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1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장영재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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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 “아사르왕 아사르하르”를 읽고]

군주는 백성들을 잘 돌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땅을 넓히고 영토를 차지하기위해 자신들의 백성이 아닌 다른나라의 백성과 군인들은 무참히 죽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군주는 위대한 군주인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인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에 빠져 같은 인격체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같은 사람 대 사람으로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수 있단 말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전쟁을 통해 나온 영웅이 과연 영웅인가? 그들이 자신의 부하와 백성들에게만 너그럽다고 하여 진정한 영웅이라 할수있는가?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한 군주들 중 남은 하나의 군주만이 군주로 추대되고 그 군주가 통일하여 만든 국가를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그 군주는 왕으로써 존경받고 백성에게 사랑 받는다. 그 국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엇이 옳은걸까?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더잘살게? 아니 행복한것처럼, 더 잘사는것처럼 만들수있다면 그보다 더 적은 사람들의 희생은 필수적인 것이고 당연한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믿는 헤게모니 안에서 정당한 살인자는 왕이되고 정당하지 않는 살인자는 죄수가 된다. 인격은 인격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하고 인간의 생명권은 어떠한 이유로도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이라고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다.(그럼에도 우리나라에는 사형제도가있지만)

가장 기본이되는 헌법도 지키지 못한 그들이 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좌도 우도 아닌 선량한 인간을 죽이면서도 추대받고 존경받는 것일까?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 역시 정당화 되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걸까? 나도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사람들, 내 가족들, 그들과 함께 잘 살고 싶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나 역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죽이고 밟아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모든 자원은 유한하기에 누군가가 그것을 갖는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가지지 못하게된다.

과연 모두가 잘사는 사회가 가능이나 한 사회일까.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해보이길 원하고 더 많이 갖길 원한다. 그 욕망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존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두가 함께 같이 잘사는게 가능할까? 자원은 유한하고, 인간의 욕망은 남들보다 잘살기를 원하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오래전 군주가 그랬듯 나만의 헤게모니를 만들고 그것을 함께 할 사람들과 뜻을 모아 나와 반대되는 헤게모니의 사람들을 죽이면서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그들만의 정의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세계에서 잘 살아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면?

사회적 성공을 너무 흑백논리로만 보는 것일까? 그것보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고싶다. 만약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나는 과감한 결단을 할수있을 것인지, 정말 대를 위해 소를 희생에야 할때가 오면 내가 정말 그것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왜냐면 그렇게 희생된 ‘소’들도 나의 눈에 보일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함께 잘살고 싶다는 나의 본질적 가치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까봐 무섭다.

대를 위해 나의 신념을 버릴지, 나의 신념을 지키기위해 그러한 삶 자체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에서 내가 과연 어떠한 선택이든 선택 자체를 할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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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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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것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기대하느냐이다-

-우주에는 원대한 목적도 없다 그저 존재할뿐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결정하고, 사회를 바라볼때
사회가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회의를 느끼기보다 주어진 사회안에서 환경안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것이아닐까..?

나의 환경은 누군가에게 강요되어지고 강압받을수있는 것이지만 그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는 어떤 누구도 침범할수 없은 나만의 절대 자유영역이므로... 내가 그환경을 받아드리는 방식은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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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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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신앙을 가진 나에게 정말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책이었다. 과연 조르바가 말한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유가 아닌것인가? 자신이 가진 자유만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건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 남들이하는 행동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 맞을까? 어쩌면 그런말을 통해 자신도 어딘가에 얽매여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건 아닐까? 작가는 조르바가 자유그자체라고 말하였지만 글 속 조르바는 종교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자유롭게 사는것임을 표현하려한다. 알고있다. 조르바의 자유를 극대화하기위한 작가의 배경설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과연 조르바와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이 비난받아야 마땅한것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걸치지지 않은 나체의 삶이 자유인가?
백인우월주의 정권에 맞서 무쟁투쟁중 감옥에 갇힌 만델라는 ˝갇혀있는것은 극심한 고통이다. 자유,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볼 수있는 것이다˝라고했다. 눈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비난 할 수 있지만 `자유`는 사람의 가치관, 가정환경, 종교, 처해있는 상황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단어 그 자체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자유와 행복이 완전 등호가 성립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직•간접적으로 상호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조르바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런 자유를 택하였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행복을 찾기위한 과정이라면 우리는 얽매임 안에서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유함을 느낄수있다. 내가 속한 국가, 사회, 가정, 종교안에서... 일정한 제약과 구속 안에서 나는 자유함을 느낄 수 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나에게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삶의 가치관을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자유하지 못함이라고 비난 할 수있을까?

하지만 조르바가 자유를 행, 불행과는 전혀다른 그자체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말 한다면 묻고 싶다. 그런삶이 과연 무슨의미가 있는가? 본능적인 삶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저 본능대로 살아가는 짐승의 삶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가? 자유 그자체로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자기위안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책을읽고나서 작가는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기 위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을까 생각하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가장먼저 생각이나는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은 몇백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가끔 연락하는 사람까지 합하여도 70명 내외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요즘 카톡지옥이라고도 하는데 수시로 연락하는 단체톡만 도대체 몇개인지... 답장을 안 할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정말 지옥이아닐까...

완벽해야한다는 강박관념!!
어떤 상황에서 혹은 어떤일을 할때 내가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기혐오와 함께 자책하고 비난하며 내 자신에게 상처주는 삶을 살고있었던건 아니었는지...

내가 사회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있다고 말하였지만 어쩌면 너무 깊숙한 곳에서 나를 옭아매고 있어서 그것이 불편한 것임을 인지조차 못했던건 아니었는지...어쩌면 내가 처한 상황을 정당화하기위한 합리화가 아니었는지 반성해본다.

역시 어느것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다시한번 느낀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본능적으로만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적 제약에 무너지고 얽매이는 삶을 사는 것도 경계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작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극단의 캐릭터를 묘사하고 약간의 조롱과 함께 완벽한 조르바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꽉 움켜쥐고 있는 삶에서 좀 더 편안해지길, 좀 더 내려놓는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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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02 0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_+ 서평써본적 없으시다고.........?!?! 참말 맞나요?? ^^

책을 덮고 자유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안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이지요~? 저는 좀 지루하게 읽었는데 읽고 난 이후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변사람들과도 많이 이야기 나누고요^^)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재미있고 신나게 딱떨어지는 감흥보다는 잔상이 오래 남는 것이 더 훌륭한 것 같아요. 읽는 동안에는 몰랐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책이었어요. 저도. ^^

와니 2015-07-02 17:18   좋아요 1 | URL
중학교때 독후감 써보고 처음인것같아요ㅠ 원래 제가 책을 정말 싫어 했거든요ㅠ 2~3년 전 부터 읽기편한 자기개발서를 한권한권 읽다가 요즘에는 다른 분야에도 흥미를 가지게 된것같아요^^ 거기에 하얀님의 독서노트들이 큰 몫을 했다는...ㅋ 감사합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교에 비판적인 책들인데요. 그런책들이 저에게 종교를 멀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안에서 잘못되었던 부분들을 되돌아보게하고 저 역시 그런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제 가치관을 더 확실히 정립해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주변사람들과 대화를 할때도 예전에는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싸우게 되서 얘기하는 걸 꺼려했는데 요즘에는 그런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에 감사하고있어요. 폭넓은 사고를 가능하게하고 그 안에서 진짜 저를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있으니까요..ㅋ

비로그인 2015-07-05 16:51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저의 독서노트에 거론되는 책들은 ㅜㅜ 어려울 수도 있어요...(특히 신곡...?^^;;) 와니님께서 재미있어 할 수있는 책들을 많이 접하시는 것이 가장 독서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종교인으로서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다가... 헛소리만 하다가 갑니다. ^^ ㅎㅎ

와니 2015-07-09 07:52   좋아요 1 | URL
맞아요ㅠ 하얀님글 읽을때는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책은 너무 어려울 것같더라구요ㅠ 그래도 언젠가는 도전해봐야겠어요.ㅋ

종교인으로서 나를 찾아가는과정은... 사실 제가 한참 종교에 깊게 빠져있을때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건 `죄책감`이라는 단어 였어요. 난 잘못살고 있어...이렇게 살면 안되는데...하면서 점점더 저를 옥죄는 삶을 살아가고있었죠.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종교를 비판할때면 죽자고 달려들어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주려고 발악도 해보았구요. 어찌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신앙에 빠져있었던거죠. 요즘은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나약하고 부족한 저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중입니다. 종교에 비판적인 사고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그안에서 제가 종교를 믿어야하는 이유를 찾기도 하구요.

저도 20대 초반에는 조르바만큼은 아니지만 쾌락적이고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삶을 살았던것같아요. 지금 생각나는대로 바로 말하고 유혹이있다면 기꺼이 그런 행동들을 하였죠. 하지만 그 끝은 허무함과 육체적•정신적 피폐함이었고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행복하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알게되었어요.

그런의미에서 지금 제가 믿고 있는 종교는 제 가치관을 결정하고 제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저의 행복을 위해서이지요. 하지만 종교는 이상적이기에 현실을 살아가는 제가 완벽히 그렇게 살수 없음을 인정하고 제자신을 좀 더 이해해주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종교안에서 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런게 아닐까...생각해보아요^^

이런생각들이 종교가 더 깊어지거나 반대의 다른 사고와 책들을 만났을때 어떻게 변화될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그것도 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테니...ㅋ

비로그인 2015-07-08 16:48   좋아요 1 | URL
조심히 거론한 적이 있는 듯 한데요. 저도 기독교의 문화환경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종교에 대한 생각이 처음부터 무신론자들 보다는 조금 더 명징하지요:-)

대부분의 고전은 `그리스 로마시대`에서 출발하잖아요. `호매로스`가 위대한 이유는 언어(말)가 활자(글)로 쓰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쓰여진 대서사시이기 때문이잖아요. 그 시대에 종교란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죠.

크게 보면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당연히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이 저 역시 가정이라는 세계 속에서 저의 선택의 영역과는 상관없이 신을 믿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조금 더 회의적이게 된 것이고요.

무엇보다 와니님의 말씀에서 처럼, 종교에 속해 있을때 끊임없이 나를 속박하던 그 `죄의식`이 저 역시 괴로웠어요. 종교에 있다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겠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그 진리의 양면성과 자유롭다는 의식은 (자유에 대한 의식을 자체를 안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결국 종교의 절대적성을 확립하는 것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만 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요.

성인이 되고 부터 꾀 오랜시간 (지금도 그렇고) 부모님에게 대적하기 위해 종교를 의식하는 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무조건 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가 선택에 의한 (기독교의 관점에서 그것은 영접이지요) 영역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분명히 구원에 확신을 두고 인간에게 선택적인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꼭 믿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그래서 지옥에 간다는 그 죄책감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의 진위를 말하려던 것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모쪼록 제가 드리려고 했던 이야기는, 여러가지 의문을 떠안고도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와니님의 겸손한 마음이 조금은 부럽다는 말을 (다소 부정적이지만) 돌려서 합니다.

그 동력이 무엇인지도 조금 궁금하고요.^^

와니 2015-07-09 08:55   좋아요 1 | URL
음... 참 어려운 것같아요. 제가 교리공부를 많이해서 이건이렇다 저건 저렇다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런 공부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는 제가 설명하기에는 깊이도 안되고 역량도 없어서 죄송스럽네요ㅠㅠ

제가 신앙을 가진 종교인이지만 하얀님 같은 의문점을 가진적이 많았고 지금도 가끔 그런 의구심이 있답니다. 특히 종교의 절대적성을 확립하는 것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신은 선택적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믿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같은 지옥에 간다는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하얀님의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하얀님이 쓰신 글이 저에게 더 와닿았던것 같구요. 그런 의문들을 하얀님의 경험과 사고에의해 해석하는 모습이 멋있어보였답니다.

저는 하얀님처럼 어렸을때부터 종교의 그늘아래 살아왔답니다. 모태신앙이지요. 참고로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때 성당에 가는게 정말 싫었어요. 강요에의해 신앙생활을 하는게 너무 싫었죠. 그래서 사춘기때는 반항하기도 했었구요. 결국 중학교 이후로 성인이 될때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위 댓글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20대 초반에 그런삶을 살아가다 군대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의무적으로 종교활동을 해야할때 성당에 가게 되었고 그냥 앉아서 성가를 듣다 너무 편한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기억이 저에게는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있답니다. 하얀님의 표현대로라면 이게 영접일까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건 명확한 논리가 아니라 감동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런 경험이후에 신앙에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감사`, `용서`, `사랑`에 대해 배우고 알아가는 중입니다. 사실 이것들은 남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 이기적이게도 제 자신을 위한 것이에요.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미워하게되는 것보다 힘든 것은 내자신을 미워하고 내가 나에게 상처주는 행동들인데 기도를 통해, 성경을 통해 제자신의 부족함을 용서하고 오늘이 주어졌음에, 내가 온전한몸을 갖고 있음에 감사하고 제 자신을 좀더 사랑하리라는 기도는 저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 같아요.

하얀님이 말씀하신 의문을 떠 안고도 스스로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동력이라는 것이 저는, 그런의문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저에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대립있는 성경의 표현들은 제가 종교를 믿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성경의 해석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저 역시 사람인지라 그런의문들이 없을 수 없구요. 하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성가를 통해,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제가 만나는 시간이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저와 제가 만나는 시간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겠죠.

비로그인 2015-07-10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기독교를 다른말로 개신교라고 하잖아요? 저는 기독교, 그러니까 개신교의 종교문화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개신교의 근원은 천주교인데 개신교에서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있지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ㅜㅜ 집단적인 이기주의까지는 인간의 공동체의 성질로 인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나의 종교가 절대적이기에 그 외에 다른 종류의 종교를 폄하하는 방식의 종교의 세력확장(으로 보이는 그런 태도가)이 마냥 불쾌할 뿐이었죠.^^;; 물론 인간들의 편의적인 해석에 의해서 그런 것이지 특정 종교의 중심인물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지는 하고 있습니다. 와니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요.

선행에 대한 동기나 의지가 종교적인 목적에서 그 행동력을 발휘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와니님께서 말씀하신 `감사`,`용서`,`사랑`을 이제는 종교이외의 공동체에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종교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와니님과 마찬가지로) 종교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잖아요.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는 세상이라..ㅜㅜ

종교 자체를 그저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더 건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종교를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냥 편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편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더라고요.

와니님의 말씀처럼, 결국 종교역시 일대다수가 아니라, 일대일로 신과 보내는 은밀한 시간인데 그런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양심이 가끔은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의 영역에 문답을 할 자격은 저에게 없습니다. 제가 신앙심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존중해 달라고 말하는 것 처럼 신앙심을 선택한 사람을 존중학 의무가 저에게는 있으니까요.

붙임. 다서 거칠게 대답한 것 같아서 조금 염려가 됩니다만, 나쁜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와니 2015-07-11 14:33   좋아요 1 | URL
아뇨아뇨^^ 하얀님 글을 볼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걸요ㅋ 저도 하얀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부분도 있고 저에게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종교가 더 건강해져야한다는 것에 동의 합니다.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부분도 많다는 것을 인정하구요. 저도 그런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들의 양심이 가끔은 의심스럽다는 말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네요^^;;

사실 얼마전 전 큰 실패를 경험하고 몇개월동안 방황하다 오랜만에 책도 읽어보고 전자책도 사보고 하다 이곳 북플을 알게되었는데요. 한참 종교에대해 부정적적이고 의구심도 많이 들때였답니다. `난 기도도 열심히 했고 종교안에서 봉사도하며 내 일에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실패가 찾아왔지...` 강론을 들을때도 `저게 맞는말일까?` `진짜 신은 있을까?` `저런 논리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말을 내가 믿는게 맞는 행동일까?` 성당에서 하는 활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처들..(저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겠지요) `종교인은 다를 줄 알았는데..`하는 회의감과 그런 의문들에 답을 못찾고 있을때 하얀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 글들을 보고 그래 이게 답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했었구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붙잡고 있지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것 같은 두려움때문에 저는 그런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놓지 못했었어요. 그렇게 1달 정도 지나 제가 요즘 느끼는것은 하얀님이 말씀하신것처럼 내가 종교를 너무 편의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던건 아닐까? 종교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닌데 나는 너무 내가 좋은 것들만 생각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삶을 살아가며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때 내가 종교에서 찾고 구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그저 잘되게해달라는, 성공하게해달라는, 불운을 주지말라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일까? 실패 후 몇 개월이 지났고 이런말하면 자만같이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방황과 고민, 종교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겪으며 제가 조금은 성숙했다는 느낌을 받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실패전 그때의 저보다는요.

그런 과정들을 겪으며 정말 쓸데없을 것 같았던 실패와 죽고싶을만큼 힘들었던 방황이 저에게 다른 방향으로 큰 자양분과 밑거름이 되었고 앞으로의 기도의 방향도 마냥 내가 잘되게해달라는 기도보다 어떤 상황이든 환경이든 삶을 부정하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고통안에서도 나를 좀더 알아갈수 있는 기도가 되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이렇게 다짐을하고 생각을하고 반성을해도 저의 나약함을 알기에 저는 쉽게 바뀌지 않아요. 제가 오랜기간동안 냉담하다 다시 종교활동을 시작할때쯔음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어요.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부족함도 있었고 내가 생각한것과 달라 많은 실망을 했었죠. 좋은 말씀과 그 사람과 동일시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좋은말과 그사람의 삶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알지 못했었죠. 제가 처음 책을 읽을때 자기개발서를 좋아하다 요즘은 읽지 않는것과 비슷한 맥락인데요. 다시말해 아무리 좋은 말을해도 그런삶을 평생, 계속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도 무너질때가 있고 방황할때도, 어쩌면 비신앙인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때가 있을거예요. 저도 그렇구요. 그래서 요즘은 좋은 말과 사람은 따로 두고 하얀님이 말씀하신 종교안에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보게될때 이기적이지만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맞게 받아들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저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두는 지향점에 하루 한걸음이라도 다가간다면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다가가기 위해 저에게 종교가 필요한게 아닐까...생각해봅니다.

비로그인 2015-07-13 16:43   좋아요 1 | URL
종교에 대한 와니님의 상념들이 정리가 되어가는 것에 기분이 묘합니다. ^^;;
천주교와 기독교를 구별하여 생각하는 저의 개념때문인지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어려워서 답을 하기가 많이 조심스럽고요.

결국은 자신의 믿음에 관한 개인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누군가가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와니님처럼 자문하고 자답하면서 스스로의 영역을 견고히 한다면 대중(비종교인)이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더 포근해지지 않을까 희망해 보았습니다. ^^

Ps. 와니님도 충분히 멋있으십니다. 보통 종교적인 입장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선의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토록 경청해 주시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시켜 나가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입니다!
+_+


와니 2015-07-13 22:51   좋아요 1 | URL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의 정리를 하게된 것도 하얀님의 도움이 컸다는...감사합니다^^ 어려워마시고 저와 생각이 다른부분들, 하얀님이 생각하시는 부분들을 편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얀님의 글은 저에게 항상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닌 전우를 위한, 국민과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

2002 한일 월드컵 3, 4위전에 모든 국민들이 들떠있었던 그날... 그 뜨거운 열기에 가려, 햇볕정책이라는 정치적이유로 비난받고, 배가 침몰하고 피해가 컸다는 이유로 패전으로 기록되었던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그들은 국민의 한사람이었고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들이고 형이고 동생이었다. 그들은 서해 해상 북방한계선(NLL)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이익이 아닌 우리 국가, 우리 국민들을위해 끝까지 싸웠고 지켜냈다.

연평해전 고속정 357호정은 공교롭게도 내가 군생활때 승조했던 고속정 356호정의 바로 다음 번호이다. 배의 숫자는 건조순서를 의미하는데 내가 승조했던 고속정과 거의 같은시기에 건조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며 고속정 생활때 좋았던, 가족같던 전우들도 많이 생각나고 해상경비, 실전상황들이 기억나면서 우리 선배들이 겪었을 처절한 고통과 희생을 영화를 통해 경험하니 가슴이 너무 먹먹했다.

사실 일반인들은 잘모르지만 전방으로 출동을 나가면 출동기간 중 수십차례 실전상황이 발생한다. 바다에는 휴전선과 같은 철조망도, 비무장지대(DMZ)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적정의 이동에 군이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긴급출항 벨이 울리면 화장실 용변을 보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밥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5분내로 출항을 완료해야하는 열악한 상황속에서 오늘도 우리 해군은 NLL을 사수 하고 있을 것이다.

군에있을때 가장 답답했던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인정받기위해 군 생활을 한건 아니지만 나가면 소위 `군바리`라느니, `군인 냄새 난다. ` , `편하게 돈 벌겠네` 등등 군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한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나에게 상처였다.

연평해전이라는 영화가 나오기 전 우리 국민 중 몇명이나 제2연평해전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이 영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노력하고, 있는 자리에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생각하며 군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국민들이 한번 더 대한민국 국군을, 해군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하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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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7-0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가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사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부끄럽게도)몰랐어요. ㅜㅜ

와니 2015-07-01 22:09   좋아요 1 | URL
저도 부끄럽지만 나중에 군대들어가서 알게되었어요ㅠㅠ 이번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게되었으면 좋겠네요^^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장이나 자아 실현이 방해될 때에, 일종의 위기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위기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이나 사디즘, 마조히즘 및 권위에 대한 복종 또는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권위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롬은 자아를 실현하는 생활이 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프롬은 스피노자처럼 「행복은 덕의 증거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즉 생산적인 생활과 인간의 행복이나 성장을 바라는 인도주의적 윤리를 신봉할 때에 사람은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신경증이나 권위주의, 사디즘, 마조히즘 등은 인간성이 개화되지 않을 때에 일어나고 이것을 프롬은 인간적인 파탄이라고 했다.
- 출처 : 위키백과 -

조국 교수의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 가를 읽다가 알게된 에리 히 프롬... 요즘 정서적 정신적으로 힘든 나에게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책인 것같다. 나는 지금 인간적인 파탄의 상태인것인가...?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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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1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생산이나 성장으로 연결이 된다면, 윤리의식에 더불어 이렇게 사고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앓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와니 2015-06-16 15:41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부분에서 의문이 많이 들더라구요. 읽어보려고 주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