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붓펜은 왜 집어 드는 거예요? 경포대에서 우리 사주 말했는데, 잊어버린 거예요?”

 

마흔 살 나영은 점보는 남자에게 농을 걸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현수가 아내에게(지금은 아내가 아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꿈인데, 알지 않을까? 아닌가. 아무튼, 이 사람 나이는…….”

아니, 아니, 생년월일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그냥 폼으로 집은 거야. 손이 어색해서.”

 

남자는 씩 웃으면서 붓펜을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는데, 조금 그럴 듯해 보여야지.”

, 그게 뭐예요.”

경건해야 하거든. 나는 몰라도, 두 사람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나영의 핀잔에 남자는 정색을 하면서 붓펜을 돌리던 손길을 멈추더니, , 소리를 내면서 붓펜을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여러 어린 애인들한테 사기를 친 게 다 업으로 쌓여 버렸으니, 이렇게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그 업을 풀어야해. 아무튼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일단 그건 접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해.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거 입 아파.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꿈이 아니야.”

진짜로 꿈이 아니라고요?”

 

나영이 말했다.

 

그렇지. 이건 현실이야. 왜 이런 현실이 생겼는지는 나도 몰라.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장난을 친 걸 수도 있고, 시공간이 조금 흐트러져서 갑자기 우리 세 사람이 여기, 이 시간과 공간에 있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저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의 의식이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걸 수도 있어.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알겠어. 분명한 건 한 가지뿐이야. 나는 어제 두 사람이 여기에 올 거라는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들은 말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공책에 떡 하니 적혀 있더라는 말이지. 나는 앞으로 3년 뒤에나 두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공책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이 누군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말을 두 사람에게 해주어야 하는지 딱 알겠더란 말이지. 사실 오늘 몸살기가 있어서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두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

이 사람, 오늘도 사기 치려는 거 같은데?”

 

현수가 나영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허어, 아니라니까. 지금 여기서 사기를 치면 내 점 인생은 끝이야. 할 말이 많으니까, 끼어들지 말고 일단 들어나 보라니까.”

, 해보세요.”

 

나영은 남자를 보면서 어서 시작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들어올렸다.

 

아마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지금 삶을 아주 절실하게 수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두 사람은 어떤 힘이나 의지, 아니면 시공간의 비틀림에 이끌려서 여기에 와 있는 거지만, 뜬금없이 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누군가 분명히 간절하게 바랐던 거야. 그 바람 때문에 약간의 기적이 덧붙여진 걸 테지. 둘 다 20대 모습으로 이곳에 와 있잖아? 그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거야. , 양자역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아주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아주 일어나기 힘든 확률로 시간이 거슬러 온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가끔 그런 부부들이 있어.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기로 이끌려오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게 되는 순간으로 돌아오는 부부들이 있다는 거지.

 

물론 한 번 뒤틀린 시공간이라 두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어. 아무튼, 두 사람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야. 이 시간, 이 공간에 빠진 사람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 한 달 뒤에 두 사람이 동시에 원했을 때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면 딱 1분 동안 기억이 남아 있는 시간이 있을 거야. 그때 삶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을 최선을 다해 하면 돼. 1분이 지나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테니까.”

그게 무슨?”

 

현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저씨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어요? 완전히 믿어 버렸는데, 꿈에서 깨어나서 완전 허무해지면요.”

 

나영이 물었다.

 

, 원래 삶이란 게 일장춘몽이지. 이게 꿈이라고 해도 꿈속에 현실은 그렇게 정해져 버린 거야. 한 달 뒤에 꿈에서 깨어나느냐 한 달 뒤에 꿈속에 남느냐. 꿈이든, 꿈이 아니든, 이건 두 사람에게 놓여 있는 지금의 현실인 거지. ,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가 봐. 몸이 으슬으슬해서 빨리 집에 가서 누워야겠어.”

우리가 더 들을 이야기는 없어요?”

 

나영이 또 물었다.

 

없어. 한 달 뒤에 뭐든지 결정하라, 이게 결론이야. 빨리 나가. 자고 싶으니까.”

 

남자는 현수와 나영에게 빨리 나가라며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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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언어 - 촌철살인 이낙연에게 내공을 묻다
유종민 지음 / 타래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내 기억 속 총리들은 생각보다 비겁하다, 무능하다, 바보다, 사악하다, 바보에 사악하다, 정도였다. 굳이 총리라는 자리를 둬서 자기 비리 남의 비리 감추는 기회를 줄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까지 미쳤을 때는 이런저런 모든 불합리한 생각을 다 끌어와서 총리 따위,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바꿔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이낙연 총리.

 

명석하게 생각하고 조리 있게 말하고 온화하게 사람을 대하는 이낙연 총리를 보면서 아, 사람이 저렇게 생각하고 생활하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최고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보다 얼마 전에는 강일원 헌법재판소 법관을 보고, 와 부럽다, 했는데, 이낙연 총리가 등장한 뒤로 그 분은 2위로 밀렸다).

 

하지만 보통 내공이 쌓이지 않고서는 이낙연 총리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그 분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말과 태도가 내 것이 될 리 없다. 하지만 일단 분석을 하는 것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유종민 한국경제 TV 파트장이자 깨움연구소 소장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유종민 저자는 자신의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은 이낙연 총리의 공적인 기록과 몇몇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총리의 언어>를 작성했다.

 

공적 기록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텔레비전 토론회나 공청회 기록이고 사적 기록은 가족과 함께 쓴 책과 보좌관, 기자 등 함께 공직을 수행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기억들이다.

 

자료가 많지 않다보니 나온 이야기가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구조인데, 유종민 저자는 그 이야기들을 한 번은 생활 이야기로, 한 번은 언어 이야기로, 한 번은 공직자의 자세 이야기로 거듭 사용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같은 이야기를 자주 읽는 동안 조금 지루해지는 면도 있지만, 같은 이야기를 계속 읽는 동안 분명하게 기억하게 된다. 문제집도 이런 구성으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핵심 내용을 계속 반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총리의 언어> 초반부는 이낙연 총리의 지난 삶을, 후반부는 아마도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을 이낙연 총리의 언어가 갖는 특징과 그런 언어를 구사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들이 나온다. 결국 정수는 4부와 5부라고 생각하는데, 막강한 팬심으로 읽은 1부부터 3부도 이낙연 총리를 조금은 알게 되는 기회였기에 상당히 좋았다.

 

<총리의 언어>를 읽다보면 저자 또한 이낙연 총리의 상당한 팬임을 알 수 있다(아니면 독자들이 팬일 테니, 철저하게 독자를 겨냥하고 계산한 코멘트일 수도 있겠다). 나쁘지 않다. 정치인에게 팬심이 생길 때 시민은 좀 더 분명하게 사회 활동에 참여할 동기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저어하던 정치 세력은 똑똑하고 탐욕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마음이 쓰이는 정치 세력은 착하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정치를 외면하고 언론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임을 2016년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알았다. 똑똑하고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던 세력은 똑똑하지 않았고 탐욕스럽기만 했다. 무능하고 착하다고 생각했던 무리는 영리했고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에서 정치가들을 보면 탐욕이 정의를 이겨 왔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그런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 시민에게 있다. 그 시민이 옳은 방향을 쳐다보게 하는 사람들이 온화하지만 단호한 말투와 태도로 좀 더 옳은 일을 해나가는 이낙연 총리 같은 분들이 아닐까 싶다.

 

<총리의 언어>를 본다고 내 말투가,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거 같다. 하지만 생활하면서 자주 이낙연 총리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낙역 총리의 말투와 태도를 생각하면서 <횡설수설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법>을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두 책을 얻었는데, 상당히 시너지가 있는 조합이다. 2018년에는 좀 더 차분하고 영리한 사람이 되기를 빌어본다.

 

추신: 128쪽 첫 문단 그는 계속 고사하다 200016ww3선 땐 3개가 됐고 4선 땐 4개가 됐다.”는 단락이 전체 누락되거나 뭔가 잘못 된 거 같은데, 2쇄가 나올 때 정정해야 할 듯 하다.

 

추신 2: 142쪽에서 고건 총리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왠지 서운하고 미운 총리였는데, ,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해야 하나. 왠지 울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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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도 꿈에 나와요?”

 

나영이 깜짝 놀라 남자에게 물었다.

 

꿈이라니?”

 

남자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는 분이야?”

 

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영에게 물었다.

 

아니. 근데, 이 아저씨, 경포대에서 본 그 분 같은데?”

 

나영이 아저씨 맞죠?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친구는 기억 못하나 보네. 경포대에서 봤잖아.”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경포대가, 나 군대 휴가 나왔을 때 간 거잖아. 지금은 재수할 땐데.”

 

현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꿈이잖아. 뭔들 불가능해. 이 아저씨가 몇 년 앞서서 여기 있는 설정인가보지.”

 

나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꿈 아니라니까.”

 

남자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꿈 맞아요.”

 

나영이 까르르 웃으면서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안 그래도 아저씨 만나면 따지려고 했어요. 왜 불쌍한 애들한테 3만원이나 받아 가신 거예요?”

유원지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 하고.”

그거 때문에 우리, 집에 못 올 뻔 했단 말이에요.”

깎아달랄 줄 알았지.”

, 처음부터 바가지를 씌우지 말았어야죠.”

 

마흔 살(정확히는 마흔다섯 살) 나영은 스무 살 나영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말들을 남자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2만원이라도 돌려줘요. 안 되면 만원이라도 돌려줘요.”

저런, 지금은 돈이 없는데.”

말도 안 돼.”

아니, 정말 돈이 없다니까. 대신 지금 두 사람의 운명을 점쳐주는 건 어떨까? 이번에는 공짜로.”

, 사기꾼 아저씨가 무슨 점을 본다고 그래요. 그리고, 사실 점 같은 거 믿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점이 맞는다고 해도,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고.”

 

나영은 남자를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게다가, 꿈에서 보는 점이 무슨 소용 있다고. 꿈이니까, 아저씨가 준 돈으로 가서 맛있는 저녁이나 실컷 먹을래요.”

허허, 꿈이 아니라니까.”

허허, 꿈 맞다니까요.”

허허, 꿈은 아니라니까. 하기사 꿈이면 어떻고 꿈이 아니면 어떻겠어? 장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잖아. 이게 꿈인지, 25년 살았던 그 인생이 꿈인지, 누가 알겠어.”

맞아요. 이게 꿈인지, 그게 꿈인지 무슨 상관이에요. 전 당장 맛난 저녁을 먹고 싶어요.”

하하. 이 아가씨, 경포대에서 봤던 그 얌전한 아가씨는, 분명히 아니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이게 꿈이든, 꿈이 아니든, 이 세상에서 나가지 못하면, 그게 또 두 사람 현실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었다가 이 세상을 헤쳐 가는 데 꼭 필요한 자양분으로 삼으라니까. 어차피 내 주머니에서는 돈 나올 쾌가 없으니, 점이라도 보고 가면 그게 이득이야. , 두 사람한테 해 줄 말도 있다니까.”

 

나영은 남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20년도 전에 보았던 사람이 꿈에까지 나왔다는 건 정말로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영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 한 번 해보세요.”

 

나영의 말에 남자는 씩 웃으며 앞에 있는 붓펜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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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읽는 수학 - 수학으로 삶을 활기 있게
크리스티안 헤세 지음, 고은주 옮김 / 북카라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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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나는 중요한 만남인데도 약속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집을 나섰다. 버스를 아주 빨리만 탈 수 있다면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다. 아무리 늦어도 약속 시간에서 5분을 넘기지 않고 갈 수 있다. , 그러려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 정류장은 차고지와 첫 번째 정류장이 집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다.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차고지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앉아갈 확률이 높으니까.

 

차고지는 큰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기 다른 버스가 나온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오른쪽에서 A, 왼쪽에서 B번과 C번이 나온다. 평소에 나는 A번을 타는 사람이라, 오른쪽 차고지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 A번이 출발했다. 나는 오른쪽 차고지까지 나는 거의 도착했지만, 다시 방향을 바꿔서 부지런히 왼쪽 차고지로 건너갔다. 한참을 서 있었는데, B번도 C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버스를 타도 약속 시간에 늦을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이런, 오른쪽 차고지에서 또다시 A번이 나온다. 마침 교통신호가 바뀌었으니, 후다닥 뛰어가서 탈까 싶었지만, 잠시 망설이고 교통신호는 다시 차량 통행 신호로 바뀌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A번 버스는 한참을 있다가 출발하고, A번 버스가 가고 3분쯤 지났을 때 B번 버스가 나와 그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버스를 기다릴 때면 늘 겪는 일이다. 한참 기다리다 다른 차를 타면 기다리던 차가 곧바로 오고, 다른 차는 내가 생각했던 노선과 달라서 결국 내려서 기다리는 차를 또 기다려 타야 하는 일도 많고.

 

혹시, 내 머릿속이 확률에 최적화되어 있다면 버스 때문에 겪는 난감한 상황을 조금쯤은 피할 수 있을까? <카페에서 읽는 수학>을 읽다보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추론하는 것마다, 계산하는 것마다 틀리는지, 수학은 진짜 난감하다.

 

수학자는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 물론 수학을 하는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진짜 도통 이상한 사람들인 거 같다. 이 사람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수학이 싫어했던 나 같은 사람은 도통 모르겠다.

 

<카페에서 읽는 수학>의 저자 크리스티안 헤세는 상당히 자부심 강하고 웃기는 사람인 거 같다. 프로필부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자란다. 한국은 보통 프로필을 저자가 쓴다고 알고 있는데, 독일도 그렇다면! , 그 자부심, 인정한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각각의 글들은 짧고 수학 공식은 거의 없기 때문에 하나씩 읽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몇 분 안에 읽을 수 있어서 잠들기 전이나 주말 아침 침대에서, 아니면 그냥 이따금 짬이 날 때 읽을거리고 딱 제격이다.”(6~7)라고 했다.

 

그거, 완전 뻥이다. 짧다. 그건 맞다. 책에 나온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었지만, 검은 것은 글씨이고 흰 것은 종이로다를 계속 시전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라니. 아아, 빚 놀이의 허무함, 내기의 공평함, 아이가 물어봤을 때, , 몰라,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제곱근의 비밀을 상세히 풀어주고 있는데도 그렇게 읽는 것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한 독서였다. <카페에서 읽는 수학>은 정신 차리고 공책에 적어보고 풀어도 보면서 읽어나가야 하는 책이다. 저자는 카페에서 읽으라고 했지만(나도 카페에서 읽었지만) 고등학교 수학 정도는 머리에 들어 있어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유머는 정말 곳곳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 유머는 수학의 풀이와 숫자에 가려 마음껏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아니, 일수도 있다). 지금은 말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고등학교 1학년 수학책부터 차근차근 다시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꼭 해봐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 서평이니, 이 책에게는 별을 몇 개나 줄까? 내 머리를 아프게 했고, 사실 여러 번 읽어봐야 이해가 될 거 같으니, 괘씸해서 4개를 줄까 한다. 그게 내 마음이니까. 하지만 내 머리가 못 쫓아갔다고 나쁜 책은 아니니까. 저자의 재치와 책의 가치를 생각해서 결국 별 다섯 개를 줄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하지만, 내 한계를 늘 이렇게 콕 짚어주는 책은 슬프면서도 가슴이 뛴다. <카페에서 읽는 수학>이여. 아직은 기다려라. 곧 돌아오마. I'll be back! Coming Soon. , 뭐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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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극장 앞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몇 주 전에(그러니까 현실에서) 잠깐 차를 타고 지나간 서울극장 앞은 20여 년 전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주 갔던 곳이라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새롭게 바뀐 거리 앞에서 나영은 지난 모습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기억이란 게 참 허무하구나, 하고 웃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이렇게 생생하다니.

 

기왕 영화를 보려고 했으면 이때 안 본 걸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파 앤드 어웨이라니, 우리도 참 대책 없다.”

 

나영은 극장 입구에서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매표소 앞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 재미있잖아?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고.”

 

현수가 으레 그 어때, 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파 앤드 어웨이는 볼 때마다 재미있기는 하지. 톰 크루즈도, 니콜 키드먼도 진짜 예쁘고. 이때는 두 사람이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계속 알콩 달콩 살 거 같았는데, 부부가 참 예쁘게 오래 사는 게 쉽지 않나봐. 톰 크루즈랑 니콜 키드먼도 헤어지고, 킴 베이싱어랑 알렉 볼드윈도 헤어지고, 브래드 피트랑 제니퍼 애니스톤도 헤어지고, 내가 예뻐하던 부부는 다 헤어졌어. , 내가 예뻐한다는 걸 그 사람들은 몰랐을 테지만. 와이드와이드 샷, 찍을 때는 정말 부부라서 저런 장면도 찍을 수 있나보다, 했는데, 그때도 막 헤어지려고 하던 참이라며. 연예인 부부란 참.”

그거, 아이즈 와이드 샷, 아니야? 자긴 진짜 제목 못 외우네.”

 

현수가 앞을 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하는 나영이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부딪치려고 하자, 나영의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늘 같은 행동을 하는 현수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영은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 늘 나를 이렇게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거였다.

 

어머, 부딪칠 뻔 했네.”

 

나영은 멋쩍게 한 마디 하고, 방금 부딪칠 뻔 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남자였다. 나영은 저 남자도 지금은 진짜 늙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 영화, 서울극장에서 보는 거잖아. 우리, 사실은 이거 녹색극장에서 봤는데.”

 

나영이 말했다. 나영과 현수는 영화 아이즈 와일드 샷20여 년 전에 신촌에 있는 녹색극장에서 봤다. 두 사람이 신촌 지하철역을 나와 극장으로 가려고 할 때,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웬만해서는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밖을 내다봤다. 이미 옷은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 버렸는데, 어느새 비는 강도가 훨씬 약해져 있었다. 이미 표를 구입한 영화라, 두 사람은 완전히 젖은 옷을 입고 영화를 봤고, 젖어 있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봐야 할 뒷사람에게 미안해하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영화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감기 걸렸을 수도 있고, 사실 뒷사람한테 완전 민폐잖아. 진짜 우리 생각이 없었네.”

 

나영이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어려서 그렇지 뭐.”

 

현수가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20여 년 만에(그래, 정확히는 25년 만이다. 나이를 정확하게 인지해아 하는 슬픔이라니) 큰 영화관에서 보는 톰 크루즈는 며칠 전에 본 미이라에 나오는 후덕한 아저씨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먼 젊은 청년이었고, 여전히 아름다운, 이제는 연기파 배우가 된 것 같은 니콜 키드먼은 훨씬 더 아름답고 앳된 신인 연기자였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억과는 다른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조금은 신기해하면서, 나영은 본 영화를 또 본다는 핀잔을 준 것도 잊어버리고 영화에 푹 빠져서 보고 나왔다.

 

아직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나영은 현수에게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조금 구경하다가 저녁을 먹자고 했다. 이때는 광화문에 먹을 게 뭐가 있었더라? 종로 3가에서 광화문 가는 길에 맥도널드도 있었던 거 같고 이때 교보문고는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던 것도 같고, 한참 신기해하면서 걷고 있던 나영의 눈에 탑골 공원에서 옆에 서 있는 천막이 보였다.

 

, 사주팔자! 이 근처에 이런 것도 있었나 보네.”

그런가?”

 

나영의 말에 현수도 천막을 흘긋 쳐다봤다.

 

우리, 사주팔자는 경포대에서 한 번 본 게 다잖아. 그거, 5000원 정도만 주면 되는데, 우리 완전히 속아가지고 3만원 주고 왔잖아. 진짜, 애들 어리버리하다고 완전 사기나 치고. 진짜 못 됐지 않냐? 그때 그 아저씨, 자기는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나한테 은밀하게 할 얘기 있다고 했잖아. 그게 나는 60살 정도까지만 산다고, 인중에 금 있는 거 없애야 한다고 했잖아. 결혼하고 애 낳으니까, 살 쪄가지고 인중선도 사라지더만. 진짜 우리 바보였어.”

 

나영은 천막을 연신 쳐다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사주팔자 보고 싶어? 들어가서 볼까?”

 

현수가 천막을 가리키면서 고갯짓을 했다.

 

아니, 돈 아까워. 분명히 또 책 보면서 쉰소리 할 걸. 3만원쯤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때 경포대에서 그거 쓰는 바람에 우리, 집에 올 차비 말고는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

, 어때. 꿈인데. 들어가 보자.”

아이 참, 아무리 꿈이래도, 할 건 다 하잖아. 더구나, 우리 지금 2만 원 정도 있는 거 아니야?”

깎아달라고 하면 돼지. 보통 5000원 한다며. 그것만 주고 나오지 뭐.”

그게 뭐야. 자기야, , , 진짜.”

 

나영은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손을 잡아끄는 현수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50대 남자가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남자는 고개를 들고 나영과 현수를 쳐다봤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나영은 !” 하는 소리를 냈고, 남자는 나영을 보면서 씩,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둘 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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