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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물이 이렇게 많이 차 있으면 문제가 많겠는데? 턱이 낮은 곳 지하는 어떻게 해? 지하에도 상가가 많을 텐데.”

 

나영은 발밑까지 차오르려고 하는 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당장 지하철도 문제가 많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야?”

 

현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도시 한 가운데가 이 정도라면, 분명히 사단이 난 걸 텐데…….”

 

나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앞만 보았다.

 

일단 다시 들어가서 식당 전화를 좀 빌릴까? 집에 문제없는지 알아봐야지.”

 

현수가 다시 지하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게. 지금은 우리, 휴대폰도 없지. 우리 집은 그래도 조금 높은 곳에 있으니까 다행인데, 자기 집은 지대가 낮잖아. 어떻게 하지? 지금 시간이면 어머니 혼자 계실 텐데. 빨리 전화 해 봐.”

자기 집은?”

나는, 집 전화번호를 모르겠어.”

이런.”

 

현수의 집 전화번호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같았으니까 기억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25년 동안 네 번이나 이사를 다닌 나영은 인천 집 전화번호를 도무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일단,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 봐. 그리고 사람들한테 말해서 빨리 나오라고 하고. 여기 넘치기 시작하면 지하에 있는 사람들 다 문제가 될 거야. 일단 옥상이라도 올라가 있어야지. 이거, 도로로 나가서 어딘가로 갈 수는 없을 거 같아.”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내려갔다 올게.”

 

현수는 다급하게 말하고 재빨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나영은 혹시라도 물이 건물로 흘러 들어와 지하가 잠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현수가 내려간 지하를 쳐다봤다가 물이 넘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면 다시 건물 밖에서 찰랑이는 물을 쳐다보면서 현수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현수가 뛰어서 올라왔다.

 

엄마 집은 아무렇지도 않대. 여기만 그런가봐.”

사람들은?”

나오라고 했어. 다들 나온다고 했는데, 챙길 게 있나봐.”

물 넘치기 전에 나와야 할 텐데.”

 

나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바깥을 내다봤다.

 

물이 조금 줄어든 거 같지 않아? 살짝 내려 간 거 같은데?”

그러네.”

 

현수와 나영은 건물 현관 앞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렇지? 물이 조금 빠진 거 같지?”

그런 거 같아. 아주 빨리 빠지고 있는 거 같은데. , 층계도 하나 보인다.”

정말. 어디가 넘쳤다가 빠지고 있나봐.”

이렇게 많은 물이 넘쳤다가 이렇게 빨리 빠지는 것도 문제 아니야?”

 

현수는 건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뭐 하려고 그래?”

물이 어느 정도 깊은가 한 번 보려고.”

아까, 층계 서너 개 올라왔잖아. 이렇게 뿌연데, 괜히 잘못 빠졌다가 큰일 나려고. 일단 기다려.”

 

물에 발을 담가보려는 현수를 말리던 나영은 문득 끔찍한 생각이 들어 얼굴이 파래졌다.

 

혹시, 물이 빠진 뒤에 시체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 한강이 완전히 넘쳐버린 거 같은데. 예전에 태국에 해일이 덮쳤을 때…….”

에이, 설마.”

 

그렇게 말은 했지만 현수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만 같았다.

 

빨리 들어와.”

 

불안했던 나영은 현수를 잡아끌었고,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나영에게 잡아 끌어당겨진 현수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어!”

 

아차 하는 순간에 현수의 발은 건물 밖 물 표면에 닿았고, 그 순간, 물은 빠른 속도로 먼 소실점을 향해 빠르게 응축하기 시작했다.

 

자기야, 저거 뭐야?”

 

나영은 팔을 바깥쪽으로 쭉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러게, 저게 뭐야.”

 

현수도 놀라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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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 먹는다더니, 잘 먹네.”

, 원래 먹는 거야, 앞에 있으면 그냥 먹잖아. 이러니까 살찌지.”

 

투덜대는 나영을 보면서 현수는 그래, 내가 잘 알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그런 현수가 얄미웠다. 항상 저렇게 동조하지 않아도 될 말에 동조하는 거, 정말 얄미웠다.

 

그래도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

 

나영은 접시에 남아 있는 밥을 흘긋 보고는 레스토랑을 둘러보았다. 25년이 지났는데도 레스토랑의 풍경은 낯설지가 않았다. 종로에 오면 꼭 들르던 곳. 몇 해 전에, 엄마들 모임에 가기 전에 이곳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찾아와 봤다가 이미 건물도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로 아쉬워했던 곳인데. 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 식당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나영은 좋았다. 결국 몇 년 뒤에는 사라질 곳이라도,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을 주방장을 찾아가서 힘내시라고, 행복하시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나영은 혼자 씩 웃었다.

 

, 배가 부르니까, 이제 좀 기분이 좋아졌어?”

 

현수가 나영의 속도 모르고 한 마디 했다.

 

아니거든.”

아무튼, 집에 가서 절대로 안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지?”

아니거든. 절대로 안 돌아갈 거야.”

 

단호한 나영의 말에 현수는 혀를 찼다.

 

도대체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어디 있다고 그래? 어차피 우리가 이 때로 돌아온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억을 잃어버린다며. 지금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또다시 25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니, 기억을 간직하고 산데도 힘들고 지루한 시간일 거 같은데, 어차피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서든 비슷한 삶을 살아갈 텐데, 굳이 뭘 또 그걸 반복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는 찾아낼 거야. 일단 자기가 주고 간 편지를 찢어서 절대로 내용을 읽지 않고, 집이 아니라 독서실로 가서 공부할 거야. 5분 내내 왜 어렸을 때는 연애를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길게 길게 써 놓고, 내가 절대로 집에 못하게 해 달라고 진아한테 부탁할 거야.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결국은 미래는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래, 그리고 며칠 뒤에 내가 전화해서 다시 만나고, 뭐 그런 거겠지.”

 

현수는 연어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집어 먹고 물을 마시면서 입을 헹궜다. 원래 이 식당에 오면 돈까스를 시켜 먹던 현수였지만, 어차피 3주 후면 미래로 돌아갈 거라며 용돈을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연어 스테이크를 시켜먹었다. 5000원은 나영이 냈고.

 

일단, 다시 미래로 가건 다시 과거로 가건, 돌아가려면 3주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는 속 편하게 놀자. 어차피 이 시간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잖아.”

아니, 절대로 자기는 안 만날 거야.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작전을 짤 거야.”

그래, 그래. 내가 전화하면 일단 나오기는 하고.”

안 나온다니까.”

 

나영의 말에 현수는 씩, 웃으며 또, 그래 알았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과 머리 밖에 없었던 현수의 저 자신감을 좋아했었지.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신감으로 나영은 자신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듯이 행동했던 어린 현수를 어린 나영은 사랑했었다. 물론, 조금도 변하지 않은 나이든 현수도 나이든 나영은 사랑하지만.

 

하지만 정말로 40대의 일상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몸으로 저녁밥을 차려야 할 때면 너무나도 화가 나고, 너무나 피곤해서 저녁밥을 사먹을 때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삶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 없이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상쾌하게 샤워하고 그냥 자고 싶을 만큼 자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언제 잠들든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현수의 삶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일단, 오늘은 가서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고민해 보자. 3주 이상 고민하다보면 뭔가 결론이 나겠지. 우리, 내일은 강촌 갈까? 거기,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 번 가보고 싶네. 기차 타고 가자. 우와, 우리 경춘선을 탈 수 있는 거야. 그게 없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식당에서 나오면서 현수가 말했다.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만난다니까. 난 혼자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해.”

에이, 그러지 말고.”

 

현수는 나영의 어깨를 잡으면서 살짝 흔들었다.

 

아니, 절대로 싫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장난처럼 웃으며 나영을 끌어당기는 현수를 밀어내면서 나영은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와 건물 현관을 빠져나가려던 나영은 현관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자기야?”

?”

이 무렵에 종로가 물에 잠긴 적이 있나?”

? 없을 걸?”

그지? 도로가 이렇게 물에 잠긴 건 몇 년 뒤에 강남에서만 있었던 일 아니야? 저거 봐봐. 저게 뭐야?”

? 뭐가?”

 

뒤에서 따라오던 현수가 나영의 앞으로 나오다가 흠칫 멈춰 섰다.

 

이런, 이게 뭐야.”

 

식당 건물 앞 도로는 완전히 물에 잠겨 있었고, 도로를 채운 물은 거의 현수의 발을 적실 정도로 건물의 층계 위까지 올라와 언제라도 건물 안으로 넘쳐들 기세였다.

 

비가 온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앞 건물도 안 보여.”

 

나영은 말했고, 현수와 나영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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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수는 저녁을 먹지 않고 집에 가겠다는 나영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종로 3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배 안 고프다니까.”

 

쇼파형 의자에 앉으면서 나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는 배고프다며.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는데.”

 

현수가 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물었다.

 

갑자기 배가 안 고파졌어.”

갑자기 왜? 게다가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벌써 들어간다고?”

그럴 수도 있지.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단 말이야.”

,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아니라니까.”

 

나영은 현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할 때도, 22년 결혼 생활을 할 때 나영은 현수와 있는 시간을 한 번도 지루해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할 때는 시간이 나면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서 돈 떨어지고 버스 떨어질 때가 붙어 있기를 바라던 나영이었다. 그런 나영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집에 간다고 했으니, 나영을 너무나도 잘 아는 현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분명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집에 가서 생각을 했더라도 나영은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물론 생각을 정리한 뒤에 말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지.

 

, 무슨 일인데?”

 

현수가 말해보라는 듯이 나영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음…….”

 

나영은 길게 콧방귀를 꼈다.

 

? 말해 보라니까?”

 

다시 한 번 재촉하는 현수를 흘끔 쳐다본 나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어디를?”

 

나영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현수가 되물었다. 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실로?”

 

현수가 또 물었다.

 

현실이 아니라, 미래겠지.”

 

나영이 대답했다.

 

꿈인데, 현실이건 미래건, 무슨 상관이 있어?”

 

현수가 또 물었다.

 

꿈이건, 현실이건, 미래건, 난 상관이 있어.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꿈이면, 꿈인 채로 새롭게 살아볼 거야. 현실이면, 당연히 새롭게 살아볼 거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돌아가기 싫다고.”

 

나영이 고개를 돌려서 현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돌아가면, 아이들은 어쩌고?”

 

현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차피 우리가 안 돌아가면 아이들도 없어.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돼.”

 

나영이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문제 될 건 없는 거 같아. 그냥, 나는 지금 살아가는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이번에는 나로서, 나 혼자서 살아볼 거야.”

그게 말이 돼? 어차피 한 달 뒤면 기억을 잊는다며? 그럼 또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텐데, 그거 지겨워서 또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리고 20대가, 30대가, 자긴 좋아?”

 

현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좋지 않아.”

 

나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왜 남겠다는 거야?”

“20대라는 시기가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는 없는 시기란 거 잘 알아. 마음만 앞서고 제약은 많고. 어른들은 답답하고, 가진 건 하나도 없고. 게다가 우리 20대는 IMF도 있을 테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나는 꼴랑 하나 가지고 있었던 중위권 대학 졸업장조차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아. 근데,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는 살고 싶지는 않아.”

이런 식이 어떤 식인데?”

 

현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물었다.

 

매일 같이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도대체 왜 이유도 모른 채로 그 많은 전을…….”

 

나영은 전은 남편도 같이 부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명절, 제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40대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산더미처럼 차고 넘쳤으니까.

 

아무튼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그 순간, 식탁으로 다가온 레스토랑 종업원에게 저는 돈까스 주세요.”라고 말했고, 현수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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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붓펜은 왜 집어 드는 거예요? 경포대에서 우리 사주 말했는데, 잊어버린 거예요?”

 

마흔 살 나영은 점보는 남자에게 농을 걸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현수가 아내에게(지금은 아내가 아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꿈인데, 알지 않을까? 아닌가. 아무튼, 이 사람 나이는…….”

아니, 아니, 생년월일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그냥 폼으로 집은 거야. 손이 어색해서.”

 

남자는 씩 웃으면서 붓펜을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는데, 조금 그럴 듯해 보여야지.”

, 그게 뭐예요.”

경건해야 하거든. 나는 몰라도, 두 사람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나영의 핀잔에 남자는 정색을 하면서 붓펜을 돌리던 손길을 멈추더니, , 소리를 내면서 붓펜을 다시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야. 여러 어린 애인들한테 사기를 친 게 다 업으로 쌓여 버렸으니, 이렇게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그 업을 풀어야해. 아무튼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일단 그건 접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해.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거 입 아파.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꿈이 아니야.”

진짜로 꿈이 아니라고요?”

 

나영이 말했다.

 

그렇지. 이건 현실이야. 왜 이런 현실이 생겼는지는 나도 몰라.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장난을 친 걸 수도 있고, 시공간이 조금 흐트러져서 갑자기 우리 세 사람이 여기, 이 시간과 공간에 있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저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의 의식이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걸 수도 있어.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누가 알겠어. 분명한 건 한 가지뿐이야. 나는 어제 두 사람이 여기에 올 거라는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들은 말이,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공책에 떡 하니 적혀 있더라는 말이지. 나는 앞으로 3년 뒤에나 두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공책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이 누군지,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말을 두 사람에게 해주어야 하는지 딱 알겠더란 말이지. 사실 오늘 몸살기가 있어서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두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거라고.”

이 사람, 오늘도 사기 치려는 거 같은데?”

 

현수가 나영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허어, 아니라니까. 지금 여기서 사기를 치면 내 점 인생은 끝이야. 할 말이 많으니까, 끼어들지 말고 일단 들어나 보라니까.”

, 해보세요.”

 

나영은 남자를 보면서 어서 시작하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들어올렸다.

 

아마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지금 삶을 아주 절실하게 수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

 

두 사람은 어떤 힘이나 의지, 아니면 시공간의 비틀림에 이끌려서 여기에 와 있는 거지만, 뜬금없이 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누군가 분명히 간절하게 바랐던 거야. 그 바람 때문에 약간의 기적이 덧붙여진 걸 테지. 둘 다 20대 모습으로 이곳에 와 있잖아? 그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거야. , 양자역학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아주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아주 일어나기 힘든 확률로 시간이 거슬러 온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가끔 그런 부부들이 있어.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여기로 이끌려오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게 되는 순간으로 돌아오는 부부들이 있다는 거지.

 

물론 한 번 뒤틀린 시공간이라 두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어. 아무튼, 두 사람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야. 이 시간, 이 공간에 빠진 사람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 한 달 뒤에 두 사람이 동시에 원했을 때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거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돌아가면 딱 1분 동안 기억이 남아 있는 시간이 있을 거야. 그때 삶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을 최선을 다해 하면 돼. 1분이 지나면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테니까.”

그게 무슨?”

 

현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아저씨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어요? 완전히 믿어 버렸는데, 꿈에서 깨어나서 완전 허무해지면요.”

 

나영이 물었다.

 

, 원래 삶이란 게 일장춘몽이지. 이게 꿈이라고 해도 꿈속에 현실은 그렇게 정해져 버린 거야. 한 달 뒤에 꿈에서 깨어나느냐 한 달 뒤에 꿈속에 남느냐. 꿈이든, 꿈이 아니든, 이건 두 사람에게 놓여 있는 지금의 현실인 거지. ,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가 봐. 몸이 으슬으슬해서 빨리 집에 가서 누워야겠어.”

우리가 더 들을 이야기는 없어요?”

 

나영이 또 물었다.

 

없어. 한 달 뒤에 뭐든지 결정하라, 이게 결론이야. 빨리 나가. 자고 싶으니까.”

 

남자는 현수와 나영에게 빨리 나가라며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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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도 꿈에 나와요?”

 

나영이 깜짝 놀라 남자에게 물었다.

 

꿈이라니?”

 

남자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는 분이야?”

 

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영에게 물었다.

 

아니. 근데, 이 아저씨, 경포대에서 본 그 분 같은데?”

 

나영이 아저씨 맞죠?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친구는 기억 못하나 보네. 경포대에서 봤잖아.”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경포대가, 나 군대 휴가 나왔을 때 간 거잖아. 지금은 재수할 땐데.”

 

현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꿈이잖아. 뭔들 불가능해. 이 아저씨가 몇 년 앞서서 여기 있는 설정인가보지.”

 

나영이 웃으면서 말했다.

 

꿈 아니라니까.”

 

남자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꿈 맞아요.”

 

나영이 까르르 웃으면서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안 그래도 아저씨 만나면 따지려고 했어요. 왜 불쌍한 애들한테 3만원이나 받아 가신 거예요?”

유원지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 하고.”

그거 때문에 우리, 집에 못 올 뻔 했단 말이에요.”

깎아달랄 줄 알았지.”

, 처음부터 바가지를 씌우지 말았어야죠.”

 

마흔 살(정확히는 마흔다섯 살) 나영은 스무 살 나영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말들을 남자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2만원이라도 돌려줘요. 안 되면 만원이라도 돌려줘요.”

저런, 지금은 돈이 없는데.”

말도 안 돼.”

아니, 정말 돈이 없다니까. 대신 지금 두 사람의 운명을 점쳐주는 건 어떨까? 이번에는 공짜로.”

, 사기꾼 아저씨가 무슨 점을 본다고 그래요. 그리고, 사실 점 같은 거 믿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점이 맞는다고 해도,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고.”

 

나영은 남자를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게다가, 꿈에서 보는 점이 무슨 소용 있다고. 꿈이니까, 아저씨가 준 돈으로 가서 맛있는 저녁이나 실컷 먹을래요.”

허허, 꿈이 아니라니까.”

허허, 꿈 맞다니까요.”

허허, 꿈은 아니라니까. 하기사 꿈이면 어떻고 꿈이 아니면 어떻겠어? 장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잖아. 이게 꿈인지, 25년 살았던 그 인생이 꿈인지, 누가 알겠어.”

맞아요. 이게 꿈인지, 그게 꿈인지 무슨 상관이에요. 전 당장 맛난 저녁을 먹고 싶어요.”

하하. 이 아가씨, 경포대에서 봤던 그 얌전한 아가씨는, 분명히 아니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이게 꿈이든, 꿈이 아니든, 이 세상에서 나가지 못하면, 그게 또 두 사람 현실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러니 이 아저씨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었다가 이 세상을 헤쳐 가는 데 꼭 필요한 자양분으로 삼으라니까. 어차피 내 주머니에서는 돈 나올 쾌가 없으니, 점이라도 보고 가면 그게 이득이야. , 두 사람한테 해 줄 말도 있다니까.”

 

나영은 남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20년도 전에 보았던 사람이 꿈에까지 나왔다는 건 정말로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영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 한 번 해보세요.”

 

나영의 말에 남자는 씩 웃으며 앞에 있는 붓펜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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