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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임고생'으로 보내야 할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아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다. 긴장감에 휩싸여 새로운 걸 시작하긴커녕 기존에 해왔던 것들을 꾸준히 이뤄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마음이 조여드는 만큼 몸은 늘어진다. 그래서 열의에 불타 신청했었던 하니포터 활동에도 조금씩 소홀해졌다. 다른 읽고 싶은 책도 많은데 의무적으로 읽고 글까지 써야 하는 활동을 꼭 해야 하나, 이만하면 충분히 경험했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책 신청자를 받는 마지막날 '이대로는 싫어.'라는 충동적인 생각으로 책 두 권 서평을 신청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전공 공부를 하며 읽은 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의 저자 백수린 작가님의 추천사였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콱 맘에 박혔다. 의식해주진 못했지만 외로웠던 내 마음이 어떤 신호를 보낸 건 아니었을는지, 막연히 추측한다.
덧붙여, 예나 지금이나 난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그 일련의 과정이 자동화된 기계의 알고리즘마냥 딱딱하게 굳어져서, 문학을 통해 발견한 나나 타인의 생각·감정이라든지 세상의 이면 같은 것보다 텍스트 그 자체만을 설명하고 홍보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약 1년 전 구병모 작가님의 『방주로 오세요』를 읽고 남긴 포스팅을 읽고 "적잖이 공감했다."던 어떤 분의 댓글 덕에 그걸 깨달았다. 아차 싶었다. 어떤 책을 어떤 계기와 방법으로 만났건간에 내가 고수하려 했던 건 진솔한 감상과 기록이었는데. 그래서 이 책, 『밀회』는 좀 다른 방식으로ㅡ아마도 과거 내 스타일대로 남겨보려 한다. 텍스트가 궁금하신 분께는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 간단 책 소개
난 이 책이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단편 12개가 실린 소설집이었다. 큰 배경은 아일랜드, 영국이었지만 자잘한 설정(인물, 사건, 주제 등)은 작품마다 달라서 영미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주요 인물들과 그들의 성격, 관계 등을 메모하며 읽었다. 소설 세 편 정도를 읽고 나서야 이 작가가, 이 소설집이 무엇을 주제의식으로 삼고 있는지 알아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상황과 각 인물의 입장, 감정선을 섬세하게 느끼려고 노력했다.
약간 힌트를 흘렸는데, 이 열두 편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사실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납득하려 하면 곤란하다. 하나도 이해 안 될 거니까.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트레버는 사회적 약속, 합의, 규칙 안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수가 애써 회피하고 부정하는, 그러나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에서 접하고 겪을 수 있는 만남과 이별, 눈짓과 포옹 들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생의 근본적인 불가해함을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기에 그의 글은 섬세하지만 공백이 많다. 독자는 그 공백 속에 지금껏 자신의 생에 담긴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비밀이 된' 것들을 대입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공백에 작가의 언어를 초대해 그것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 불가해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며칠 전 새벽 막역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불가해한 걸 이해하려 하다 낭패를 본 경험'을 공유했다. 거창한 얘기는 아녔고, 풀어쓰자면 '왜 나를 향해 오는 사랑을 믿을 수 없을까'와 그로 인한 고통(대개 자기처벌에서 기인),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친구 얘기를 늘어놓을 순 없으니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어려서부터 가족, 친구, 이웃, 스승 그 외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나도 사람 너도 사람이기에 종종 어긋나는 일은 있었어도 그것이 생을 통째로 정체시키거나 무너뜨릴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지나간 일이라 어느 정도 미화된 것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뭣보다 나는 지금 괜찮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도 타인과 세상에 꿀까진 아닐지언정 독은 못 될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됐다. 덕분에 나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이들을 여럿 만나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
그러나 나를 향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건 미치도록 어렵고 힘겨웠다. 특히 다른 이들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 앞에서 나는 바람 빠져 공중을 회도는 풍선 쪼가리처럼 혼란스러웠다. 내가 기억 못하는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를 봐온(그래서 서로 가식 부릴 여지가 없는) 가족들의 사랑은 이해 못할 게 없었지만,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가식 덩어리에 세상 물정은커녕 자기자신조차 모르는 바보 멍청이인 내 진짜 모습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나를 좋아해주고 사랑해주는 걸 느낄 땐 내가 온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나마 근접한 단어로는 죄의식 같은 게 스멀스멀 혈관을 타고 흘렀다.
자존감이 낮은 건가, 의심이 많은 건가, 경험이 부족한 건가, 사랑을 모르거나 못 하는 인간인 건가 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이 모든 문제는 나를 진실로 사랑해주는 저들이 아니라 내가 초래했다. 나는 또 이렇게 저들을 실망시키고 떠나고 싶게 만든다.'라는 것만이 자명했다. 그래서 나는 손톱을 뜯고 절식과 폭식을 하고 밤늦게까지 나를 재우지 않는 방식 등으로(외현적인 게 이 정도고 정신적인 영역의 것이 훨씬 많았다) 나를 처벌했다. 한창 이런 상태였을 땐 그 모든 게 다 별개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문제의 근원을 파내니 더 이상 잔뿌리도 돋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근래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말해줬다. 전에는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도 다른 해결책을 찾거나 적용하질 못했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하고 수용할 줄 알게 됐다, 말하자면 알고리즘이 달라졌다고. ㅡ어떻게 했냐고? 누군가에겐 '이게 왜 어려워?' 싶겠지만,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달 때 '아~ 저 사람한테는 내가 사랑스러워 보이나 보다~'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전에는 그 마음을 도통 '이해·납득'할 수 없어 꼬치꼬치 캐묻고, 의심하고 부정했다. 그런데 내가 "원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서,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한다 말했던 게 아니라 (불가해한) 그의 (불가해한) 눈[마음]으로 봤을 땐 내가 사랑스러워 보여서 그렇게 표현했던 것뿐이다. 사랑이 뭔지,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아닌지, 저 사람이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이해하려고 발버둥쳤으니 문제 아닌 게 문제가 됐던 셈이다.
이 말을 듣던 친구는 돌연 "아ㅡ!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어?!" 하더니 내 얘기를 했다(🌸내가 왜 거기서 나와...?🌸). "내가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널 좋아하는 것처럼 누군가도 날 그렇게 좋아할 수 있겠구나, 멀리 갈 필요가 없었구나." 라고. 내 삽질 가득 경험담이 친구 마음의 어려움을 걷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니 기뻤고, 과거에 비하면 '불가해한 것 그 자체로 수용하기'를 더 잘하게 된 내가 대견했다.
며칠 전 이런 경험을 해서인지 옮긴이의 글이 무척 공감됐다.
"지금까지 번역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내가 이해한 내용을 정확하게 옮긴다.'였다. …… 그러나 트레버의 인물들은 미묘하고 복잡했으며, 나의 조급한 이해를 받아쳤다. 이해라는 말은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곧 그것을 분류해서 내가 가진 생각의 틀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쉽고 빠른 이해는 그만큼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 쉽고 빠르게, 남김없이 바로바로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오만이 아닐까."
인간에게 정보의 공백은 고통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은 모르는 것, 아리까리한 것, 알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탐색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거라고. 그러나 편협한 인간이 편리성을 위해 개발한 도구(ex. 언어)는 결코 생을 완전하게 재연하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생과 그것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끝없이 근접해갈 뿐이다.
그래서 난 생의 불가해함을 우리가 이해 가능한 것으로써 표현하려 했던 윌리엄 트레버라는 작가가 마음에 든다.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났을 때와 유사한 여운도 느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그 섬세함과 겸손함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지 않는 햇빛처럼 포근하고 따스하다.
나는 죽기 전까지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앞으로도 불가해한 것을 이해하고 규정할 거다. 그러지 않으려 애써도 이는 인간의 생존 방식이며 한계이기에 괜시리 나를 매도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생에는 이해 가능한 것보다 근본적으로 불가해한 것이 훨씬 많으며, 실은 그 불가해함이 생을 이루는 주축이자 생을 형언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언어임을 잊진 않겠다. 그렇게 살다 보면 '문제'로 여겼던 생의 무엇인가가 흐르는지 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타고 흘러갈지도 모르고, "슬픔과 기쁨, 실망, 불안, 후회로 이루어진, 내가 가진 편협한 시각으로는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순간들" 곧 현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
* 이 글은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