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살해하기 - 당연한 말들 뒤에 숨은 보수주의자의 은밀한 공격
웬디 브라운 지음, 배충효.방진이 옮김 / 내인생의책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읽고

 

지난 몇 년 동안 소위 한국의 지배층이라고 하는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민낯을 보면서 어떤 정치인의 말처럼 참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아끼고 보호하는 정책이 아니라 효율적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승자독식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우리 서민들은 안일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참아야 했다.

 

하지만 참는 와중에도 궁금하기는 했다. 소위 엘리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저렇게 염치없음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가? 착취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이지 않으며 배려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사람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인적자원으로만 보는 통치 합리성이 전 세계에 만연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사람의 가치가 사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낼 수 있는 효율성, 그 사람이 창출할 수 있는 개인 기업으로서의 실적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 사회를 흔히 신자유주의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라고 부르나보다.

 

그런데 도대체, 신자유주의가 무엇인가?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개념적으로 방황하게 만들고 (민주주의의) 핵심을 비워낼 작업을 시작할 새로운 형태의 통치 이성”(7)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푸코가 이야기한 생명관리정치를 비평하고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저자의 말처럼 신자유주의가 파괴하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아는 것이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에 주시하면서 민주주의가 파괴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을 찾는 첫 걸음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 누구도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파악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때 -현대 사회와 그 뒤의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방향성이 달라지는 바람에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신자유주의를 규정한 사람은 푸코였다. 그러니 신자유주의에 관한 고찰은 푸코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웬디 브라운은 푸코의 고찰은 신자유주의의 탈민주주의 효과를 이론화하는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41)고 했다. 하지만 푸코는 직접 쓴 저작도 해설서도 많이 난해한 듯하다. 하지만 반갑기도 하다. 푸코는 푸코니까(사실은 미셸 푸코보다 에코의 <푸코의 추>가 훨씬 더 좋지만). 모르는 걸 알아야 알아갈 수도 있으니까.

 

기업의 투자자이자 기업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가는 대학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실제로 리버럴 아츠 교육이 무너져 가는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만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보다는 인문학 교육이 수십 년 동안 쌓아 왔던 전문용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철옹성 같은 jargon과 난해한 문체, 의미를 알 수 없는 괜한 어려운 표현법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을 만들어, 그 학문의 실용성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했다. 서평을 쓰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도 내가 <민주주의 살해하기>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 많은 문제가 벌어지는 원인이라고 믿어지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 2차 세계 대전 뒤에 패전국인 독일이 경제를 재건하면서 만들어 냈다는 신자유주의를 누구 한 사람의 도입으로, 어떤 한 정권의 의도로 한국에 들여왔다고는 믿지 않지만 흔히 말하기를, 참여정부 시기부터(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이번 정권에서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알고 싶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그래서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거듭해서 읽고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은 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혼란스럽게 뒤섞여 버렸지만,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벌써 두 번 읽었는데 잘 모르겠어서 좌절을 하기는 한다.)

 

<민주주의 살해하기>를 여러 번 거듭해서 읽고 싶은 이유는 또 있다. 좀 더 쉽게 풀어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학자란, 저자란, 나 같은 일반 사람이 느끼는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던 막연한 불안감, 노동하지 않고 버는 돈에 대한 거부감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때문이다. 웬디 브라운은 푸코부터 시작해 호모에코노미쿠스, 이집트 농부들의 위기, 거버넌스, 벤치마킹, 모범사례 등이 갖는 진정한 함의를 여러 사례와 정의를 세워 가며 설명해 나간다. 저자처럼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고 제대로 서술하는 법을 나도 배우고 싶다.

 

책 간간이 오타가 보이지만 이해를 하는 데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경제 관련 내용은 잘 모른다는 것. 학자들이 익숙하게 쓸 정식(정당한 격식이나 의식이라는 뜻인지 격식이나 방식을 일정하게 정한다는 뜻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이나 이재(재산을 잘 관리함??) 같은 개념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한 독서였다.

 

여성이면서도 생활에서 느끼는 페미니즘 문제를 학문으로는 도저히 연결하지 못하는 내가 여성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할 거리를 안겨준 독서였다. 책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도 알게 된 독서였고, 사실은 분석도 파악도 못했다는 걸 고백해야 하는 독서이기는 하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아는 것으로 시작하는 거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고, 내 무지를 아는 것이 내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게 되는 길일 것이다. 드문드문 이해가 되는 책을 언젠가는 하나로 이어서 쭉 이해하고 싶다. ‘나는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들어. 왜냐하면……’, 하고 시작하는 대화에 내용을 채워줄 책이다. <민주주의 살해하기>. 상당히 난감한 마음으로, 시간 당 읽어내는 독서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는 깨인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읽고 또 읽어보련다. 결국 독서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자기 인식을 바꾸는 개인 수양의 과정이 되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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