는 질 그릇이다.

 

교회에서 통용되는 말이 있다. 믿음, 섭리, 헌금, 섬김... 세상에 나오면 좀처럼 회자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사실 이러한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질그릇에 담은 보배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다. 일종의 비틀어 보기이다.

 

무언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의심해 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이 책이 나에게는 그렇다.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 믿음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섭리라고 말하면서 살았지만 우리가 정작 알고 있는 것은 섭리라는 모양을 지닌 운명론인지도 모른다. ‘큰 자이기를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다고 변호하지만 이미 큰 자와 작은 자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있는 나의 모습 속에서 내 안에 로 규정된 교만이 주인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는 우리에게 그런 통찰을 안겨 준다.

 

더불어 성경이 질그릇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참된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성경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다. 질그릇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속에 보배를 품지 않는다면 말이다. ‘성경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바로 진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그릇처럼 보여서 명심보감이나 논어같은 책과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의 보배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면 질그릇은 더 이상 질그릇이 아니다.

 

그릇의 어떠함에 내 눈이 가려지지 않고 보배에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한번 훑고 지나가고 말 성격의 것이 아니다. 가다가 여러 번 멈춰 서서 뒤돌아보게 만든다. 혹 내 인생의 흔적 속에 질그릇에 눈이 가려 참 보배를 발견하지 못했던 시간은 없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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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재발견 -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최주훈 지음 / 복있는사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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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후예라 자청하는 장로교 배경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그 교단의 목사가 되었다. 그런 나에게 루터라는 단어는 비공식적 금기어였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도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과 사상이 거론된 적은 없었다. 루터가 프로테스탄트 1호라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분명 프로테스탄트의 후예인 장로교에서 왜 루터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 왔었다. 루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성찬에 대해 실재설을 주장했다는 것 외에 문외한인 나에게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은 새롭게 루터를 이해하고 그가 남긴 귀중한 신학적 발자취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와 나누고 싶은 내용에 대해 이렇게 갈무리한다. “프로테스탄트 제1. 새로운 교회의 창립자. 보편 교육과 복지의 초석을 놓은 사람.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 종교적 천재. 탁월한 설교자이자 목회자 등등 루터는 다면적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한 루터도 아니고, ‘내가이해하는 루터와 오늘 우리 시대 한국 땅에서 건져 올릴 종교개혁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p34)

 

   그렇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종교개혁의 첫 횃불을 들어 올렸던 루터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해한 루터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주워댄다면 그것은 아니한 만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을 감싸고 있는 띠지에 적혀 있는 문장, “우리의 루터 이해는 여기가 최전선이다!”에 나타난 것처럼 저자 최주훈 목사는 이 책을 통해 저마다의 루터를 만나고 호흡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지금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루터의 예배에 대한 이해(p174~183)’이다. 루터는 철저하게 예배를 받는 것으로 본다. 종교개혁의 5가지 기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지향하는 바를 따라간다면 우리의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부어지는 은혜로 충만함 그 자체이다. “구약의 제사가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이고, 신약에서 나오는 말씀과 떡은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p178)”인 것처럼 개신교 신학에서 중요한 방향은 위에서 아래로이다. 루터는 그러하기에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쳤다. 예배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예배는 드림과 받음이 공존한다. 그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예배의 받음의 측면에 대해 더 깊은 관심과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있어서 나로부터 먼저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의 자리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주어라는 명제가 지켜지고 있는지 물음표를 그릴 수 밖에 없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과 끊임없이 싸웠던 부분이 바로 이 것이었으리라. ‘방향의 전환이었다. 말씀을 독점하고 자신의 욕망과 명예를 투영하여 지껄여대는 말에 불과한 것에 하나님의 뜻부여하는 당시 사제들의 모습 속에서 나로부터 그 무엇이라는 방향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부어짐이라는 방향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루터는 일어났다. 종교개혁 500년 기념 해인 2017년은 루터가 돌이켰던 그 방향성을 회복하는 원년이 되어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나의 루터를 만난 것 같아 고맙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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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맛대로 살아라 - 틀에 박힌 레시피를 던져버린 재야 셰프, 전호용의 맛있는 인생잡설
전호용 지음 / 북인더갭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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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홈메이드 식빵'에 꽂힌(?)적이 있다. '제빵기 없이 밥솥으로 식빵 만들기 레시피'를 인터넷 포털에서 본 날이었다. 바로 집에 가서 실행에 옮겼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분명 레시피대로 밀가루를 계량하고 달걀을 넣고 물의 온도를 정확하게 제어서 반죽을 했지만 내가 만든 빵은 인터넷에 레시피를 올린 사람의 후기대로 맛있는 빵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을 열어보면 각종 '음식 레시피'들이 넘쳐난다. 조금만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인터넷 포털에 떠 있는 이른바 '유명 레시피'를 따라서 음식을 흉내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이 레시피 대로 잘 따라하기만 하면 근사한 요리가 나올꺼야!"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이 나오지 않을 때가 다반사이다.

 

인생을 살아가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매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매뉴얼대로만 살아가면 실패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을텐데" 그 메뉴얼만 제대로 내 손에 있으면, 그 지침을 따라 그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인생의 매뉴얼이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그런 매뉴얼이 존재한다 해도 그 매뉴얼대로 인생이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매뉴얼은 있는 듯하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는 길을 따라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입시 경쟁을 하고, 취업의 문을 두드린다. 모두에게 거의 비슷한 환경과 매뉴얼이 주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결과가 다 똑같은가? 그렇지 않다. 결코 똑같은 결과가 나지 않는다. '매뉴얼, 레시피'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주방'에 서 있는 '요리사'인 당사자, 우리들이 각각 다르게 생겨 먹었기에 아무리 똑같은 레시피가 주어져도 인생의 '맛과 멋'은 제 각각 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각각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대중적인 레시피'를 원하고 '평균치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인생의 매뉴얼'을 열망한다. 이 책의 저자 '전호용 님'은 그러한 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레시피에는 정답이 담겨 있을지 모르지만 그 레시피를 참고해 만든 당신의 음식은 정답도 오답도 아닌 당신의 음식이다(p41)." 인생에 어차피 정답은 없다. 오답은 더더욱 없다. 인생은 결국 나의 답, '내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게 해 주는 메시지이다.

 

'네 맛대로 살아라'는 인생에서 '평균치' 이상은 살기를 갈망하는 대중들을 향해 "과연 그 평균치라는 게 있기는 하냐?"는 질문으로 일갈한다. 그리고 결국 '평균치 이상의 인생'을 소망하는 대중들의 머릿속 인생에 대한 그림은 마치 "쇼윈도 안에 놓여 있는 밀랍 요리(p42)"처럼 정형화된 시대의 상술의 결과물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보기를 권하고 있다.

 

마음에 담고 새겨야 할 말들로 넘쳐나는 책이기에 그 모든 것을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중에 '미역국의 기적(p172~178)'이라는 부제를 단 글의 일부분은 꼭 소개하고 싶다.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한 음식이지만 이렇게 단순한 재료로 만드는 음식일수록 맛을 내기는 더욱 어렵다. 여러 재료를 혼합해 만드는 음식은 어느 한 가지 재료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다른 재료가 더해 주고 안아주고 끌어당겨 부족함을 감싸주지만 미역국이나 콩나물국, 가쓰오부시(말린 가다랑어) 국물, 좁쌀죽 혹은 차와 같은 음식은 한 가지 재료, 하나의 공정이라도 빼먹거나 서툴렀다가는 금세 태가 나고 맛없는 음식이 되고 만다.(p172)"

 

이 글을 읽으면서 '인생'을 생각해 본다. 인생을 요리에 비유해 보자면 결국 '인생이라는 요리'의 재료는 '내 몸뚱이 하나' 아닐까? 여러 재료를 혼합해 만드는 음식이 아니라 '나 하나'라는 '일품 재료'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요리이다. 그러하기에 저자의 말처럼 '하나의 공정'이라도 빼먹거나 서툴렀다가는 쓰레기통에 내다버려야 하는 음식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인생을 맛깔나게 만드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내 인생이라는 요리'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공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빼먹거나 건너뛸 수 있는 공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하나하나의 시간을 다 지나가야 만 내 인생이라는 '요리의 맛''총평'할 수 있다.

 

나의 10, 20대를 돌이켜 보면 그 순간 순간을 지나오며 쌓여 있는 불평들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좀 이런 건 건너뛰어도 될텐데.. 이런 곤란은 좀 빼먹어도 될텐데' 그런 생각 말이다. 지금도 이 생각들로부터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그 모든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오고 있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만나야 할 사건과 순간들이 나의 '인생'이라는 요리를 만들어 가는 공정임을 말이다.

 

내 인생의 레시피는 여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처럼 공개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철지히 '비밀'에 부쳐진 레시피로 만들어지는 '비밀 음식'은 오직 나 자신의 인생이라는 요리 밖에는 없다.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이 그저 그런 페스트푸드 음식으로 생각되는 사람마다 이 책을 펴서 읽자! 다시 한 번 내 인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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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일주일
김영봉 지음 / 복있는사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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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필자가 이 책의 저자 김영봉 목사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은 2015년 미국연방대법원에서 '동성혼 합법화 판결'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글을 읽었을 때 부터였다(본서 p388에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글은 '칼럼'이 아니라 '설교'였다. 필자는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저자의 행동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하며 심지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본서에도 나타나 있지만 이 일로 저자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필자는 그 때 그 설교문을 읽으면서 저자의 삶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으로부터 이런 용기가 나올까? 어떤 삶이 설교자로서 이런 설교를 하게 만드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계속 나에게 맴 돌았다. 그러던 찰나에 '설교자의 일주일'을 만나게 되었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나에게 해 주었다. 저자가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내려는 몸부림의 과정이 고스란히 설교에 담겨 있음을그러하기에 그 설교는 힘을 발휘하고 영향력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저자는 '설교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맡은 것이 '비밀'이기 때문이다(p62). 나에게 맡겨진 비밀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려는 것, 듣는 이들로 하여금 비밀을 비밀로 느끼게 만들어주려는 것, 그리고 회중으로 하여금 그 비밀을 더 알고 싶도록 만드는 것(p62)이 바로 설교자의 의무이자 사명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처럼 설교를 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등장하는 '연설가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역량'인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라는 개념을 통해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바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토스는 '설교자의 인격'과 연결된다. 설교자가 어떤 ''을 사는지가 설교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자의 삶을 그대로 투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설교자는 '거룩한 에토스'를 형성하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설교는 맡겨진 비밀이다. 그러하기에 설교자로서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비밀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것이다(p103). 그 과정을 반복할 때에 그것은 '거룩한 습관'이 되고 습관은 '거룩한 에토스'로 남는다.

 

파토스는 '설교의 전달'과 관련 있다. 설교자의 파토스가 어떠한가에 따라 설교가 달라질 수 있고 설교자는 회중의 정서에 호소하여 건강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의무가 있다(p177). 설교자의 파토스는 결국 '말씀에 대한 열정'이다. 말씀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텍스트에 갇힌 열정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회중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에 일어나는 열정이다(p195). 더불어 '설교자의 복음적 파토스'는 일상에 파묻혀 도무지 '말씀을 향한 열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회중들로 하여금 '복음의 긴급성과 급박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노력으로 연결된다(p196). 강단과 회중사이의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파토스'의 역할이다.

 

로고스는 '설교와 본문사이의 관계 및 설교의 구성과 구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서 설교자들에게 가장 실제적인 지침을 준다. 아무리 건강한 에토스와 파토스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로고스가 부실하면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7:6)"와 같다. 로고스는 공들여 쌓은 에토스가 전달되는 통로이며 건강한 파토스가 사용할 도구라고 저자는 말한다(p259). 본문에 천착한 묵상과 연구는 요리에 비유하면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다. 준비된 재료를 가지고 설교자는 '진리를 담고 있는가? 성경적인가? 은혜를 전하고 있는가? 도전적인가? 실제적인가?'라는 다섯 개의 '영적 레시피'를 따라 정성스럽게 요리한다(p359-366). 그리고 요리의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그릇을 선택하듯 회중에게 잘 전달 될 수 있는 '글의 형식'을 선택하여 설교문을 잘 작성해야 한다.

 

저자는 '설교는 무거운 영예'라고 말한다. 이 한 문장에 나의 마음을 다시 다 잡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마음에 다짐하게 된다. 그 영광스럽고 고귀한 일에 나를 부르셨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설교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는지, 한눈으로 '성도들의 삶', 다른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p420) 그 둘 사이의 다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나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목사라면 반드시 읽어 마땅한 책이다. 목사가 아니어도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목사가 아닌 성도들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설교가 들려지는 자리'에서 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점검하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 번 '기본기'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과의 만남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한 뼘 자라가는 나의 모습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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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그 때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을까하는 궁금증은 복음서를 설교하는 나에게 있어서 늘 갈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 나에겐 너무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찰나 '의인을 찾아서'라는 웹툰은 나에게 '시원한 생수 한통'과 같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목적은 사실 다른데 있었다. 이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웹툰 작가 김민석 님의 이전 책 '마가복음 뒷조사', '마태복음 뒷조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우리 '첫째 딸' 에게 점수를 따려고 동일 저자의 책을 또 구입하였다. 그런데 딸아이에게 건네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읽고 은혜(?)를 받았다.

책을 싸고 있는 띠지에 '1세기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정치적 정황들이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힌다.'는 문구가 있는데 허언이 아님을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잡자 마자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참으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정치적 정황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과 정갈한 그림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작가의 서문에도 나와 있지만, 이 책은 정말 그 시대상을 재구성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많은 책을 접하고 연구했는지를 세삼 깨닫게 해 준다. 단순히 복음서를 연구한 신학 서적을 탐독하고 당시 문화, 역사를 연구한 정황들을 섭렵한 것으로 이런 책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시대상황을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도록 치밀하게 인물과 스토리를 구성했다는 것이 김민석 작가의 대단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출발은 '헤롯 대왕'이 거느렸던 '비밀경찰대'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평상복을 입고 반역자들을 색출하여 은밀하게 처리하는 집단이었다. 시간이 흘러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는 그 비밀경찰대를 전신으로 하는 '갈릴리 감찰단'을 만들었는데 주인공 '여호수아'는 그 감찰대의 대장이다.

그의 아내 미리암은 '염장 생선'을 만들어 판매하는 상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그 생선을 수레에 실어 거래하였다. 여호수아는 예루살렘에서 잠복근무를 하고 있던 중, 마리암의 염장 생선을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수레가 북쪽 입구에서 모든 물건을 도난 당한체 버려져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도난 당한 물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그의 고명딸 '로데'의 행방도 함께 묘연해 졌다는 점이었다.

추후 도난당한 물건은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진 체 발견되었고, 비극적이게도 그 '염장 생선통' 속에서 로데의 시신이 함께 발견된다. 딸을 잃은 슬픔을 안고 미궁에 빠진 이 사건을 해결하고 딸의 목숨을 앗아 간 살인범을 잡기 위해 '헤롯 안디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맡아 파헤쳐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부사수 '마르쿠스'의 이야기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결국 여호수아가 사건을 파해쳐 나가는 과정에서 헤롯 안디바와 빌라도 총독의 더러운 거래가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과정 가운데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모든 신념들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유다 독립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 별명을 붙이게 되는게 그가 바로 '아브라함(아바)의 아들(바르)', '바라바'이다.

웹툰에 '역사 스릴러'라는 장르를 도입해다는 것이 너무나 흥미로왔다. 그리고 '픽션'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기반'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몰입도도 상당한 작품이다. 저항군 지도자였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십자가형을 목도하며 오직 삶의 목표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며 권력의 개로 철저히 살았던 여호수아가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딸의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은 이 작품에 빠져들게 만드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 책은 열린 결말을 열어두고 있다. 바라바는 예수와 나란히 서서 '유월절에 풀려날 죄인'을 선택하는 자리에서 풀려나는 자로 선택된다. 바라바는 예수가 나누는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져 갈 것'에 대해 듣는다. 하지만 결국 그냥 '반역자'로 처형당한 예수를 보면서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로마와 철옹성 같은 대제사장 일가, 빌라도는 멀쩡한 현실 앞에 자조하며 광야를 걸어간다. 그 '바라바'의 뒤켠에 죽은 '로데'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작품은 끝이난다.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기대하고 품으며 메시아를 갈망했던 13세 어린 소녀, 로데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메시아로 여겼던 청년 '예수'는 정치적 반역자라는 멍애가 씌워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3일만에 부활함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이 땅에 온전하게 성취되었다. 그 놀라운 비밀을 '로데'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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