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 - 거짓 선동과 모략을 일삼는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에게 보내는 레드카드
마이클 만 & 톰 톨스 지음, 정태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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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읽고

 

요 근래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화끈한 책이었고, 가장 현실적인 책이었으며, 가장 현대적인 책이었다. 분명히 기후 변화 정책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한국의 정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지금 한참 진행되고 있는 청문회를 보고 있는 느낌, 지난 대선을, 앞으로의 대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성을 느꼈다.

 

서평을 쓸 때 책 내용을 쓰지 않고 내 느낌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쓴다는 나름 개똥 원칙을 세워 두었지만, 이 책은 저자들의 목소리가 흥미로워서 그 원칙을 깨기로 했다. 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한국도 미국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수많은 정치인이 기후변화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도 정치도 재해 대책도 시민을 우선하는 정책이 아니라 기업을 우선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기존을 우려를 재확인하고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읽으면서 가장 곱씹어보고 싶고 머리에 넣어 두고 싶었던 점은 과학이란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난한 작업인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법이었다. 믿음과 과학 가운데 내가 보통은 과학을 택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도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나에게 마이클 만과 톰 톨스는 근거의 우월성(preponderance of evidence)’을 외치라고 한다.

 

먼저 여러분이 과학적 체계를 어느 정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사실들이 의심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 측정과 분석과 이해를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들에게 의지하기 바란다. 의견의 불일치가 명백하거나 불확실성이 계속해서 득세하는 상황이라면, 근거의 우월성을 무기로 삼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듯 근거의 우월성!’하고 외치면 된다. 완벽한 근거란 수학의 정리 또는 알코올음료 따위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과학을 향해 완벽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과학이 체계를 갖추는 고유의 과정을 무시하겠다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꼴이다. 과학은 오히려 상당한 수준의 가능성, 근거들 사이의 균형, 여러 갈래의 근거들이 보여주는 일관성을 다루는 분야다.”(33)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원자력 에너지를 반대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더 나아가 보편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체 오늘 청문회를 개최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작 진지한 과학적 조사가 필요한 지점은 이 문제(148)라는 글을 읽으면서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자는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민의 여론만을 따라가는 정치는 위험하다는 어느 한국 국회의원을 말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었다(사실은 웃을 문제가 아니라 아주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자의 전반적인 논조는 낙관적이다. 시민이 정부가 정치인들이 기후변화를 막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프란체스코 교황의 노력과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을 많이 언급한다. 나는 그래서 더 우울해져 버렸지만. 책을 쓰는 동안 미국 대통령은 오바마였지만, 지금은 트럼프니까. 212쪽에 나오는 트럼프는 그래서 더 얄밉다.

 


   

 

저자들은 우리는 특수한 이익집단이 아니라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212)라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한 투쟁이 다음 단계로 원활히 진화하도록 힘을 보태자.”(213)라고 말한다. 이런 모든 주장을 나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로 들었다(이런 오독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겠지만).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의회 차원의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이니만큼”(195) 풀뿌리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나는 정치적인 감성으로 이해했다. 저자들은 선거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는 사람은 가만두면 안 된다.”(141)라고 했다.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는 나에게 고집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과학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얼버무리지 말자. 지구온난화가 사실이 아니라거나 정확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문제로 입씨름하지 말자. 그저 기후변화 부정론은 사실이 아니므로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고 정중히 말하자. 상대방이 근거를 요구한다면, 이 책을 건네자. IPCC나 국립과학원에서 펴낸 보고서를 일러줘도 좋겠다. 그가 모든 과학이 의문스럽다고 말한다면, 그런 관점은 피해망상으로 가득한 음모론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하고 더 이상 논쟁하지 말자. 대신, 기후 문제의 해결에 이바지할 생각이 있어 보이는 합리적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리자.”(209~210)

 

어떤 근거를 제시해도 내 말만 옳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류노스케 스님의 <생각 버리기 연습>과 함께 <누가 왜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가>를 가져가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언론인을 꼬집은 부분도 한국 언론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언론은 기후변화 부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여러 잘못 가운데 하나는 언론의 그릇된 균형론이다. 기자들은 언론학개론을 공부하면서 나쁜 버릇이 들었다. 바로 기후변화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들을 접할 때면 주류 관점과 대등한 지위를 주변 관점에 부여하는 버릇이다. ‘양측 모두를 공평하게 다루라!’고 배운 탓인데, 이런 태도는 과학과 반과학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는 데서 대단히 게으른 접근법이다. 과학이라는 문제에서 모든 관점이 동등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의 고질병인 그릇된 균형론은 대중적 논의의 양극단화와 정보원의 분산이 점차 심화하면서 꾸준히 악화되었다. 완고한 우파 메아리방(자기편의 메시지만을 취사선택해서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보수파 정치인들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언론을 자임하는 폭스뉴스 같은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가 터득한 경험 법칙에 따르면, 어떤 방송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균형 잡힌 공정 언론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아마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157)

 

진보지식인의 특징은 유머인 것 같다. 이건 선입견인데, 보수지식인은 공격적인 사람들이 꽤나 많다. 지식 이전에 주장을 하는 방식,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지지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고, 자칭 인류주의자인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주장의 당위성과 비례할 수도 있다고, 늘 생각하니까.

 

지구는 온난화 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온난화를 믿는 사람들이 지구를 대하는 방식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화석 연료를 아끼고 동물을 사랑하고 주어진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되도록 아끼며 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상당히 좋은 책을 읽었고, 계속 옆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의 저자들처럼 단호하게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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