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본질적인 것만 남기고.결국 젊음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그것도 마모되니까.그러나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은 마모되지 않았다.내 사랑은 진심이었다.슬픔도 희석되고 실은 아픔도 아팠다는 사실만 남고 잘 기억되지 않지만,사랑은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젊음아 거기 남아 있어라, 하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아,언제까지나 거기 남아 있어라.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수사는 신부서품을 앞두고 사랑에 빠지고 같은 길을 가던 친구들의 갑작스런 사건을 겪고,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이방인 노수사들과 할머니,할아버지의 끔찍하고 쓸쓸하고 기적적이며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달라져가는 인생의 순례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소설에서나 일어난다.
그 소설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그녀의 작품은 언제나 삶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휘몰아치는 바람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에서 그 아픈 상처를 감싸고 치료해 주는 포근하고 따스한 밴드로 다가온다.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문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이 구절을 떠올리자마자,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온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했던 유명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내자 내 입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이 구절을 떠올리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정요한 수사의 교과서 같은 삶과 마음속에 가득했던 그의 열정은 한 여자를 통해 폭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