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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펜은 왜 집어 드는 거예요? 경포대에서 우리 사주 말했는데, 잊어버린 거예요?”

 

마흔 살 나영은 점보는 남자에게 농을 걸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현수가 아내에게(지금은 아내가 아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꿈인데, 알지 않을까? 아닌가. 아무튼, 이 사람 나이는…….”

아니, 아니, 생년월일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그냥 폼으로 집은 거야. 손이 어색해서.”

 

남자는 씩 웃으면서 붓펜을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는데, 조금 그럴 듯해 보여야지.”

, 그게 뭐예요.”

경건해야 하거든. 나는 몰라도, 두 사람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나영의 핀잔에 남자는 정색을 하면서 붓펜을 돌리던 손길을 멈추더니, , 소리를 내면서 붓펜을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여러 어린 애인들한테 사기를 친 게 다 업으로 쌓여 버렸으니, 이렇게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그 업을 풀어야해. 아무튼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일단 그건 접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해.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거 입 아파.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꿈이 아니야.”

진짜로 꿈이 아니라고요?”

 

나영이 말했다.

 

그렇지. 이건 현실이야. 왜 이런 현실이 생겼는지는 나도 몰라.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장난을 친 걸 수도 있고, 시공간이 조금 흐트러져서 갑자기 우리 세 사람이 여기, 이 시간과 공간에 있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저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의 의식이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걸 수도 있어.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알겠어. 분명한 건 한 가지뿐이야. 나는 어제 두 사람이 여기에 올 거라는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들은 말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공책에 떡 하니 적혀 있더라는 말이지. 나는 앞으로 3년 뒤에나 두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공책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이 누군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말을 두 사람에게 해주어야 하는지 딱 알겠더란 말이지. 사실 오늘 몸살기가 있어서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두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

이 사람, 오늘도 사기 치려는 거 같은데?”

 

현수가 나영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허어, 아니라니까. 지금 여기서 사기를 치면 내 점 인생은 끝이야. 할 말이 많으니까, 끼어들지 말고 일단 들어나 보라니까.”

, 해보세요.”

 

나영은 남자를 보면서 어서 시작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들어올렸다.

 

아마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지금 삶을 아주 절실하게 수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두 사람은 어떤 힘이나 의지, 아니면 시공간의 비틀림에 이끌려서 여기에 와 있는 거지만, 뜬금없이 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누군가 분명히 간절하게 바랐던 거야. 그 바람 때문에 약간의 기적이 덧붙여진 걸 테지. 둘 다 20대 모습으로 이곳에 와 있잖아? 그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거야. , 양자역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아주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아주 일어나기 힘든 확률로 시간이 거슬러 온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가끔 그런 부부들이 있어.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기로 이끌려오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게 되는 순간으로 돌아오는 부부들이 있다는 거지.

 

물론 한 번 뒤틀린 시공간이라 두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어. 아무튼, 두 사람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야. 이 시간, 이 공간에 빠진 사람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 한 달 뒤에 두 사람이 동시에 원했을 때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면 딱 1분 동안 기억이 남아 있는 시간이 있을 거야. 그때 삶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을 최선을 다해 하면 돼. 1분이 지나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테니까.”

그게 무슨?”

 

현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저씨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어요? 완전히 믿어 버렸는데, 꿈에서 깨어나서 완전 허무해지면요.”

 

나영이 물었다.

 

, 원래 삶이란 게 일장춘몽이지. 이게 꿈이라고 해도 꿈속에 현실은 그렇게 정해져 버린 거야. 한 달 뒤에 꿈에서 깨어나느냐 한 달 뒤에 꿈속에 남느냐. 꿈이든, 꿈이 아니든, 이건 두 사람에게 놓여 있는 지금의 현실인 거지. ,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가 봐. 몸이 으슬으슬해서 빨리 집에 가서 누워야겠어.”

우리가 더 들을 이야기는 없어요?”

 

나영이 또 물었다.

 

없어. 한 달 뒤에 뭐든지 결정하라, 이게 결론이야. 빨리 나가. 자고 싶으니까.”

 

남자는 현수와 나영에게 빨리 나가라며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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