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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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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운동가 미카 시프리는 위키리크스의 등장을 두고 투명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정보가 어느 때보다도 공개 영역으로 자유로이 흘러가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투명성의 확대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다.

 

하지만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이런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이고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라며 투명성과 투명사회에 대한 통념을 비판한다.

 

투명사회는 통제사회다

 

저자는 투명사회를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부른다. 긍정사회, 전시사회, 명백사회, 폭로사회, 통제사회 등. 그 가운데 폭로사회와 통제사회라는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병철은 마음의 개방을 주장했던 루소의 예를 들며 투명사회가 통제사회임을 드러낸다.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투명사회> 90~91p

 

게다가 현대는 루소의 시대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기술 발전에 따라 기존의 파놉티콘이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과거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독관이 수감자를 감시했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수감자들이 서로를 감시한다. 수감자들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사적인 영역을 경쟁적으로 드러내고 노출함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모두가 모두를 통제한다.

 

현대사회가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전부를 알아야만 그를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음에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인간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하고, 서로를 통제하려 든다. 그래서 투명사회는 불신사회이기도 하다.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투명사회> 98p

 

정치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주로 SNS로 대표되는 디지털 세계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디지털 세계에 대한 한병철의 지적은 대체로 타당하고 유효하다. 당장 페이스북만 들어가 봐도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는 그의 지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에서도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한다. 일례로 정치인들이 비공개 석상에서 도발적인 주제에 터놓고 토론할 자유도 없어지고, 그에 따라 주류에 순응하게 될 것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정치가 몇몇 정치인들의 손에만 달린 게 아니라면 대중들에게도 최대한 많은 정보가 공개돼야 하고, 그들이 활발한 토론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투명성이 없고,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야말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뜻을 국정운영에 반영하는 정치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즉각 공개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최근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정치 영역에서 지나치게 투명성이 낮기 때문이다. 일례로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대규모 개인정보 수집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NSA가 지나치게 비밀스런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NSA가 얼마나 비밀스럽게 운영되는지 'No Such Agency'(그런 기관은 없다), 'Never Say Anything'(아무 말도 하면 안 된다)는 별명이 있을 정도다. 만약 NSA의 활동이 투명하게 공개돼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감시받았다면 이 같은 대규모 개인정보 수집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영역에서는 투명사회의 도래를 막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투명성을 더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한병철은 투명사회가 통제사회라고 비판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민주적으로 통제돼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도 크게 보면 정치의 실패에서 비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본연의 임무를 못한 상황에서 국민이 할 일은 정부가 제 역할을 하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국민들이 정부가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믿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과연 잘 하고 있는지 늘 불신하고, 제 역할을 하도록 통제할 때 비로소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

 

그래서 투명사회의 위험성을 지적한 한병철의 논의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세상에는 정치 영역을 비롯해 투명성과 통제가 필요한 부분들이 분명 있다. 그게 지나쳐서 사회 전체가 투명사회, 통제사회로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투명성이나 통제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히 투명사회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투명성이 필요한지를 세밀히 논의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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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6-18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의 모델은 독일사회일 것 같습니다. 피로사회도 마찬가지였고요. 우리와는 다른 사회지요.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피로사회, 아직 멀기만한 투명사회라는 점에서 그 비판들이 멀어 보이기도 합나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 우리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란 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광검 2014-06-1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한병철이 독일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 게 아닌가' 싶긴 하더군요. 리뷰에서도 적었듯이 페이스북 같은 부분에서는 한병철의 지적이 꽤 유효하고, 분명히 우리사회도 진지하게 고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권력 -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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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 금융위기가 세계를 덮쳤을 때 수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말했다.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 점령하라(Occupy)' 운동은 월가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주류 언론들마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했다. <경향신문>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란 제목의 기획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현재, 신자유주의는 살아있다. 금융위기의 타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숨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느 학자는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라고 탄식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잘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 몰랐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올바르게 저항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신자유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와 권력>(사토 요시유키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을 펼쳐들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 개입을 요구한다

 

신자유주의를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면 거기에는 민영화’, ‘감세따위와 더불어 작은 정부라는 말이 빼놓지 않고 들어갈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주장한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자신들의 주장을 쉽게 뒤엎었지만, 그들의 기본 주장이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미셸 푸코의 담론을 빌려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정부 개입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시장에서의 경쟁을 중시하는데 여기서 경쟁이란 결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은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내적 논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경쟁이 개개인의 활동을 조절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한다.”(36p~37p)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정부는 시장의 조건, 즉 법제도에 개입함으로써 경쟁을 생산한다. 예를 들면 정부는 종신 고용 제도의 철폐, 능력별 급여의 도입 등을 통해 기존에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영역에 적극적 경쟁을 창출한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을 환경 개입 권력이라 칭하고, 기존의 규율 권력과 대비시킨다. ‘규율 권력은 학교, 감옥 등의 규율 장치를 통해 개개인에게 규범을 내면화시킴으로써 권력에 복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경쟁을 생산함으로써 시장 원리를 사회 전체에 관철하고, 그것을 끝내 개인의 내면으로 침투시켜 자기-경영을 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기-경영이란 말이 낯설지도 모르지만, 자기-경영은 우리의 일상이다. 자신의 시간과 인맥을 관리하고, 스펙과 경력을 관리함으로써 더 매력적이고, 유능한 인간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 우리 자신이 각자의 CEO가 되어 자신의 삶을 경영하도록 만드는 게 자기-경영이다. 취업을 위해, 혹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이미 자기-경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정부는 경쟁을 생산하는 것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개입한다. 주권 권력의 강화, 즉 치안과 안보의 논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조지 부시 정권이 대테러 전쟁을 벌이고, 사르코지 정권이 이민 문제에 강경 대응한 것이 좋은 사례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강화된 주권 권력이란, 안전 확보라는 패러다임 아래서 예외 상태를 규칙화시키고, 정치체제에 통합시킬 수 없는 자를 물리적으로 배제하고자 하는 통치성을 의미한다.”(112p)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자유주의의 시조쯤 되는 레이건 정부가 노동조합을 탄압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주권 권력의 강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레이건 정부는 1981년의 항공관제사 노동조합 파업 당시 12,000명의 파업참가자 전원을 해고하고, 항공관제사 노동조합의 교섭권과 대표권을 빼앗았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에 대한 공격을 주요한 특성으로 삼고 있고, 그들의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치안 논리를 강화한다. 그것은 레이건 정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통념과는 달리 정부의 개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정부는 시장의 조건에 개입함으로써 경쟁을 생산하고, 치안과 안보 논리를 강화함으로써 을 배제한다. 여기까지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성을 분석한 1부 내용이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일의 어려움

 

1부를 읽고, 평소 내가 생각하던 신자유주의의 특성을 명쾌하게 설명해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저항을 모색한 2부를 읽으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2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탈주체화/탈복종화 전략이 필요하고, ‘소수자-되기를 실천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경영의 주체가 되지 않기 위해 권력의 내면화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하는 탈복종화 전략을 채택하고, 주권 권력의 강화가 사회적 배제의 메커니즘으로 나타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소수자-되기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를 따라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팔루스니 탈영토화니 지층화니 기관 없는 신체니 하는 낯선 용어가 마구 등장하는데 들뢰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따라가기 힘들다. 1부에서 주된 이론적 근거로 삼은 미셸 푸코의 책도 안 읽었는데 2부가 유독 1부보다 어려운 것을 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 자체가 그만큼 어려운 듯하다. 2부를 읽으며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상징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자유주의와 권력>을 읽을 생각이 있다면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가 먼저 하길 바란다.

 

그렇다고 2부는 어려웠다는 말만 할 수는 없으니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2부가 1부보다 훨씬 난해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구체적인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을 인용해 신자유주의가 경쟁을 생산한다는 점을 설명했고, 주권 권력의 강화를 이야기할 때는 조지 부시나 사르코지를 예로 들어 저자의 분석이 한층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반면 2부는 구체적인 사례 적용이 거의 없어서 내용 자체가 현실과 별 관계없는 탁상공론처럼 느껴졌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전략을 설명하면서 현실의 사례, 이를테면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이나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중남미의 좌파 정권을 예로 들었다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설득력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1부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를 명쾌하게 분석하며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정부 개입을 요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반면 2부는 난해한 데다 구체적인 사례도 거의 없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2부의 난해함은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려는 이들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를 명쾌하게 분석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수는 있지만, 정작 그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대중적 전략은 없는 현실. 어쩌면 그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아직도 살아남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일찍이 마르크스가 말했듯 중요한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경영의 주체가 되지 않도록, 주권 권력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는 대중적인 저항 전략을 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짜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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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 - 개정판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외 옮김 / 두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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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중국. 공산당이 이끌던 붉은 중국’(Red China)은 중국 국민당에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중국 혁명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에드거 스노의 말처럼 지구 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의 바로 중심부에서 투쟁을 벌여 온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철옹성처럼 빈틈없는 뉴스의 봉쇄망에 갇혀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홍군을 둘러싸고도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홍군을 단지 비적으로 치부하거나 소비에트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홍군이야말로 중국의 온갖 악폐를 떨쳐 버릴 이들이라고 찬양하는 이들도 있었다. 에드거 스노가 한 장의 소개장만을 믿고 붉은 중국으로 향한 것은 이런 소문의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서다. 그가 서방 기자 최초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을 기록한 책이 바로 <중국의 붉은 별>이다.

 

에드거 스노가 기록한 중국 공산당의 모습은 이상적인 정치집단에 가깝다. 중국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고, 빚 때문에 지주에게 집과 토지를 뺏기지 않으며,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던 한문을 배우게 됐다.


농민들도 공산당을 열렬히 지지한다. 자신들은 감자와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곡식을 공산당에게 주고, 어린 아이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홍군에 합류해 싸운다. 고작 15살인 홍군의 한 병사는 농민들이 홍군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는 에드거 스노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수천 켤레, 아니 수만 켤레의 신발을 그들 손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여자들은 우리에게 군복을 만들어 주었고, 남자들은 적의 동태를 정찰해 주었고요. 홍군에 아들을 입대시키지 않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니 백성들이 우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죠.”

 

에드거 스노는 자신이 목격한 붉은 중국의 모습을 바탕으로 중국 혁명의 성공을 예언한다. “이미 중국에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상도, 또 그 뒷면을 떠받치는 에너지도 결코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거 스노의 예언은 오늘날에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그의 말처럼 중국 공산당은 마침내 승리했지만, 그들의 이상이 중국에서 실현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의 노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그 후에도 혁명 초기의 순수한 이상과 열정은 갈수록 변질되어 갔다.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빈부격차와 인권탄압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변질되기 이전의 중국 혁명을 기록한 <중국의 붉은 별>을 읽는 것은 씁쓸하기만 하다. 혁명 초기의 모습이 빛났던 만큼 오늘날 중국의 현실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안타까움은 다시 생각으로 이어진다. 혁명의 이상과 혁명의 현실 사이의 괴리는 왜 발생하는가. 혁명은 끝내 변질할 수밖에 없는가. 인간의 이기심은 모든 혁명을 부패시켜버리는가. 어쩌면 혁명 자체에 어떤 모순과 문제가 내장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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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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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속에 숨겨진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고발하고, 그에 반하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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