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은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본질적인 것만 남기고.결국 젊음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그것도 마모되니까.그러나 그들을 향한 내 마음은 마모되지 않았다.내 사랑은 진심이었다.슬픔도 희석되고 실은 아픔도 아팠다는 사실만 남고 잘 기억되지 않지만,사랑은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젊음아 거기 남아 있어라, 하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아,언제까지나 거기 남아 있어라.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수사는 신부서품을 앞두고 사랑에 빠지고 같은 길을 가던 친구들의 갑작스런 사건을 겪고,한국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이방인 노수사들과 할머니,할아버지의 끔찍하고 쓸쓸하고 기적적이며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달라져가는 인생의 순례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소설에서나 일어난다.



그 소설같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그녀의 작품은 언제나 삶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휘몰아치는 바람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에서 그 아픈 상처를 감싸고 치료해 주는 포근하고 따스한 밴드로 다가온다.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문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이 구절을 떠올리자마자,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아온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했던 유명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내자 내 입은 나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이 구절을 떠올리려고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생각을 했다.정요한 수사의 교과서 같은 삶과  마음속에 가득했던 그의 열정은 한 여자를 통해 폭발하게 된다.
 



미카엘은 언제나 지적 논리와 성실함으로 요한의 친구이지만 교회와 교회 장상들에게는 언제나 비판적이다.또 다른 친구 천애 고아 안젤로. 키가 작지만 얼굴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우며 마음이 따뜻하고 말과 행동이 사랑스러워 수도원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공부도 일도 서툴러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여서 넘어갈 때가 많다.



또 한 사람,어릴 때 약속한 헌신적인 약혼자와 요한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아빠스 대수도원 원장의 조카 소희도 있다.각자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개성이 강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소설의 별미를 더하는 높고 푸른 사다리는 공지영의 작품임을 증명하고 있다.이상하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으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 선명해지는 것. 아마 대표적인 이가 예수였겠지.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닐까.무질서 속에서도 우리는 질서를 잡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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