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터넷 강국이다. 초고속 인터넷 연결망이 각 가정과 사회전반에 연결되어 이를 바탕으로 가상공간을 통한 다양한 인간관계, 이득창출 그리고 정보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근래에 네티즌 사이에 속칭 '싸이질'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한 인터넷회사가 만든 싸이월드라는 사이트는 개인이 가입하여 자신만의 미니홈페이지를 꾸미고 서로의 홈을 방문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가상공간 속에서 맺어간다. 사용자들은 매일 자신의 방명록을 확인하며 방문자들을 다시 찾아가 글을 남기면서 가상적인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며 자신의 홈페이지에 많은 사진과 다양한 글을 올림으로써 인기도를 높이려 노력한다. 재밌는 것은 이 싸이월드라는 가상공간에서 꾸며지는 미니홈이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가입자 모두에게 똑같이 정형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미니룸과 구별이 가능한 부분이라며 각각 미니룸을 꾸미는 사람이 다르듯이 사진첩의 사진이 다르고 게시판의 글이 다르고 미니룸의 색상과 각종 아바타물이 타인과 구별된다는 것 밖에 구조적인 형식은 모든 사용자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이트의 미니룸에 올라가는 사진은 사용자의 모습을 원본으로 하여 사진기로 자기 자신의 원본을 복제한 사진을 다시 복제하여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올리게 되는데 실제 싸이월드라는 가상공간을 이루는 것들은 사진을 비롯하여 복제의 복제품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시뮬라크르'이다. 그리고 이런 시뮬라크르를 구성하는 즉 복제의 복제를 새로운 형식의 틀에 짜 맞추어 엄청난 개수의 미니룸을 관리하는 사이트 자체의 구조를 '시뮬라시옹'이라 할 수 있겠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이 두 단어가 가지는 다양한 미학적 철학적 의미들과 그에 따른 해석이 탈근대 미학을 소개하는 미학 오디세이 3을 이루는 거대한 테마이다.


미학 오디세이 3은 이전에 출판되었던 미학 오디세이 1,2권에 연결되어 현대의 탈근대 미학을 해석하는 미학 오디세이 최종편이다. 1권과 2권이 인류역사시대 이전부터 근대까지의 미학적 여행이었다면 3권은 지금 현대의 미학을 정의하고 있다. 중세까지 예술의 역할이 현실의 재현과 재인식을 통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근대까지의 미학은 인간중심의 예술과 다양한 형태로 진리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의 거대한 담론인 가상과 현실사이의 간극은 아직도 확실히 정의되고 있지 않지만 예술이라는 가상의 놀이에서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한다는 일차적인 미학의 개념을 현대에서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존에 생각하던 가상과 현실의 관계는 근래에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근대 미학이 의미 있는 것은 시대의 사조에 맞추어 다양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예술가 나름의 방법으로 진리추구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현대에 들어서서는 이전의 예술보다 훨씬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아졌다. 이는 회화나 조각 등의 제한된 예술양식이 대부분이었던 예전보다 다양한 표현매체가 발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현실을 재현하든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든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형식적인 도구의 진일보는 그만큼 예술작품의 해석에 따르는 어려움을 동반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 매체 중 가장 먼저 예술계를 강타한 것이 사진기술이다. 사진은 고전적으로 현실을 재현하던 회화를 몰락시켰다. 회화는 더 이상 사진만큼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다. 사진 외에도 고전적인 예술 형식을 파괴시킨 많은 미디어매체와 도구들은 쉽게 예를 찾을 수 있다. 이렇듯 기존의 체계들이 전복되고 새로운 문명과 그에 따른 진보적인 기계들,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사상들은 20세기 초 예술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작가들은 급속한 변화에 의해 사라져가고 또 새롭게 다가오며 다시 또 다른 새로움으로 쉴 새 없이 바뀌는 현실을 '절대주의'라는 작품세계로 표현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다시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고....... 현실세계의 이러한 반복에서 그들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말레비치의 그림을 보라. 거기엔 흰 바탕에 검은 십자가 아니면 검은 원, 검은 사각형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예술가들에게 현대의 세계는 그렇게 비가시적인 세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뉴먼의 작품과 연결된다. 캠퍼스에 오직 단색의 바탕색과 수직의 선하나....... 언뜻 보기에 그냥 수직선 하나지만 이 선은 절대주의적 상징인 신과 땅위에 발을 대고 서있는 하찮은 인간과의 조우를 가능케 하는 사다리이다. 즉 인간이 신과 교접할 수 있게 가능성을 열어주는 천상이 계단이다. 수직의 선 하나만이 존재하는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이렇게 신까지 모셔와야하는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의 특징이다. 현대를 더 이상 예술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시대로 해석한다면 블랙홀과 같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절대주의나 혹은 뉴먼의 새로운 숭고미학은 탈근대 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다.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 피라네시가 표현했던 상상속의 감옥과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다양한 건축물을 나타낸 판화에서 작금의 가상 사이버세상이 오버랩 되는 것은 그만큼 피라네시의 표현력과 직관력이 날카로 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교묘한 트릭을 통한 피라네시의 판화 속 건축물들은 2차원적인 평면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 3차원의 현실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건축구조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원형의 교란은 바로 현대 예술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의 감옥에서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현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블랙홀과 같은 절대주의적 표현방법과 단순한 수직선으로 숭고미를 표현한 뉴먼은 그나마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예술가들이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 있다. 공장에서 방금 생산된 변기 하나를 전시실에 옮겨다 놓은 작품이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그냥 종이상자 너덧 개를 전시실에 쌓아 올려놓은 작품이다. 시뮬라크르로 뒤덮인 이 세상의 현실을 뒤샹과 워홀은 말레비치나 뉴먼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증언한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물질문명을 기반으로한 기술복제사회이다. 미디어의 폭발적인 발전과 보급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창조해기에 이르렀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지고 미디어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세상은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예술이 가야 할 길은 더욱 험난해졌고 예술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말레비치나 뉴먼보다 뒤샹과 워홀의 작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한 복제의 복제품인 시뮬라크로로 현실을 표현했던 뒤샹과 워홀의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이제 더 이상의 예술 행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근대예술의 종언을 헤겔이 선언한바 있었지만 이를 비웃듯이 20세기 초 많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차이의 미학으로 예술의 지평을 열었었다. 하지만 가상이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닌 나아가 현실이 가상을 재현하는 지금 예술은 워홀과 뒤샹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맞이했을까?...... 개인적으로 예술의 종언을 쉽사리 인정하기는 꺼림칙하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 발표되는 예술품들은 워홀과 뒤샹을 예술을 복제한 복제품이라고 하지만 언제까지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처럼 예술계가 무한 증식만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본다. 역사 속에서 미학은 이러한 위기를 여러 번 겪었었다. 워홀과 뒤샹의 뒤를 이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 수 있는 예술가는 분명 다시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이것도 동일자의 영겁회귀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미학뿐만 아니라 많은 측면에서 미로에 빠져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 '바벨의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절대적인 한 권의 책을 찾아 미로처럼 복잡한 거대한 도서관을 헤매고 다니듯이 우리는 미학에서도 그랬지만 고도로 발전된 도시문명, 너무도 다양해진 인식과 사고의 틀, 그리고 각종 이데올로기, 매일 엄청난 양으로 우리에게 접해지는 가상공간에서의 다양한 정보들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된다면 우린 이 다양한 미로의 존재조차 망각하며 살게 된다. 거대한 시뮬라시옹 속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미학이 존재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미학 오디세이 3라는 책이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미로속의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매우 복잡한 미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 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대단한 발견의 기쁨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로 속에 있는지 조차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이제 책을 통해 미로를 확인했으니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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