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바꾼 기다림의 리더십 - 독일 최초의 여성 수상이 연출하는 '빈약'의 미학
하요 슈마허 지음, 배인섭 옮김 / 아롬미디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에는 방 하나를 차지한다. 다음에는 두 개, 곧 세 개, 언젠가는 한 층을 점유하고, 결국에는 건물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슬그머니 스며든 불법 점유자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커다란 저항에 부딪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몇 년 전이라면 아직 정치적 재산권으로 여겨졌을 일이 아주 당연하고 합법적인 일이 된다.

앙겔라 메르켈은 불법 점유의 전형적인 순서를 밟아본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남편 울리히 메르켈과 이혼한 이후 베를린 마리엔 가로 옮겨 친구들과 함께 방을 나누어 썼다. 곧 동료들이 거처를 찾아냈다. 마침 비어 있었던 프렌츠라우어베르크의 허름한 거처는 분명 국가 주택공급 관리시스템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메르켈은 그 거처로 옮겨 자신의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했다. 집을 조금 고치고 얼마 지나서는 주택관리청에 월세를 송금했다. 몇 년 후에 재개발 사업을 이유로 모든 세입자들은 새로운 주택을 배정받았고, 그 과정에서 메르켈은 저절로 합법화되었다. 앙겔라 메르켈은 공손한 게릴라의 모습을 지켜나갔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조사 과정을 넘겼다. 메르켈이 사용한 트릭은 단순하다. 계속해서 관습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투입한 비용은 미약했지만 최대의 성공을 얻었다.」 - 본문중에서(p.72~73)


동독출신, 여성, 이혼녀, 개신교도, 물리학자.
빈약과 기다림 그리고 인내와 귀납적으로 분석하기.
최초의 여성 총리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을 이르는 말들이다.

동독출신이자 물리학자라는 정치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카톨릭 성향의 독일 기민당을 제압하고 결국 총리라는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녀가 가진 강력한 무기란게 어찌보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림 바로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서서히 본질을 파고 들어가는 인내심이 거기에 더해진다. 보수성향이 짙은 기민당에서 동독출신의 물리학자의 정치적 성공은 그리 만만치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릴 줄 알았고, 천천히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며 거대한 남성중심의 권력집합체인 정치권력을 서서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게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가며 스스로의 역량을 펼칠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포퓰리즘에 덫에 걸려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는 많은 남성 정치인들과는 차별화된 전략이었다.

그녀가 가진 또 하나의 무기는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한 귀납적 추론 능력이다. 대부분 정치인이 법률이나 정치 혹은 언론관련 학문을 전공한 것과는 달리 메르켈은 탄화수소를 연구한 물리학자였다.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통해 모든 현상들을 이해하고 정립하는 연역적 방식은 많은 법률가 출신 정치가들의 일반적인 사고 방식의 흐름이다. 일의 원칙을 결정한 후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하는 것이 일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요즘과 같이 다양성이 존중받고 그 다양성으로 인해 정치적 생명이 결정되는 시대에 다양한 의견들과 다양한 세력들의 균형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에는 연역적 추론 방식이란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이에 반해 자연과학적 실험주의를 바탕으로 한 귀납적 사고 방식은 모든 사안에 대해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다양한 주장들을 통합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배경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정치에 있어 힘의 균형과 권력의 배분등을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메르켈의 두뇌는 정치적 힘을 단순하게 권력의 연장선에 놓지 않고, 힘과 작용, 상호관계등을 포괄적으로 읽어낸다. 또한 모든 정치적 행동을 실험의 연장에 놓고 최종적인 목표인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탐구한다. 이는 치밀하고 정확한 실험주의자의 모습을 지닌 메르켈의 절대적인 강점이다.

기다림과 인내를 기본으로 한 그녀의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그녀를 정치적으로 성공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메르켈이 단순히 조용하게 기다리고 항상 인내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을 때 그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였던 미국을 지지했었다. 자국과 기민당내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실용을 위한 동맹의 강화를 선택했고 결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통해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즉 확고한 신념이 바탕이 되었을 때, 확실한 의지가 섰을 때 그녀는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아가는 추진력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유대인 관련 연설로 기민당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호만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이든 정치권력이든 장악 할때는 드러나지 않게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일을 진행하지만 일단 결단이 서면 단호한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그녀의 진면목이며, 이전 콜 총리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의 은퇴을 요구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또다른 메르켈의 잠재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보수와 실용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독일의 메르켈은 현재 우리나라 정부와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하지만 현재 우리 정부와 메르켈은 많은 부분 차이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관용과 인내 그리고 적절한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메르켈의 능력이 부러운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가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통해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어 일관된 자세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메르켈의 능력은 약해보이면서도 강한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합의와 협조를 위해 항상 열려있는 세심한 마음은 분명 여성 총리가 지니는 장점이다. 통제보다는 책임있는 자리에 사람들을 중용하는 자세 또한 부드러운 배려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항상 귀를 열어두는 그녀의 자세는 이시대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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