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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와 함께 걷다 -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
한홍구 지음 / 검둥소 / 2009년 11월
평점 :
나는 역사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역사여행도 여러 번 갔더랬다.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이 책을 골라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라는 부제를 마저 읽지도 않고,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까지 아마 읽고 책을 넘긴 듯 하다. 첫 꼭지부터 '전쟁기념관'이다.
무슨 얘기일까?
우리는 이런 곳엘 가지 않는다.
아. 이곳도 역사 현장이구나.
그리고 떨떠름하게 '뭐, 이런 데도 있구나.'하면서 돌아나왔고, 그 뒤부터는 가끔 그곳 극장에서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안 어울리는구나 생각했던 정도에서 끝났던 곳. 그곳을 한홍구 선생님과 꼼짝없이 샅샅이 돌아보았다. 아, 그랬구나. 이래서 우리는 이곳을 떨떠름하게 떠나고 다시 가보고 싶어 하지 않았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는 이럴 때, 한편으로는 새로운 눈으로 내가 덜 알던 것, 모르던 곳을 배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보고도 모르는 눈으로 세상을 다니는 게 두렵고 부끄럽다.
그러면서 나는 6학년 아들 일기장이 떠올랐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아이는 많은 것을 보고 오게 하려는 배려로 들렀는지 해병박물관이라는 곳을 갔나 보다.
'나는 해병박물관에 갔을 때 느낌이 좋지 않았다. 6.25 전쟁을 기념하는 것처럼 6.25 전쟁 내용과 여러 가지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랑하듯 써 있는 내용을 나는 아픔의 역사로 간직하고 싶다. 해병대 역사관을 아픔의 역사처럼 써 있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이 6.25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평가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썼다.
어째서 같은 민족의 가슴에 총을 쏘고 서로 죽이는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을 아픔의 역사로 기억하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1990년대에 태어난 어린 아이는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고 부끄러워 하는가?
같은 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눈뜬 장님이라고 한다. 벌거숭이 임금님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어린 아이였던가.
우리 아이한테 말해 주었더니 나보다 먼저 책을 보려고 한다. 전쟁기념관만 보고 나머지는 기말고사 끝나고 보라고 했다.(대한민국 학부모가 가진 슬픔이여!)
강화도는 또 어떠한가. 사실 강화도는 여러 번 간 곳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분처럼 사실을 연결지어 뚜렷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말이다.
'온 국토가 박물관인 나라에서 단군에서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농축해서 보여주는 박물관이 바로 강화도이고,'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을 견준 대목 또한 강화도편에 나오는데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왜 백 년 가까이 빨리 인쇄술이 발달했고,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온 프랑스 병사가 집집마다 초라한 가운데에도 책은 있었다는 데에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인쇄술이 발달했는데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세상을 바꾸고 역사에 기록되는 동안, 우리 인쇄는 약탈품이 되고 역사 기록으로만 남았냐 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홍구 선생님은 매우 간단하게, 뚜렷하게 칼같은 설명으로 금을 그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많이 찍기 위해서 발명한 것이라면 우리 선인들의 금속활자는 적게 찍기 위해서 발명한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금속활자본인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겨우 네 부를 찍었을 뿐이다. 이렇게 수요가 적은 책을 목판으로 인쇄한다는 것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 한국의 금속활자 발명이 지식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이 위대한 발명을 지식의 대중화로 이끌어 낼 만큼 한문으로 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집단이 형성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 밖에 넘어졌다 일어서면 또 넘어뜨리고 또 일어서면 또 넘어뜨려, 공부하면 답답해지는 현대사를 이렇게 알뜰살뜰 찾아내어 이건창 같은 보수주의자를 요즘 얼치기 보수주의자들과 견주어 보여주기도 하고 애정을 가지고 구석구석 다니는 이 책을 읽노라니 소설처럼 재미있다.
강연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면 또 넘어뜨리고'로 보았던 것을 한홍구 선생님은 '넘어뜨리면 또 일어서고, 싹을 잘랐다 싶은데 어느새 또 자라나' 수구 세력들도 지긋지긋해 할 것이라며 우리 역사를 낙관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니 나 같은 사람은 숨이 짧아 역사학자가 못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보고 싶고,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으니, 그저 더욱 답답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 그 깊은 강을, 그 흘러감까지 함께 보는 분은 지고 무너진 역사에서 되살아나는 민중의 힘을 믿나 보다.
이렇게 얻은 기운으로 새해를 맞이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