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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로쟈의 ‘번역출판7’에 대하여>
* 직역/의역의 문제 -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로쟈는 번역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주제를 직역과 의역, 그리고 번역자의 권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 예로,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를 잘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고스란히 옮길 것인가? 번역자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로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라는 이희재의 주장을 근거로 직역과 의역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대한 로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입장에선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로쟈는 “그것이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면 반대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한국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며, 이러한 논의는 이미 <우리글 갈고 닦기>(이수열 지음, 한겨레출판, 1999-10-18) 등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좋은 사례로 천병희 선생의 경우를 든다.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서양고전문헌학자인 강대진 박사의 견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희랍인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희랍 원전 표현 그대로 ‘이오카스테의 머리’라는 번역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강대진 박사의 주장을 로쟈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한국어 독자나 관객에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감내케 하거나 오히려 코믹한 느낌이 들게 하지 않을까. ‘머리’의 높임말로 ‘두상(頭上)’을 써서 ‘이오카스테의 두상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해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을 성싶다.”
오히려 이러한 코믹한 느낌은 서양원전의 시대적, 문화적 바탕을 고려해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로 번역을 옮길 때 발생하고 있다. 강대진 박사의 <잔혹한 책읽기>에서도 그 예를 들고 있는 것으로 매우 코믹한 경우이다.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Works and days)>을 ‘작품과 생애’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머리’라는 표현은 고대 희랍의 서사시나 비극 작품이 ‘시’라는 형식의 문학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매우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이해를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오히려 그러한 ‘차이’를 즐길 수 있는 부분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도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으며, 강대진 박사의 민음사 번역본 40행에서는 그대로 번역으로 옮기고 있다.
이것은 로쟈의 오해처럼 한국어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하기 가장 까다로운 ‘시’를 최대한 그 원전의 운율과 의미를 되살려 옮길 수 있는 한국어의 풍부한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의 이해라는 명목으로, 까다로운 시어들에 대한 능통한 한국어 구사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그 시의 특성을 오히려 삭감시키는 표현들을 선택하는 태도는 번역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형성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오히려 무능력을 드러냄으로써 번역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로쟈는 또한 강대진 박사의 ‘존대법’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지나친 서양말에 대한 환대이며 예의에 벗어나는 공손’이라고 평가한다. 원전이 갖는 특수하고 미묘한 차이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을 때, 한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번역자들에게는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말에 대한 ‘비하적 태도’라는 변명을 낳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존대의 태도는 원전에 대한 일차적이고 매우 기본적인 지식과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용감한 ‘잘라먹기’식의 접근이 아니라, 번역자의 권위를 제대로 세울 수 있도록 그 미묘한 차이들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말에 능통한 실력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아름답고 함축적인 시어들을 우리말에서 자유자재로 낚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한국어가 까다로운 외국어로 된 ‘시’를 최대한 그 의미 전달을 놓치지 않을 만큼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언어라는 것을 보여줄 때, 그럴 때에야 비로소 단순한 전달자(헤르메스)에서 “세계의 소음 속에서 의미를 식별할 줄 아는 자”로서의 에반드로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장인, 글쓰기에 능통한 자로서의 번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원전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문화적 바탕과 의미들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기본적인 것이다.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모두가 다 번역할 수는 없으며, 한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야말로 시어를 구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에반드로스로서의 번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용감한 ‘잘라먹기’에 앞서서 겸손한 원전에 대한 ‘공부’를 통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을 위해서 선택하고 잘라버린 시어(詩語)들 때문에 ‘파리스의 사과’를 ‘아담의 사과’로 오인하고 비평하는 코믹한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