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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
유디트 타슐러 지음, 홍순란 옮김, 임홍배 감수 / 창심소 / 2021년 12월
평점 :
※ 본 포스팅은 책을 증정 받아 쓰였으나 가감 없는 개인적 감상임을 밝힙니다.
얼마 전 블로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두 편에 대한 글을 썼다. 이후 다른 책들을 읽고 글을 쓰고 일상을 사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임용고시 관련 정보를 찾아보던 중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단 알림이 떴다. 의아하게도 "국어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바로 들어가 확인해 보니 출판사 측에서 『국어교사』라는 책을 읽고 글을 써주겠냐 제안하신 거였다. 친구들과 함께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그 책에서 주인공을 끊임없이 보물로 이끄는 "표지"들이 떠올랐다.
'표지인가, 정말로 국어교사가 될 거라는 표지인가, 자신감을 갖고 이대로 가 보라는 하늘 또는 신 또는 운명의 계시인가' 하는 생각이 짜릿하게 스쳐갔다. 그래서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추리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였대도 관심이 갔을 테지만 국어교사인 작가가 국어교사인 주인공을 내세워 어떤 사건을 일으킬지(또는 해결할지)가 궁금했다.


책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표지는... 감각적이면서도 섬찟했다. 특히 "국어교사인 여자가 풀어내는 어린아이를 납치해 감금한 뒤 사육하는 이야기"라는 문장이 그랬다. 그러나 띠지에 쓰여 있는 어느 교수의 평은 이 책이 마냥 잔인한 이야기가 아님을 어필(?)하려 하는 듯했다. 그래서 국어교사이자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되는 일러스트 속 여성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말자고 생각하며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독특했다. 당연히 줄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냅다 누군가의 이메일 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엉, 뭐지? 무슨 상황인 거지? 이 이메일들을 주고 받는 이들은 누구지?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설명하자면, 의문의 메일을 주고 받았던 마틸다와 크사버는 과거 연인이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헤어진 후 각자 살다가 16년만에 국어교사와 학교를 방문할 작가의 신분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런데 둘의 태도와 기류는 묘하다. 미련 없는 이들이 오래 전 자신들의 청춘을 회고할 때 그러하듯 담담하지도 않고, 서로를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이로 여겨 마냥 가시 돋친 태도(혹은 지극히 사회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30여 년 전 일을 얘기하는데도 둘은 무언가 들떠 있다. 그 들뜸에는 설렘, 분노, 혼란, 씁쓸함 등 다양한 감정이 배어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과거 둘의 만남과 대화와 사랑, 그리고 함께 겪었으나 다르게 느끼고 기억하는 여러 사건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특이한 점은 이것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될 뿐만 아니라 16년만에 만난 두 인물이 서로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크사버는 마틸다에게 자신의 할아버지를 주인공 삼아 쓴 소설을 들려주고, 마틸다는 크사버에게 '크사버 아들 납치 사건(실제 사건)'에 대한 자신의 추리ㅡ그리고 자신이 그의 아들을 납치해 감금한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의할 것은 국어교사와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이야기일 뿐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그들이 왜 그 이야기를 지어 서로에게 들려주는지,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추리하며 진실을 찾아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진짜 재미가 시작되는 포인트이자 핵심이다. 그것을 주절주절 나열하는 건 크나큰 스포일러가 될 것이니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내 이야기를 좀 더 하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마틸다와 크사버 둘 다에 대해 애정과 연민의 마음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 과정에는 마틸다에게 각별히 마음이 갔다. 그의 삶의 궤적은 나와는 전혀 닮아 있지 않지만 어쩐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머니에 의해, 연인에 의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교사로서 학생 개개인을 정성으로 돌보고 가르치는 마틸다. 누군가는 지루하고 따분하다 일갈하는 삶이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해 획득한 반복성과 안정성이기에 그는 언제까지고 '국어교사'로 불리고 싶어한다. 느리지만 꾸준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거북이 같은 그가 지독히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조만간 내 마음을 담아 그를 그려 볼까도 생각 중이다.
읽어 본 추리소설이 몇 편 없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었을 때와 감상을 비교해보려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가면산장 살인사건』, 『용의자 X의 헌신』)은 흥미진진했지만 독자로 하여금 사건과 추리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범인들의 몽타주처럼 모노톤으로 그려졌다. 당연히 그들에 대한 어떠한 애착도 없었다. 그런데 『국어교사』는 달랐다. 표면적 형식은 추리소설이지만 사실 이 소설을 어떤 장르적 규범 안에 한정시키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어교사』를 읽으면서도 추리를 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보단 인물들의 성격, 가치관, 강도 깊게 남은 경험, 대화, 분위기 등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데 더 주의를 기울였으며(그래야 '추리'를 할 수 있기도 함) 그래서 그들이 맞닥뜨린 여러 가지 사건 또한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작가의 목적과 역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단적으로 소개, 설명할 때 '감성 힙합' 같은 용어를 따 '감성 추리'라고 말할까 한다. 다른 장르의 소설은 읽어봤지만 추리소설은 별로 읽어보지 않은 분, 추리소설을 좋아하면서 신박한 형식이나 입체적인 인물, 그들 간 서사와 감정선 등을 읽어내는 것에도 흥미와 감동을 느끼시는 분께 강력 추천한다.
국어교사를 희망하는 내게 운명처럼 찾아온 운명적 감성 추리물, 『국어교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