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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중국사 - 한족과 소수민족, 그 얽힘의 역사
가오훙레이 지음, 김선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4월
평점 :
올해는 아시아를 다룬 책을 꾸준히 읽어보겠다는 자체 독서 계획에 따라 가오훙레이가 쓴 <절반의 중국사>를 읽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본문과 주석이 싸우는 책’이다.
이 책은 한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벗어나 그동안 좀처럼 시선을 두지 않았던 몽골, 토번, 거란 등 우리가 역사책에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민족들의 역사를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인 역사관을 담았을 거라고 기대하면 곤란하다. 저자인 가오훙레이는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켜 “여러 민족이 공동으로 만든 위대한 중국의 역사”(331쪽)을 빚어내려 하는데, 이런 국가주의적 서술에서 각 민족의 독립성은 철저히 부정되고 중국이 추진하는 소수민족 정책의 문제점도 가려진다.
역사관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대목을 꼽으라면 오늘날 위구르족의 조상 격인 회골을 다룬 장이라고 생각한다. 회골은 오늘날 위구르족의 조상 격인 소수민족인데, 이 책은 돌궐이 회골(당시에는 고차라고 불렸다)의 지도자들을 죽인 원수이며, 위구르족과 돌궐은 조금도 관련이 없음에도 “20세기 초에 한 무리의 위구르족이 자기 조상이 누구인지를 잊고 원수인 돌궐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서방 식민주의자들이 딴마음을 품고 만들어낸 용어인 ‘동투르키스탄’을 정치적 용어로 만들었다”(331쪽)고 주장한다. “현재 위구르족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신장은 안전하고 아름다우며 시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다”(336쪽) “지금 아름다운 신장은 중국 서부 개발의 중점 지역이 되어 경제 발전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338쪽) 같은 문장은 책이라기보다는 선전물에 가까워 보인다. 유엔 등 국제기구들은 위구르인 1100만 명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 캠프’로 불리는 시설에 갇혀 있거나 수감된 적이 있다고 추산하는데(<중국 딜레마> 98쪽), 이런 강제수용 실태를 생각하면서 ‘시적인 분위기’ 운운하는 표현을 보면 기가 막힌다.
오늘날 티베트의 선조라는 토번을 다룬 장도 굉장하다. 저자는 달라이라마에 대해서 “‘줄곧 중국의 분열을 조장해온’”(512쪽), “외국에 망명한 달라이 라마는 끊임없이 책임질 수 없는 ‘헛소리’를 함부로 하고 있다”(554쪽)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쓴다. 티베트에 고원 철도가 건설됨으로써 티베트는 발전할 일만 남았는데, 달라이 라마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554쪽)를 내면서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사관인데, 이 책은 무려 160여 쪽에 달하는 역자의 꼼꼼한 주석으로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달라이 라마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본문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박한다.
“달라이 라마의 발언록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가 ‘책임질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는 티베트 사람들의 무장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줄곧 ‘비폭력’을 주장해왔으며, 2008년 4월 6일, 티베트에서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난 직후에도 ‘비폭력 전략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티베트를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의 평화적인 발전의 촉진을 추구하는 ‘중도적인 접근 방식’을 찾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982쪽)
모든 각주가 이 정도로 본문의 서술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본문과 각주가 싸우는 책’이라는 말이 이해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자의 꼼꼼한 각주 작업은 높이 살만하지만, 무려 10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에 이 많은 각주를 미주로 처리했다는 점은 독서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독특한 취향에 대해 새삼 생각했는데,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런 독서의 장점은, 엄청나게 생각을 많이 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으니 이걸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이 주장의 문제점이 뭘까를 계속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역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점에서 유익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족의 역사와 소수민족의 역사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한족을 우위에 두는 게 아닐까 의심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생각보다는 개방적이랄까 그런 모습도 드러난다.
복족이 세운 국가 야랑의 왕이 한나라의 사신에게 “한과 우리 중 어느 나라가 더 큰가?”라는 질문을 한 것을 두고 생긴 ‘야랑자대’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변방의 작은 나라인 ‘야랑’이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해 스스로를 강대한 나라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자는 “지혜로운 야랑 왕을 비하의 의미가 있는 ‘야랑자대’와 같은 고사성어를 함께 엮는 것은 불공평하다”(829~830쪽)라고 두둔한다.
여진족이 세운 청이 한족 왕조 명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서도 “강인하고 민첩하며 용맹스러운 민족들의 왕조” 중 하나인 청이 현재 중국 영토의 형태를 고정했기 때문에 “역사의 산봉우리에 서서 내려다볼 때, 명의 멸망은 오히려 축하해야 할 판이었다”(431쪽)라고 말한다. ‘위대한 중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면 한족이든 소수민족이든 상관없다는 식인데, 이 정도면 거의 백묘흑묘론 수준이 아닌가 싶다. 읽다가 이게 등소평인지, 가오훙레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족과 소수민족을 완전히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의 효문제는 귀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꾸고, 한인의 옷을 입게 하고, 한인과의 통혼을 주장하며 스스로 앞장서서 한인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의 한화 정책(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화 개혁”)을 실시하는데, 저자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소수민족 지도자가 자신의 민족이 낙후되어 있음을 깨닫고, 시대 조류에 맞지 않는 옛 제도와 관습을 용감하게 버린 후, 외래 문명의 우수한 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형제 민족의 지혜를 모아 함께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백성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던 쿠빌라이칸이나, 한인에게도 강제로 머리를 깎으라고 했던 청의 도르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효문제의 개혁 정책과 비교해볼 때 이들의 행위는 진땀이 흐르고 얼굴이 붉어질 지경으로 부끄러운 일이다.”(166쪽)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대해서는 두산백과만 봐도 “후년에 북방민족 귀족의 강건한 기풍의 상실, 북방민족 하급군인의 빈천화(貧賤化)의 원인이 되어, 북위 말에 북방민족계 군사의 반란을 초래하였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반론은 쿨하게 씹는다.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책이지만, 그래도 한족 외의 중국 소수민족사를 이렇게 집대성한 책이 흔치 않고 중국의 ‘역사공정’이 어떤 논리에 따라 진행되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