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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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을 읽고

 

작가는 언젠가 한 번은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자기 인생을 결정한 사건들을, 자기를 이루고 있는 구성성분들을,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을, 한 번은 털고 가야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한다. 보통은 데뷔작에서 자신을 털어내려고 시도한다. 글을 쓰는 초기에 자기를 털어 버리고 자기 이야기가 아닌 글을 쓸 수 있을 때 진짜 작가가 되는 거라고 하는 말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쓴다고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쓸 수 있을 때, 자기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흔들 수 있어야 작가가 되는 것일 테다. 엠마뉘엘 카레르는 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지고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이라고 한다. 표지 뒷날개를 보니 나는 이번에 처음 접한 작가이지만 카레르가 쓴 작품은 한국에서는 적어도 다섯 권이 번역되었고, <러시아 소설> 이전에도 프랑스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작가인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소설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읽는 책이 <러시아 소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카레르의 모든 책을 볼 때마다 카레르의 어머니를 억눌렀던 콤플렉스를 작가의 콤플렉스를 염두에 두고 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연대순으로 <러시아 소설>을 가운데 두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전과 쓴 뒤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분명히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음울하고도 한결같은 시나리오에 갇히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삶으로 가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르포르타주를 쓰는 것이 좋겠어.”(17)

 

이제는 자기 삶에 갇혀 있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려고 글을 쓰는 작가. 왠지 짠하다. 자신의 음울함을, 자신의 광기를 사라져버린 외할아버지가 주신 유산 때문이라고 믿는 작가, 그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숨기려고만 했던 어머니가 남긴 억압 때문이라고 믿는 작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작가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면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개별을 이야기하면서 인류 전체의 보편적 속성을 담담하게도, 답답하게도, 초조하게도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작가란 정말 작가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50년 동안 러시아 정신 병원에서 갇혀 있어야 했던 헝가리인, 전쟁 전에는 사회의 아웃사이더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어디론가 끌려가 버린 독일군 통역을 맡은 러시아인, 학술원 종신 원장이지만 아버지를 숨겨야 하는 어머니, 풍족한 프랑스 부르주아로 살았지만 사람 한 명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성공한 작가, 아내를 프랑스인이라고 믿는 FSB 간부, 자신의 삶에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의 돌파구로 생각하고 상심해 하는 러시아 여인, 서양의 아이돌을 꿈꾸는 평범한 러시아 소녀, 딸의 죽음조차 소리 내어 원망하고 비난하지 못하는 러시아 노파.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그 누구 하나 자기 삶에 갇힌 작가가 아니고, 우리가 아닌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출구가 있는 작가는 행복한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촬영하러 온 프랑스 기자들에게 우린 여기서 개 같이 살고 있어! 그런 우릴 촬영하러 온 너희들은 정말로 나쁜 놈들이야.”(221)라고 말하는 러시아 노인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코넬니치를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으로 인터넷으로,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런 삶을 보기 때문에 훨씬 더 비참해지고 침울해지고 미쳐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프랑스 기자들은 무엇 때문에 코넬니치에 갔을까? 무엇 때문에 비참한 곳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찍으려고 했을까?

 

그런 무신경 때문에 <러시아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를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좋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냐에게 보내는 편지도, 아냐를 대하는 태도도,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작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337쪽에서 한 여성작가가 작가에게 보낸 여주인공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정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 아내라면 이 단편은 내 삶과 우리의 관계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확신한단다.라는 메일 내용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느낀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단편을 합리화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는 <러시아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자기를 달래고, 무명으로 살다가버린 슬픈 러시아인들을 위로하고, 엄마를 위로하고, 소냐를 완전히 보내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러시아 소설>을 집필하는 거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는 343쪽에서 이 책을 출간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출간했다. 작가는 아마도 그 이유를 <러시아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변명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을 것이고,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건, 즐겁게 하건 간에,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소설>에 담은 카레르의 많은 변명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알아보고 싶다. 지금쯤 소냐는 행복해졌기를 바란다. 열정적인 사랑만이 삶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아야도 레프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삶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으니까. “산 채로 죽어가는작가도 다시 살아났기를 바란다. 작가의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아들에게서 치유 받았기를 바란다. 역자의 말처럼 고통을 기록하는 고통스러운 글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강요당해 원혼으로 떠도는 세상의 모든 고통들에 비로소 <목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425) 이 세상 모든 영혼이 목소리를 부여 받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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