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살해하기 - 당연한 말들 뒤에 숨은 보수주의자의 은밀한 공격
웬디 브라운 지음, 배충효.방진이 옮김 / 내인생의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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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읽고

 

지난 몇 년 동안 소위 한국의 지배층이라고 하는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민낯을 보면서 어떤 정치인의 말처럼 참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아끼고 보호하는 정책이 아니라 효율적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승자독식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우리 서민들은 안일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참아야 했다.

 

하지만 참는 와중에도 궁금하기는 했다. 소위 엘리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저렇게 염치없음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가? 착취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으며 배려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인적자원으로만 보는 통치 합리성이 전 세계에 만연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사람의 가치가 사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낼 수 있는 효율성, 그 사람이 창출할 수 있는 개인 기업으로서의 실적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 사회를 흔히 신자유주의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라고 부르나보다.

 

그런데 도대체, 신자유주의가 무엇인가?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개념적으로 방황하게 만들고 (민주주의의) 핵심을 비워낼 작업을 시작할 새로운 형태의 통치 이성”(7)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푸코가 이야기한 생명관리정치를 비평하고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저자의 말처럼 신자유주의가 파괴하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아는 것이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에 주시하면서 민주주의가 파괴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을 찾는 첫 걸음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 누구도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파악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 -현대 사회와 그 뒤의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방향성이 달라지는 바람에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신자유주의를 규정한 사람은 푸코였다. 그러니 신자유주의에 관한 고찰은 푸코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웬디 브라운은 푸코의 고찰은 신자유주의의 탈민주주의 효과를 이론화하는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41)고 했다. 하지만 푸코는 직접 쓴 저작도 해설서도 많이 난해한 듯하다. 하지만 반갑기도 하다. 푸코는 푸코니까(사실은 미셸 푸코보다 에코의 <푸코의 추>가 훨씬 더 좋지만). 모르는 걸 알아야 알아갈 수도 있으니까.

 

기업의 투자자이자 기업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가는 대학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실제로 리버럴 아츠 교육이 무너져 가는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만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보다는 인문학 교육이 수십 년 동안 쌓아 왔던 전문용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철옹성 같은 jargon과 난해한 문체, 의미를 알 수 없는 괜한 어려운 표현법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을 만들어, 그 학문의 실용성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했다. 서평을 쓰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도 내가 <민주주의 살해하기>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 많은 문제가 벌어지는 원인이라고 믿어지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뒤에 패전국인 독일이 경제를 재건하면서 만들어 냈다는 신자유주의를 누구 한 사람의 도입으로, 어떤 한 정권의 의도로 한국에 들여왔다고는 믿지 않지만 흔히 말하기를, 참여정부 시기부터(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이번 정권에서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알고 싶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그래서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거듭해서 읽고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은 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혼란스럽게 뒤섞여 버렸지만,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벌써 두 번 읽었는데 잘 모르겠어서 좌절을 하기는 한다.)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싶은 이유는 또 있다. 좀 더 쉽게 풀어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학자란, 저자란, 나 같은 일반 사람이 느끼는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던 막연한 불안감, 노동하지 않고 버는 돈에 대한 거부감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때문이다. 웬디 브라운은 푸코부터 시작해 호모에코노미쿠스, 이집트 농부들의 위기, 거버넌스, 벤치마킹, 모범사례 등이 갖는 진정한 함의를 여러 사례와 정의를 세워 가며 설명해 나간다. 저자처럼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고 제대로 서술하는 법을 나도 배우고 싶다.

 

책 간간이 오타가 보이지만 이해를 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경제 관련 내용은 잘 모른다는 것. 학자들이 익숙하게 쓸 정식(정당한 격식이나 의식이라는 뜻인지 격식이나 방식을 일정하게 정한다는 뜻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이나 이재(재산을 잘 관리함??) 같은 개념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한 독서였다.

 

여성이면서도 생활에서 느끼는 페미니즘 문제를 학문으로는 도저히 연결하지 못하는 내가 여성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할 거리를 안겨준 독서였다. 책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도 알게 된 독서였고, 사실은 분석도 파악도 못했다는 걸 고백해야 하는 독서이기는 하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아는 것으로 시작하는 거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고, 내 무지를 아는 것이 내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게 되는 길일 것이다. 드문드문 이해가 되는 책을 언젠가는 하나로 이어서 쭉 이해하고 싶다. ‘나는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들어. 왜냐하면……’, 하고 시작하는 대화에 내용을 채워줄 책이다. <민주주의 살해하기>. 상당히 난감한 마음으로, 시간 당 읽어내는 독서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는 깨인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읽고 또 읽어보련다. 결국 독서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자기 인식을 바꾸는 개인 수양의 과정이 되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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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기술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 지음, 김영선 옮김 / 심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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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기술>을 읽고

 

나에게는 책을 읽을 때는 책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를 계속 생각하고 내용과 제목을 연결해 보려는 습관이 있나보다. <망각의 기술>을 읽는 내내 왜 제목을 망각의 기술이라고 지었을까, 궁금했다. 원제가 <The Art of Forgetting>이니 원출판사와 저자가 완전히 고민을 해서 지은 이름이 맞을 텐데, 한참 고민을 했지만, 망각의 기술이라는 제목으로는 이 책을 도무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을 읽고 두 번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이 책의 제목을 <망각의 기술>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이라고 고쳐 생각한 뒤에야 좀 더 편하게 책 내용이 다가왔다.

 

<망각의 기술>은 기억을 연구하는 뇌과학자가 기억과 망각에 관여하는 뇌 뉴런의 작용을 이야기하고 기억과 망각이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디지털 기기의 이로움과 그 때문에 더욱 더 휴식을 해야 하는 뇌에 관한 이야기 등, 전반적으로 뇌과학 개론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다.

 

솔직히 말해서 재미가 있는 책은 아니다. 간간히 아빠를 구별하는 아기 이야기처럼 나름 유머를 구사한 부분도 나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망각의 기술>은 대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양 강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책의 진정한 가치가 유머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짧은 책이 조밀하게 담고 있는 많은 뇌과학 지식과 저자의 사고는 충분히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망각하지 않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이스쿠이에르두 교수는 기억과 망각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거짓 기억이 집단적 범죄를 저지른 일반 시민들의 기억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는지, 세월호 같은 국가적인 재난은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어째서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지, 이 세상에는 성공한 거짓말쟁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국가 우상화가 어떻게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는지, 독재 정부는 시민을 어떻게 망각시키는지, 기억력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중요한지, 등을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망각의 기술>을 거듭해서 읽는 동안 사람이 망각을 하지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특정한 기억을 해야 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망각을 했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망각의 기술>은 망각해버린 기억에 대처하는 방법을, 망각의 의미를, 기억의 여러 형태를 알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생물학 교과서 같은 내용 때문에 쉽게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읽었고, 두 번을 읽었지만, 곧 세 번째 읽어 기억에 담아두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바로 우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우리다.”

 

우리는 치욕적인 장면을 잊고 싶어 한다. 그 장면이 없는 인생을 꿈꾼다. 그래서 그 장면은 더욱 더 우리를 우리로서 정의한다. 망각을 하고 싶다면, 그만큼 나는 절실하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망각하고 싶은 것은 망각하지 못할 테고, 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되도록 온전한 정신으로 살려면 저자는 많이 읽고 움직이고 좋은 음식을 먹고 현실 세계에서 사회관계를 맺으라고 한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뇌의 뉴런 형성과 여러 신경 물질의 연결에서 찾는 책은, 결국에는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재미있었다. 내용도 길지 않아 조금 어렵더라도 세 번, 네 번 읽으면 결국에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지 않을까. 책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읽을 책 책꽂이에 슬며시 꽂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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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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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을 읽고

 

작가는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자기 인생을 결정한 사건들을, 자기를 이루고 있는 구성성분들을,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을, 한 번은 털고 가야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한다. 보통은 데뷔작에서 자신을 털어내려고 시도한다. 글을 쓰는 초기에 자기를 털어 버리고 자기 이야기가 아닌 글을 쓸 수 있을 때 진짜 작가가 되는 거라고 하는 말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쓴다고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쓸 수 있을 때, 자기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흔들 수 있어야 작가가 되는 것일 테다. 엠마뉘엘 카레르는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지고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표지 뒷날개를 보니 나는 이번에 처음 접한 작가이지만 카레르가 쓴 작품은 한국에서는 적어도 다섯 권이 번역되었고, <러시아 소설> 이전에도 프랑스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작가인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소설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읽는 책이 <러시아 소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카레르의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카레르의 어머니를 억눌렀던 콤플렉스를 작가의 콤플렉스를 염두에 두고 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연대순으로 <러시아 소설>을 가운데 두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전과 쓴 뒤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분명히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음울하고도 한결같은 시나리오에 갇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삶으로 가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르포르타주를 쓰는 것이 좋겠어.”(17)

 

이제는 자기 삶에 갇혀 있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려고 글을 쓰는 작가. 왠지 짠하다. 자신의 음울함을, 자신의 광기를 사라져버린 외할아버지가 주신 유산 때문이라고 믿는 작가, 그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숨기려고만 했던 어머니가 남긴 억압 때문이라고 믿는 작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작가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면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개별을 이야기하면서 인류 전체의 보편적 속성을 담담하게도, 답답하게도, 초조하게도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작가란 정말 작가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50년 동안 러시아 정신 병원에서 갇혀 있어야 했던 헝가리인, 전쟁 전에는 사회의 아웃사이더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어디론가 끌려가 버린 독일군 통역을 맡은 러시아인, 학술원 종신 원장이지만 아버지를 숨겨야 하는 어머니, 풍족한 프랑스 부르주아로 살았지만 사람 한 명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성공한 작가, 아내를 프랑스인이라고 믿는 FSB 간부, 자신의 삶에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의 돌파구로 생각하고 상심해 하는 러시아 여인, 서양의 아이돌을 꿈꾸는 평범한 러시아 소녀, 딸의 죽음조차 소리 내어 원망하고 비난하지 못하는 러시아 노파.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그 누구 하나 자기 삶에 갇힌 작가가 아니고, 우리가 아닌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출구가 있는 작가는 행복한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촬영하러 온 프랑스 기자들에게 우린 여기서 개 같이 살고 있어! 그런 우릴 촬영하러 온 너희들은 정말로 나쁜 놈들이야.”(221)라고 말하는 러시아 노인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코넬니치를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으로 인터넷으로,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런 삶을 보기 때문에 훨씬 더 비참해지고 침울해지고 미쳐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프랑스 기자들은 무엇 때문에 코넬니치에 갔을까? 무엇 때문에 비참한 곳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찍으려고 했을까?

 

그런 무신경 때문에 <러시아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를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냐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냐를 대하는 태도도,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작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337쪽에서 한 여성작가가 작가에게 보낸 여주인공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정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 아내라면 이 단편은 내 삶과 우리의 관계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확신한단다.라는 메일 내용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느낀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단편을 합리화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는 <러시아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자기를 달래고, 무명으로 살다가버린 슬픈 러시아인들을 위로하고, 엄마를 위로하고, 소냐를 완전히 보내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러시아 소설>을 집필하는 거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는 343쪽에서 이 책을 출간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출간했다. 작가는 아마도 그 이유를 <러시아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변명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고,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건, 즐겁게 하건 간에,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소설>에 담은 카레르의 많은 변명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알아보고 싶다. 지금쯤 소냐는 행복해졌기를 바란다. 열정적인 사랑만이 삶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아야도 레프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삶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으니까. “산 채로 죽어가는작가도 다시 살아났기를 바란다. 작가의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아들에게서 치유 받았기를 바란다. 역자의 말처럼 고통을 기록하는 고통스러운 글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강요당해 원혼으로 떠도는 세상의 모든 고통들에 비로소 <목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425) 이 세상 모든 영혼이 목소리를 부여 받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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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 거짓 선동과 모략을 일삼는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에게 보내는 레드카드
마이클 만 & 톰 톨스 지음, 정태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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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읽고

 

요 근래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화끈한 책이었고, 가장 현실적인 책이었으며, 가장 현대적인 책이었다. 분명히 기후 변화 정책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한국의 정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지금 한참 진행되고 있는 청문회를 보고 있는 느낌, 지난 대선을, 앞으로의 대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성을 느꼈다.

 

서평을 쓸 때 책 내용을 쓰지 않고 내 느낌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쓴다는 나름 개똥 원칙을 세워 두었지만, 이 책은 저자들의 목소리가 흥미로워서 그 원칙을 깨기로 했다. 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한국도 미국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수많은 정치인이 기후변화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도 정치도 재해 대책도 시민을 우선하는 정책이 아니라 기업을 우선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기존을 우려를 재확인하고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읽으면서 가장 곱씹어보고 싶고 머리에 넣어 두고 싶었던 점은 과학이란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난한 작업인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법이었다. 믿음과 과학 가운데 내가 보통은 과학을 택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도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나에게 마이클 만과 톰 톨스는 근거의 우월성(preponderance of evidence)’을 외치라고 한다.

 

먼저 여러분이 과학적 체계를 어느 정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사실들이 의심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 측정과 분석과 이해를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들에게 의지하기 바란다. 의견의 불일치가 명백하거나 불확실성이 계속해서 득세하는 상황이라면, 근거의 우월성을 무기로 삼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듯 근거의 우월성!’하고 외치면 된다. 완벽한 근거란 수학의 정리 또는 알코올음료 따위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과학을 향해 완벽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과학이 체계를 갖추는 고유의 과정을 무시하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꼴이다. 과학은 오히려 상당한 수준의 가능성, 근거들 사이의 균형, 여러 갈래의 근거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을 다루는 분야다.”(33)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원자력 에너지를 반대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더 나아가 보편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체 오늘 청문회를 개최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작 진지한 과학적 조사가 필요한 지점은 이 문제(148)라는 글을 읽으면서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자는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민의 여론만을 따라가는 정치는 위험하다는 어느 한국 국회의원을 말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었다(사실은 웃을 문제가 아니라 아주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자의 전반적인 논조는 낙관적이다. 시민이 정부가 정치인들이 기후변화를 막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프란체스코 교황의 노력과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을 많이 언급한다. 나는 그래서 더 우울해져 버렸지만. 책을 쓰는 동안 미국 대통령은 오바마였지만, 지금은 트럼프니까. 212쪽에 나오는 트럼프는 그래서 더 얄밉다.

 


   

 

저자들은 우리는 특수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212)라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한 투쟁이 다음 단계로 원활히 진화하도록 힘을 보태자.”(213)라고 말한다. 이런 모든 주장을 나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로 들었다(이런 오독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겠지만).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의회 차원의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이니만큼”(195) 풀뿌리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나는 정치적인 감성으로 이해했다. 저자들은 선거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사람은 가만두면 안 된다.”(141)라고 했다.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는 나에게 고집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과학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얼버무리지 말자. 지구온난화가 사실이 아니라거나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문제로 입씨름하지 말자. 그저 기후변화 부정론은 사실이 아니므로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고 정중히 말하자. 상대방이 근거를 요구한다면, 이 책을 건네자. IPCC나 국립과학원에서 펴낸 보고서를 일러줘도 좋겠다. 그가 모든 과학이 의문스럽다고 말한다면, 그런 관점은 피해망상으로 가득한 음모론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하고 더 이상 논쟁하지 말자. 대신, 기후 문제의 해결에 이바지할 생각이 있어 보이는 합리적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리자.”(209~210)

 

어떤 근거를 제시해도 내 말만 옳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류노스케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과 함께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가져가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언론인을 꼬집은 부분도 한국 언론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언론은 기후변화 부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여러 잘못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그릇된 균형론이다. 기자들은 언론학개론을 공부하면서 나쁜 버릇이 들었다. 바로 기후변화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들을 접할 때면 주류 관점과 대등한 지위를 주변 관점에 부여하는 버릇이다. ‘양측 모두를 공평하게 다루라!’고 배운 탓인데, 이런 태도는 과학과 반과학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는 데서 대단히 게으른 접근법이다. 과학이라는 문제에서 모든 관점이 동등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의 고질병인 그릇된 균형론은 대중적 논의의 양극단화와 정보원의 분산이 점차 심화하면서 꾸준히 악화되었다. 완고한 우파 메아리방(자기편의 메시지만을 취사선택해서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보수파 정치인들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언론을 자임하는 폭스뉴스 같은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가 터득한 경험 법칙에 따르면, 어떤 방송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균형 잡힌 공정 언론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아마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157)

 

진보지식인의 특징은 유머인 것 같다. 이건 선입견인데, 보수지식인은 공격적인 사람들이 꽤나 많다. 지식 이전에 주장을 하는 방식,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지지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고, 자칭 인류주의자인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주장의 당위성과 비례할 수도 있다고, 늘 생각하니까.

 

지구는 온난화 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온난화를 믿는 사람들이 지구를 대하는 방식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화석 연료를 아끼고 동물을 사랑하고 주어진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되도록 아끼며 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상당히 좋은 책을 읽었고, 계속 옆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저자들처럼 단호하게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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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
빈스 에버트 지음, 장윤경 옮김 / 지식너머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을 읽고

 

내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의 장르를 굳이 구분한다면 새로운 시각과 패러다임으로 쓴 자기계발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빈스 에버트는 코치를 기르는 코치에 염려스러운 시각을 보내고 <시크릿> 같은 책이 제시하지 못하는 삶의 자세를 성찰하면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삶을 보라고 제안하지만, 이 책은 결국은 살아가면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무기는 복원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처세서이자 강사의 강의 요약서 같은 책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 강사가 물리학을 전공한 물리학자이며, 저자가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방향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점. 기존 처세서에 많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새로운 처세서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운이다. 그 운을 가져다주는 것은 노력과 그날그날 열심히 사는 자세라는 저자의 말은 정말로 내가 딱 믿고 싶은, 그리고 믿고 있는 그런 삶의 자세이다.

 

사석에서는 사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전문가들의 사기성을 말해주는 책이고, 독일인도 독일인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걸 알게 해주는 책이다. 중학생 정도부터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과학 내용과 여러 경제 이론을 담고 있어 본격적인 우연학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우연학 입문서는 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상당 부분 우연이 작용하고 있으니 과감하게 시도하고 노력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9)가 빈스 에버트가 <세상에서~>에서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전부가 아닐까 싶다(이 기도는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과학과 사회학, 경제학을 가지고 말한다. 유머를 잔뜩 섞어서 말한다. 읽는 내내 재미가 있었다. 내용 자체는 가볍고 어렵지 않지만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고 고민을 해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에는 나는 거의 3주에 한 번씩 새로운 면도날을 찾아 마트를 배회한다. 이놈의 질레트가 마하 울트라 센서티브 터보같은 신제품을 쉴 틈 없이 출시하는 바람에, 내가 이전에 사둔 면도기는 완전히 고철 취급을 받고 있다. 따라서 교체용 면도날을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최근에는 5중 면도날까지 등장했으니 내 예상대로라면 2050년에는 38중날 면도기가 출시될 것 같다. 그러면 머지않아 면도 사고가 사망률 1위에 등극할지도 모른다.”(252)처럼 재미있는 부분도 많이 나온다. 번스 에번트의 신랄하면서도 유쾌한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친구 아이의 이름을 놀리는 장면은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재치라기보다는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미국을 너무 좋게 생각하는 것도 걱정스러운 부분이기는 했다. 번스 에번트는 독일의 철저한 관료주의와 지나친 정리주의를 걱정하지만, 아직 2017년의 한국에는 상당히 필요한 자질이라는 생각도 들어, 이 책을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게 한다면 한국의 사정, 독일 사정, 미국 사정을 일단 먼저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살짝 얇고 넓게 아는 지식류의 책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그래서 과학이나 경제학 등은 좀 더 깊이 있게 다뤄주었으면 싶었으나, 이 책은 이 책 나름대로의 장점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다. 좀 더 깊었다면 아마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기 힘들었을 테니. 휴가철에 많이 사람이 가볍게 읽고, 성장 위주의, 소비 위주의, 스마트폰 위주의 현대 생활을 조금 깊게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저자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상수는 변화’”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결국은 변할 수밖에 없는 지금이고, 삶이고, 나이고, 우리의 관계일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카르페 디엠을 곡해하지 말고 제대로 살아가자. 괜찮은 책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리타 이야기를 해주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궁금한 사람을 책을 보기를!). 정재승 뇌 과학자도 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 10, 17, 관계 이야기가 여기에도 나온다. 배경은 서울이 아니라 베를린이지만.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추천사처럼 지식과 유머가 절묘하게 조화된 책이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추천사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의미심장하기는 하다.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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