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의 사회문화사 - 정부 권력과 담배 회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1990년대의 강준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지금의 강준만이 다소 낯설어 보일지 모른다. '조선일보', '김대중', '전라도' 같은,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금기와 성역에 거침 없이 메스를 들이대며 실명 비판을 감행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히 사회적 발언에 앞장섰던 지식인이었다.

사회적 논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전투적 자유주의자', '지식전사'가 변했다.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은 강준만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강준만은 시사적 글쓰기보다 교양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야심 찬 포부 아래 '커피', '축구', '강남', '어머니' 등의 키워드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문화사 시리즈'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담배의 사회문화사> 역시 그중 하나다.

그의 변화를 두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지만, 강준만의 작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담배의 사회문화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담배의 사회문화사>는 제목 그대로 조선시대에 담배가 들어왔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담배와 흡연의 역사를 담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담배 산업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였다. 

'페미니스트'가 된 담배회사 사장

담배 산업은 판매촉진을 위해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이용해왔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예가 바로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 행진이다. 

1929년 초, 아메리칸토바코(American Tobacco)의 사장인 조지 워싱턴 힐은 '미국 PR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에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길거리에서도 담배를 피우게 할 수 있을까?"라는 숙제를 던졌다. 여성의 담배 소비량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에 버네이스는 담배를 여성해방과 연결한 '자유의 횃불' 행진을 조직했다. 맨해튼, 보스턴,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우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버네이스는 배후에 아메리칸토바코가 있다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이 퍼레이드를 철저하게 문화적 사건으로 포장했다.

'자유의 횃불' 행진 이후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흡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전보다 관대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잡지에는 "이제 여성도 남편이나 형제들과 함께 맞담배를 즐길 수 있다"는 광고가 실렸고, 힐의 의도대로 여성의 담배 소비량은 늘었다.

1929년의 여성 흡연은 1923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페미니즘 담론을 이용해 담배 산업을 성장시킨 것이다. 1967년, 미국에서 출시된 담배 '버지니아 슬림' 역시 광고문구를 여성해방 메시지와 연결해 성공을 거둔 바 있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은 페미니즘이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페미니즘 역시 남성 우월주의에 맞서기 위해 담배를 이용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담배의 사회문화사>에서는 미국의 사례만 나와 있고, 한국에서 페미니즘과 담배 산업이 결합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담배의 사회문화사>는 어디까지나 한국에 초점을 맞추는 책이기에 더 그렇다.


애연가이기보다 애향가이고 싶다... '내고장 담배사기운동' 

1989년 담배소비세가 국세에서 지방세로 편입된 후 지방자치단체는 재정수입 확대를 위해 '내고장 담배사기운동'을 벌였다. <한국일보>(1991년 6월 2일자) 사설은 "지방공무원들이 지방재정의 확보를 위해 전단, 스티커에 심지어는 일회용 라이터까지 돌리며 '내고장 담배피우기'의 홍보 선전원으로 뛰고 있는 상황이다"라며 '내고장 담배사기운동'에 열을 올리는 행태를 비판했다. 

담배소비세가 지방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열심이었던 것일까?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정성을 쏟을 만했다. 

1991년 담배소비세가 전체 시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울 18.1퍼센트, 5개 직할시 21.5퍼센트, 기타 지방의 시는 평균 37.4퍼센트였고 군은 평균 53.7%에 달했다. 특히 경상남도 통영군과 강원도 양구군은 담배소비세 비중이 전체 군세의 75%를 차지했고,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인제군, 화천군, 전라남도 신안군, 경상북도 금릉군 등도 70%를 넘어섰다. 담배소비세로 먹고사는 농촌과 지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107p

이처럼 담배소비세가 지방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에 지방공무원들은 애향심을 이용해 담배 판매에 열을 올렸다.

"애연가이기보다 애향가이고 싶다."

부천시에 설치됐던 '내고장 담배사기운동' 홍보판 문구다. 그래도 지방재정을 위한 운동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을 동원한 것보다는 양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골초들의 확신은 '담배 마케팅'의 산물"

강준만은 '맺는말'에서 앨런 브랜트의 "담배는 선천적인 특성보다 판촉에 의해 의미가 정의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담배의 역사는 곧 판촉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담배 회사와 정부 권력이 페미니즘이나 애향심 등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며 이익을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강준만은 "골초들이 담배에 대해 나름대로 품고 있는 확신은 실은 '담배 마케팅'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흡연의 이유를 단지 '담배 마케팅'에만 돌릴 수는 없다. '담배 마케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은 그만큼 소비자들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토바코의 상술이 통했던 것은 흡연에 있어서도 남녀가 불평등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내고장 담배사기운동'이 성공한 것 역시 지방민들이 애향심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배회사와 정부의 마케팅 전략만 탓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전략이 먹혔는지, 근본적으로 흡연자들은 왜 담배를 피우는지에 대한 분석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어리석어 '담배 마케팅'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다행히 그에 대한 실마리는 있다. 강준만은 담배와 전쟁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며 "전쟁하듯이 사는 사람들에게, 금연의 필요성은 그만큼 약화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소득층, 저학력층일수록 흡연자가 더 많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그의 말대로라면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담배 마케팅'뿐만 아니라 전쟁하듯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사회에도 있지만, <담배의 사회문화사>는 실마리만 제공할 뿐 이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 분석을 좀 더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아쉬움 남지만 비판하기는 망설여지는 책

<담배의 사회문화사>는 제목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책이었지만, 막상 읽고 난 후에는 조금 아쉬웠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담배의 사회문화사>를 과하게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강준만의 수많은 책 가운데는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는 책들도 여럿 있다. 그 자신도 부끄럽게 여기는 책이 많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생각할 점이 있다. 강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책을 쓸까. 학문의 상아탑에서는 어떤 논의가 오가고 있는지 몰라도, 대중을 상대로 '한국 담배의 역사와 사회상' 같은 주제로 쓴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강준만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담배의 사회문화사', '커피의 사회문화사', '룸살롱의 사회문화사' 같은 것들이 기록될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그 작업을 해야 하지만, 누구도 그런 작업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강준만은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때로 강준만의 작업이 미흡하다 여기면서도 그를 비판하기 망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 같은 작업을 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거대 담론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듯싶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거대 담론은 공허하다. 거대 담론과 미시 담론이 만날 때, 비로소 거대한 이야기들은 현실감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매일 타는 자동차, 매일 마시는 커피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한국 사회의 문제가 결코 나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지식인들이 강준만의 작업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축구 전문가가 쓴 '축구의 사회문화사'나 보수의 시각에서 쓴 '담배의 사회문화사'가 한 권쯤 있으면 하고 바란다. 적어도 그 순간이 오기까지 나는 항상 강준만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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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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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다른 과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 이번 학기에 들은 수업 중 '한국고전소설교육론'이 가장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고전이 재미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선배가 너무 놀라서 나도 놀랐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고전이 처한 현실이다. 하기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거의 모든 고전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는데, 이런 뻔한 주제에 흥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선인가' 하는 것인데, 고전소설이 권장하는 윤리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어린 딸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권장되어야 할 '선'이라고 주장하는 <심청전>이나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춘향전>이나 현실성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고전이라고 떠받들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의 현실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고전소설 다시 읽기를 시도한 한 권의 책이 있다. <전을 범하다>(이정원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가 그것이다. 

토끼전, 부패한 봉건 권력에 맞선 민중의 승리?

모두 잘 알겠지만, <토끼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용왕이 갑자기 병이 났는데, 한 도사가 나타나 토끼의 간이 용왕의 병에 특효약이라고 말한다. 이에 자라가 토끼의 간을 얻기 위해 토끼를 꼬드겨 용궁으로 데려오고, 토끼는 꾀를 내어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용왕은 이 말을 믿고 토끼를 다시 자라와 함께 육지로 보내지만, 육지에 도착한 토끼는 도망친다.

이후의 결말은 이본마다 다르다. 자라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토끼가 명약이라며 토끼 똥을 주거나 신선이 내려와 선약을 주는 판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판본에서는 용왕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자라가 용왕을 볼 면목이 없다며 자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본이든 토끼가 꾀를 내어 자신을 죽이려던 용왕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점은 똑같다. 그래서 <토끼전>을 '봉건 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로 읽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용왕의 병은 당시 봉건 권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끼, 즉 민중의 희생이 필요하지만, 민중은 체제를 위해 희생되기를 거부한다.

토끼는 약자의 위치에 있지만 지혜롭게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부패한 봉건 권력을 조롱한다. 그래서 토끼는 권력 앞에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토끼는 선한 민중일까

하지만 <전을 범하다>는 이 전통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후 토끼가 보이는 모습은 긍정적인 민중의 상과는 거리가 멀다.

용왕이 벌이는 잔치에서 흥이 난 토끼는 그만 '간이 촐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자라는 토끼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따진다. 이에 앙심을 품은 토끼는 용왕에게 자라탕이 특효약이라 고한다. 용왕은 자라가 목숨을 걸고 육지를 다녀온 공을 인정하여 자라 대신 자라 부인의 목숨을 요구하고, 그렇게 자라와 토끼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뀐다. 한 번만 봐달라고 간청하는 자라에게 토끼는 제안한다.

토끼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 죽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아내를 하룻밤 내 방에 들이면 괜찮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네 집의 멸문지환(滅門之患)이 눈앞에 날 것이니 조심하라."
하니 별주부가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 의견 어떠하오?"
-가람본 <별토가>에서

이처럼 용왕 앞에서 약자였던 토끼가 그 약자의 위치를 벗어나는 순간, 토끼는 자신보다 약자인 자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찾기 어렵다. 이래도 토끼를 선한 민중으로 봐야 할까? 그보다는 약자이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지만, 그 위치만 벗어나면 남이야 어찌 되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존재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전을 범하다>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라 역시 우리가 생각하던 충신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자라의 벼슬인 주부는 조선 시대의 종육품에 해당하는데 높은 벼슬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완판본 <퇴별가>에서는 자라가 평생 모두에게 멸시받았다는 설명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자라는 출세를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간 것인지도 모른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며 토끼의 제안을 거부한 부인에게 권도(權道)를 권해 결국 동침하게 하는 것 역시 자라다. 이쯤 되면 용왕, 토끼, 자라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두고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토끼전>을 '부패한 봉건권력 vs 건강한 민중'의 도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일 수 없다. 이처럼 <전을 범하다>는 우리가 이제까지 몰랐던 고전소설의 이면을 보여준다. 관심을 갖고 다가서는 이들만 볼 수 있는 고전의 진짜 얼굴이다. 

<전을 범하다>의 단점, 물론 있다

<전을 범하다>에도 물론 단점은 있다. <전을 범하다>의 가장 큰 단점은 고전소설의 수많은 이본 중 일부만을 선택해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우리 고전소설은 지역이나 인쇄방식 등에 따라 수많은 이본이 있는데, <토끼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토끼전>의 이본은 150여 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전을 범하다>가 택한 이본은 가람본 <별토가>다.

문제는 왜 하필 '암자라 동침' 삽화가 든 가람본 <별토가>를 골랐는가 하는 점이다. 김동건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암자라 동침' 삽화가 들어 있는 이본은 가람본 <별토가> 계열의 6종과 중산망월전 계열에 속하는 13종, 둘을 더해 19종이다. 적어도 숫자만을 놓고 봤을 때 '암자라 동침' 삽화가 수록된 이본은 <토끼전>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렵고, 이 삽화가 수록되지 않은 이본에는 <전을 범하다>의 해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일부러 자극적인 내용의 이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전을 범하다>는 학술 서적이 아닌 대중 교양서이기에 수많은 이본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하나를 선택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 고전소설의 다양한 얼굴 가운데 일부만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이본을 다 다루기는 어려웠겠지만, 자신이 어떤 이본을 선택했고 왜 그 이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지에 대한 설명을 넣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이런 설명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그러나, <전을 범하다>가 반가운 이유

이 같은 단점에도 국어교육 전공자로서 <전을 범하다>의 존재가 반갑다. 오늘날 고전소설은 학교 현장에서 온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데, 그 이유는 고전소설 자체의 문제보다는 교육 방법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토끼전>을 '봉건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라고만 봐서는 곤란하다. 체제 유지를 위해 민중을 희생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봉건권력도 문제가 많지만, 자라보다 유리한 위치에 선 순간 자라 부인을 탐하는 토끼도 미덥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토끼가 왕이 된다고 해서, 즉 민중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올까? 지금 토끼의 행동을 봐서는 권력자의 얼굴이 바뀔 뿐, 별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부패한 권력에 동조해 민중을 희생시키려 했던 자라도, 용왕의 총애 받는 신하였다가 용왕이 병에 걸리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육지로 가기를 거부하는 용궁의 대신들도 답은 될 수 없다. 

그래서 <토끼전>은 권력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봐야 한다. 기존 체제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권력을 잡으면 똑같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현실은 권력 자체의 속성에서 오는 것이다. 차르를 몰아내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우리는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자의 얼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타락 자체를 막을 수 있을까? 결코, 쉽게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복잡한 문제의식을 담은 <토끼전>을 '부패한 봉건권력 vs 건강한 민중' 따위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폭력이다. 사람에게 이 정도 폭력을 휘둘렀다면 합의도 못 보고 꼼짝없이 콩밥 좀 먹어야 할 정도의 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고전소설 교육은 한참 잘못됐다. 학교 교육이 고전소설의 복잡한 문제의식을 단순화시키고 권선징악이라는 틀에 가둬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전소설은 단순하고 진부한 이야기, 현대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로 점차 의미를 잃어간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전을 범하다>를 읽길 바란다. <전을 범하다>는 우리 고전소설 속에 담긴 문제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거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말해준다. 

이 서평은 <토끼전>을 중심으로 다뤘지만, 다른 고전소설에 대한 독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새결송>이 보여주는 '사법 비리'에 대한 통찰, <김현감호>에 담긴 '타자화의 논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감히 권한다. 무더운 여름날, <전을 범하다>와 함께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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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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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명작 동화의 세계는 곧 교훈의 세계다.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을, <개미와 베짱이>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명작 동화 속에 담긴 교훈 때문에 오늘도 부모들은 잠자리에 든 어린 자녀의 머리맡에서 명작 동화를 읽어준다. 

그러나 이 도덕적이고 건전한 명작 동화는 교훈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우리만치 가혹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분홍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빨간 구두> 이야기다. 가난한 소녀가 '분수도 모르고' 분홍신을 욕망했기로서니 그게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일까? 교훈도 좋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어린아이들이 읽는 명작 동화가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박현희 저, 뜨인돌 펴냄)는 그 오래된 질문의 답을 알려줬다. 명작 동화 속에 담긴 수많은 교훈은 사실 권력자들이 만들어놓은 규율임을, 그래서 그 교훈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피노키오가 코가 길어진 이유?... 착한 아이의 필수조건 '학교'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 <피노키오>는 온갖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명작 동화의 전통적인 공식에 충실한, 대표적인 명작 동화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피노키오가 그렇듯 온갖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착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노키오가 착한 아이가 아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는 학교에 가는 대신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납치되고, 당나귀가 되어 죽도록 일하고, 고래 뱃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온갖 고난을 겪는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런 고생을 해야 할 만큼 학교는 <피노키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노키오>가 발표된 19세기 말은 근대적인 학교가 성립되던 시기였고, 학교는 공장주들이 필요로 하는 미래의 노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나아가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습관을 길러줌으로써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죽을 만큼 고생해야 할 정도의 '죄'다! 

그렇다면 학교를 싫어하던 피노키오는 어떻게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노동자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병든 제페토를 간호하기 위해 피노키오는 양수기를 돌리고 여러 종류의 갈대 바구니를 만들어 팔았다. 그 순간 피노키오는 착한 아이가 됐고, 요정은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즉,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 가거나 노동을 해야 한다. 학교 역시 노동자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임을 고려하면 착한 아이의 필수요건은 노동이다. 이처럼 <피노키오>는 표면적으로는 "착한 아이가 돼라"는 아주 당연해 보이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교훈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가 돼라. 자본주의에 순응하라. 이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대가를 치를 지어니."

우리는 '샛길'을 택한 이들에게 빚지고 산다

'자본주의에 순응하라'는 '교훈'을 설파한 <피노키오>. 이제 '교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그토록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이유가 밝혀졌다. '교훈'을 어기는 것은 곧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균열에서부터 체제의 붕괴가 시작될 수 있으니 사소하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가난한 소녀 따위가 분홍신을 욕망한 것은 '죽을 죄'다.

<빨간 모자> 역시 '교훈'을 어긴 자에게 엄중한 시련을 마련했다. 빨간 모자 소녀는 샛길로 빠지지 말고 곧장 할머니 댁에 다녀오라는 분부를 어겼다가 늑대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빨간 모자>의 교훈은 "큰길 천국, 샛길 지옥"이다. 

그러나 만약 빨간 모자가 샛길을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빨간 모자는 무사히 심부름을 마쳤겠지만, 사람들은 계속 늑대를 피해 큰길로만 다니고 샛길로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빨간 모자가 샛길을 선택했기에 샛길은 또 하나의 길이 됐다.

결국 빨간 모자는 늑대를 물리쳤고, 이제 누구든 마음 놓고 들판의 어느 길이든 갈 수 있게 되었다. 예쁜 꽃이 유혹하면 꽃을 꺾으러 가도 되고 산딸기를 따고 싶으면 따러 가도 된다. 빨간 모자 덕분에 세상은 사방팔방으로 길을 내며 우리를 맞게 되었다. 고마워, 빨간 모자야.-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88p

일찍이 루쉰이 말했듯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샛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군가 용기 내어 길 밖의 길, 길 아닌 길로 발걸음을 내딛으면 수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그러면 지금은 샛길에 불과한 길도 큰길이 될 테니.

물론 큰길이 물리적 의미의 큰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따라야 한다고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규율들 역시 큰길이다. 명작 동화들은 항상 우리에게 큰길을 권한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성실해야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지 마라 등등. 그리고 이 큰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는 늑대가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샛길이 있음을. 거짓말이 때론 상대방을 위한 배려일 수 있고, 조금 불성실하더라도 그게 죽을 죄는 아니며, 지금 내 처지가 보잘것 없더라도 누구나 꿈꿀 권리는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샛길이 우리의 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래서 저자는 빨간 모자와 같은 '샛길족'을 지지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샛길을 택한 이들에게 빚지고 산다" 어쩌면 진짜 인생은 샛길에 있는지도 모른다.

명작 동화의 교훈을 의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의 장점은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명작 동화의 숨은 모습을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현직 교사로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동원해 능숙하게 이야기를 펼치는 솜씨는 독자를 명작 동화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저자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불공정한 규칙을 조롱하라'는 주제를 읽어낸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애초에 토끼 입장에서는 이겨봤자 얻는 것이 없고, 지면 개망신만 당할 경주였다. 여기서 저자는 제3자의 존재를 상상한다. 이 경주는 토끼와 거북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3자가 이득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는 경주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고, 경주 중에 낮잠을 즐김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조롱했다.

그렇다면 거북이는 어땠는가? 저자는 거북이가 야단스럽게 토끼를 깨우지 않고, 토끼의 선택을 존중했기에 더 멋진 쪽은 거북이라 말한다. 하지만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지 않은 것은 정말 토끼의 선택을 존중해서일까? '괜히 깨우지 말고, 이 기회를 잡아서 우승하자'는 계산이 깔렸던 것은 아닐까? 

나는 거북이가 토끼처럼 규칙을 조롱했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북이는 토끼 옆에서 잤어야 했다. 누가 나중에 왜 그 좋은 기회를 놓쳤느냐고 질책하면 "토끼가 자는 걸 보니까 갑자기 나도 너무 졸려서"라고 능청을 떨었어야 한다. 혹은 심판을 찾아가 "이 경기는 무효야! 난 그만둘 거야"라고 말하거나, 아예 출발선으로 역주행해야 했다. 그러나 거북이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토끼가 자거나 말거나 경주는 계속 진행됐고, 거북이는 승리했다. 나는 거북이가 비겁했다고 생각한다. 거북이는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은 명작 동화가 전하는 '교훈'을 의심함으로써 그 '교훈'이 사실은 권력자들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규율임을 보여준다. '교훈'의 세계가 강요하는 큰길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샛길을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명작 동화의 세계를 의심하는 순간 우리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 셈이다. 그러니 더 많이 의심하라, 그러면 더 넓은 세계가 열릴 테니.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이처럼 우리가 이제까지 몰랐던 샛길의 세계, 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한 우리의 의심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나도 오랜만에 '샛길족' 빨간 모자의 이야기나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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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다. 졸업을 앞두고 아무런 불안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 한 번 간 적 없고, 그럴듯한 자격증 하나 없는 내 모습을 보며 '대학 다니는 동안 뭘한 걸까'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래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집어든 것은.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야 하는 아픈 그들을 따뜻한 위로의 말로 보듬어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며 지금 느끼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조금이라도 위안받고 싶었다. 더구나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멘토'가 쓴 책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쉽게도 '모든' 청춘을 위로해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렇게 '빨리' 취업하려고 하느냐고?

이 책의 저자 김난도 교수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일찍'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성공하는 것이라 말한다. 꽃마다 제각기 피어나는 계절이 다르듯 그대라는 꽃이 아직 피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 피어날 때가 오지 않았을 뿐 때가 오면 어느 꽃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 꽃피울 것이니, 그때를 위해 당장의 취업에 연연하기보다 훗날을 위한 내공을 쌓으라고 권한다.

지금 당장 어떤 성취를 이루지 못한 것에 불안해하지 말고 훗날을 위한 내공을 쌓으라는 그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조언은 지금 당장에 연연하지 않고 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겨운 청춘들에 그 조언은 공허하다.

최근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의 발언으로부터 재발된 반값등록금 논쟁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등록금 때문에 고통받는 많은 대학생은 반값등록금에 지지를 보냈고, 언론은 이들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보도했다. 6월 10일자 <경향신문> 기사 <등록금 이것이 문제다 - 요즘 대학생 등록금 해결법> 역시 등록금 때문에 고통 받는 대학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등록금을 대출받아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해 경기 성남시에 소재한 경원대를 졸업한 김모씨(28). 올해 어렵게 취직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팍팍하다. 대학시절 등록금을 대출받았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등록금을 대출받았던 김씨의 빚은 3000만 원. 

김씨는 어머니와 둘이 사는 모자가정이지만 자신이 성인이라 기초생활수급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등록금은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다.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지만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결혼할 자금도 문제지만 자신의 빚을 여자친구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또 번듯한 직장까지 구해도 등록금 빚은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다"면서 "어려운 사람들도 공부는 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니냐"며 울먹였다.

울산지역 사립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25)씨는 취업 준비에 바빠 아르바이트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 탓에 커진 것은 빚더미. 지금까지 빌린 학자금은 1500만 원에 달한다. 박씨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빚이 될 것 같다"며 "친구 중에는 벌써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공인 영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지만 빚 때문에 무조건 취업해야 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아니 대학생일 때부터 이미 빚쟁이인 대학생들에게 빨리 취업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빚 때문에 무조건 취업해야 한다"는 이에게 '그대라는 꽃이 필 계절은 따로 있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날 청춘들이 빨리 취업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조급증에 걸려서가 아니다. 빨리 취업해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상당 부분 지나치게 비싼 등록금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등록금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당수의 대학생들에게 '조급해 할 필요 없다. 빨리 취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조언은 그래서 허망하다. 그러나 이처럼 가난한 대학생을 고려하지 않은 조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경험한 것, 그것이 자신의 세계다

김난도 교수는 "대학생 때 수입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과외를 의뢰하는 건수도 많았고, 단가도 높았"기 때문에 과외로도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야단쳤다. 저자는 과외로 얻은 수입 덕분에 목표의식을 잃고 나태해졌던 젊은 날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경제적 풍요는 때로 독(毒)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물론 저자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이 조언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사에 나온 것처럼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수많은 대학생이 이러한 충고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독이 돼도 좋으니 한번 경제적 풍요를 누려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특히 다음 대목에서는 거부감마저 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긴다. 알바가 가혹하게 저임금이면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힘들고 허탈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수입이 지나치게 좋은 경우다. 일부의 사례이지만, 그 알바의 수입이 꽤 좋은 경우에는 '굳이 졸업을 해야 하나?' 혹은 '취업을 해도 초봉이 형편없다던데'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하니 말이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 279p~280p

김난도 교수에게 묻고 싶다. 수입이 지나치게 좋아서 독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게 정말 알바가 가혹하게 저임금인 것보다 더 큰 문제인지. 혹시 자신이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

저자의 이 같은 인식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대학생 때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풍요'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대학교수가 된 후에 만난 학생들도 서울대라는 한정된 세계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 중 다수는 김난도 교수가 그랬듯이 과외를 통해 경제적 풍요까지는 누리지 못하더라도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벗어난 세계, 즉 가난한 대학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알바가 가혹하게 저임금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수입이 지나치게 좋은 경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서울대 교수라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혼자 살아남는 것뿐... 바뀌는 것은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청춘들이 겪는 어려움을 개인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김난도 교수도 청춘들이 직면한 문제가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개인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A 박사의 이야기다.

김난도 교수는 자신과 면담했던 A 박사의 이야기를 꺼낸다.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A박사에게 "보수가 넉넉한 데다 기업문화가 좋기로 유명한 어느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입사를 제안해왔"는데, 그는 결국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다. 저자는 A 박사의 그 결정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참 바보 같은 결정을 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음이 그를 더 빨리 꿈에 데려다 주리라. - <아프니까 청춘이다> 30p

일단 개인적으로 자신의 꿈을 좇는 사람을 좋아하며, 그런 점에서 A 박사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저자가 말했듯 A 박사의 결정이 "그를 더 빨리 꿈에 데려다" 줄 것이라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교수 채용의 문은 너무도 좁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린다고 어떤 보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특히 우리 전공은 학계가 좁은 편이어서 채용공고가 자주 나지 않는다. 1년만 기다리면 된다는 식의 기대는커녕, 통상적인 예측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 27p

김난도 교수가 이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A 박사의 결정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 단정하는 듯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A 박사가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교수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꿈이 이뤄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A 박사가 자신의 꿈을 이뤄 교수가 됐다고 해도 문제다. 그가 꿈을 이룬 대신, 또 다른 수많은 A 박사가 교수의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애정을 갖고 청춘에게 건넨 말들은 대개 이런 식이다. 그가 말한 대로 빨리 취업하는 데 연연하지 않고 장래를 위한 내공을 쌓는다면, 그의 조언에 따라 내공을 쌓은 사람은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취업하는 대신 떨어져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혼자 살아남는 것일 뿐.

혹은 수많은 청춘들이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내공을 쌓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제는 취업시험에서 내공을 가진 이들끼리의 대결이 시작된다. 스펙에서 내공으로 평가의 잣대가 바뀌겠지만, 그뿐이다. 이제 내공의 깊이가 달리는 수많은 청춘들이 낙오할 것이다. 결국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위로가 아니다 

김난도 교수는 나름대로 진정성을 갖고 청춘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20대에 겪었던 경제적 풍요처럼 공감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자신의 힘들었던 경험이나 실패담까지 털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김난도 교수의 진정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쟁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대단한 비법을 제시하더라도 누군가는 낙오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청춘 개개인이 아니라 청춘이라는 집단을 놓고 봤을 때, 개인적인 해법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글의 서두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모든' 청춘을 위로해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별 의미 없는 조언, 때로는 조언이라 할 수도 없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아픈 게 단순히 청춘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청춘들은 지나치게 비싼 등록금 때문에 아프고, 취업의 벽이 너무 높아서 아프고, 눈을 낮춰 중소기업에 가기에는 대기업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아프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은 상당부분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크지 않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는 청춘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김난도 교수의 위로가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건 그의 안일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위로가 아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이다. 우리의 고통이 모두 청춘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볼 수 없다. '그냥 청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는 아픔과 '2011년 한국사회의 청춘'이기에 겪는 아픔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청춘을 괴롭히는 '사탄의 시스템'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탄의 시스템'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청춘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위로받지 않아도 좋으니 위로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해결이다. 

물론 청춘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청춘 자신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위로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의 문제에 공감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인생 선배, 위로받을 필요가 없는 세상을 위해 나서는 인생 선배가 있다면 그 문제는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인생 선배들의 존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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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하건대 필자는 막스 베버도정치 철학도 잘 알지 못한다그래서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더러짧은 지식 때문에 잘못 읽은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따라서 이 글은 평범한 한 시민이<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저, 박상훈 역, 폴리테이아 펴냄)를 읽고 난 소회를 가벼운 마음으로 써본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막스 베버가 한 학생단체의 요청으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스 베버는 이 강연을 통해 소명의식을 갖춘 정치인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이전에도 번역된 바 있지만이번에 나온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최장집의 '강의'를 통해 텍스트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필자도 그렇지만 막스 베버나 정치 철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최장집의 '강의'가 길잡이가 될 것이다여기서는 필자가 생각한 두 가지 쟁점을 짚어보는 것으로 서평을 갈음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지배인가?

베버는 "모든 국가는 폭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며 폭력이 국가 특유의 수단이라 주장한다물론 폭력만으로 국가가 유지될 수는 없다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정당성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베버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내적 근거에 따라 지배를 3종류로 나눈다.

 

첫째는 전통적 지배다이는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에 근거한 지배로 씨족 사회에서의 가부장이나 고대 중국의 황제가 행사하던 지배 양식이다둘째는 카리스마적 지배다이는 비범한 개인의 권위즉 카리스마에 근거한 지배로 예언자나 전쟁 지도자 등이 행사하던 지배 양식이다셋째는 합법적 지배다이는 합리적으로 제정된 법과 규칙의 권위에 근거한 지배로 근대적 공무원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양식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이 셋 중 어디에 포함될까합법적 지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그러나 베버는 민주주의를 카리스마적 지배 형태로 보고 있다베버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 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계이다."(46p)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물론 베버의 말처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그러나 지도자의 역할이 법과 규칙을 넘어설 만큼 대단한 것일까?

 

우리의 현대사를 잠깐 돌이켜보자우리 헌법은 독재자의 입맛에 맞춰 이리저리 변해온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이승만과 박정희는 자신들의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 선거제도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다시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바꾸는가 하면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등 헌법을 마음대로 유린해왔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힘이 더 강력하다고 볼 수도 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독재자들도 나름대로 헌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헌법을 바꾼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헌법이 이들을 전혀 구속하거나 제약할 정도의 힘이 없었다면 굳이 바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들이 멋대로 바꾼 헌법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이들의 지배도 대체로 법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세부적으로 법을 어긴 사례가 없지는 않겠지만독재자들의 지배 역시 법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베버의 입장에 의구심이 든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신념윤리란 '각 개인이 행위할 때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도덕이다.'(87p) 반면 책임윤리는 '사건의 전체 구조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는 판단력사려 깊음을 뜻한다.'(87p~88p)

 

개인적으로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을 읽고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으며 책임윤리의 한계를 생각하게 됐다물론 정치적 행위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 문제이며 선한 의도가 늘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책임윤리는 필요하다그러나 책임윤리 역시 한계를 갖는다. '인간의 이성으로 자신의 행위가 불러올 결과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아무리 풍부한 자료와 세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결과를 예측하려 해도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멜서스가 쓴 <인구론>의 그 유명한 구절,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경우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인식은 멜서스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서울대 이정전 교수는 "맬서스를 비롯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농업부문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워낙 강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인위적 노력을 단연 압도한다고 생각하였다말하자면식량생산에 있어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절대적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따라서 멜서스의 <인구론>를 단순히 오해와 편견에 가득 찬 보수주의자의 저작이라 봐서는 곤란하다그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빗나갔지만당대의 지성들이 그와 인식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멜서스의 어긋난 예언은 앞으로 기술이 얼마나 발전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점즉 이성의 한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편이 공평할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결과를 예측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 회의가 든다우리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이성뿐인데인간의 이성이란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그런 의미에서 결과를 중시하는 책임 윤리는 분명 한계를 띠고 있다그래서 정치가의 길은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권하기에는 꺼려지는

필자는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기 전에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최장집이 해설한 막스 베버라니생각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책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막상 이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에 빠졌다이유는 어려웠기 때문이다최장집의 '강의'는 그래도 읽을 만했지만막스 베버의 '텍스트'는 만만치 않았다물론 필자의 무지 때문이라 하면 할 말은 없지만최장집의 책을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읽었고 책임윤리와 신념윤리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책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그래서 솔직히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는 꺼려진다그러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라는 내용만으로도 이 텍스트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다소 머리가 아프더라도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시간을 투자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최장집의 다른 <정치철학 강의시리즈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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