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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콘택트 - SF 앤솔러지
김단비 외 지음 / 달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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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와의 조우, 즉 외계 문명과 마주친다 가정했을 때

가장 기대되고 궁금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생김새? 문화? 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양을 넘어서

사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소통 가능성' 아닐까?



지구별 밖의 새로운 존재를 다룬 작품들이야 지천에 널렸다만

이 책에 나오는 미지의 존재들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퍼스트 콘택트>라는 제목에 맞게 외계와의 첫 조우라는 컨셉 아래

8편의 단편들이 모두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관통하는 정서를 나는 다음과 같이 느꼈다


'생각보다 그들에겐 우리가 딱히 중요하지 않다'


.


외계 문명과 맞닥뜨린다고 상상을 해보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대화부터 생각하곤 했다

말이 통할까, 발성 기관이 있을까, 그림으로 이야기 해야 하나 기타 등등


그런데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외계 문명의 입장에서도 인류를 소통할 대상으로 느낄까?


그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일지 공격적일지를 상상하기에 앞서

외계의 존재 또한 인류를 상호작용 할 대상으로 인지할 거라는 전제 자체가

대단한 오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


사실 소통이라는 것도 어느정도 수준이 맞을 때의 이야기이고

이 정도의 문명을 발전시킨 대단한 지성체라는 자신감이 가득가득 차있는

호모 사피엔스 따위는 외계 문명 기준에선 아메바와 비슷한 수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굳이 아메바와의 대화를 시도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현미경 없이는 보이지도 않는데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그 위를 몇 번 밟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미지의 존재들에게 우리는 아직까지 미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굳이 대화든 뭐든 할 필요 자체를 못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씁쓸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슬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나도 인간인 만큼 인간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면을 가지고 있고,

그게 느껴질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리곤 하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부분들에 대해

아주 강렬한 집중치료 극한 처방을 받은 기분이었다


.


SF 장르 또한 인간이 만들어냈기에

당연하게도 그간 인간중심적으로 흘러갔던 모든 서사에서

인간이 완벽하게 배제되는 것이 너무나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 거대한 우주라는 공간에서 새삼스럽게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우주적 관점에서는 인류 또한 그간 인간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존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


이런 것을 보고 느끼면 허탈하고 허망하다기 보다는

너무나 겸손해지고 겸허해진다


작은 생명들이 얼마나 열심히 생애를 살아가는지를 보면 경탄스러울 때가 있는데

우주적 관점에서는 인간도 매한가지 아닐까

아메바에 비하면 인간에게 선택지가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더 고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네 삶도 단순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그저 시작하고 언젠간 끝이 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이 삶을 누려야겠다

미물의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문명의 이기에 찌들지 않게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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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선정되어 현암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정익은 늘 용순의 냉소적인, 그렇지만 어떠한 성찰도 들어있지 않은 태도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적대하는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억울함이 서려있었고 어휘는 어딘가에서 배워오기라도 한 것처럼 제한적이고 상투적이었다.

그들은 우선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인류를 보며 이 정도 기술력으로 이 정도 문명을 이룩했고 그들과 소통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견해했다. ‘대견해하다‘. 그건 퍽 적합한 표현이었다. 그들의 말에서 묻어나는 뉘앙스는 마치 대항해시대에 소위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와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대할 때의 태도나, 키우던 반려동물이 말을 알아들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와 유사했다.

지금껏 인류는 자신들의 미래를 자신이 결정한다는 전제를 믿으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인류의 신세를 망쳐온 것이 대부분 인류 자신이라는 무수한 단서들에서 추출한, 가장 낙관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를 절대로 예측하거나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건 곧 인간이 본인들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이제까지 불가항력은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이 아니면서 더 대단해 보이는, 심지어 의지까지 담긴 불가항력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이 현실을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머지 대부분은 순응하고 체념하는 쪽을 택했다. 신화의 세계가 돌아왔지만 이건 심판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손상에 대한 복구였다.

"외계로 메시지를 보낸다면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많았다. 하지만 같은 시대에, 얼굴을 보고 마주 앉아 같은 한국어로 말을 하는데도 어떤 말들은 결코 통하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의 삶에서 멀어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더라도 기억이 우리를 붙잡아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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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길 잘했어
김원우 지음 / 래빗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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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가 좋은 이유는 밤새 나열해도 끝이 없지만

이 책과 관련된 것을 딱 하나 골라보자면 이렇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다다를 수 없는 미래를 오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그 시간선을 오가는 캐릭터들을 보면서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소설 속 인물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내면

위로가 되기도 하고 거울치료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자해야 그렇지만 사랑은 최고야 하는

모순적 사고를 갖고 사는 데다가 SF 팡인인데


사랑을 동력으로 미래부터 과거까지,

또 우주에서부터 너의 눈동자까지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을 만한 면역은 전무하다


.


언젠간 알고리즘이 낙관적 허무주의 영상으로 이끈 적이 있다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것이고 세상은 종말할 것이다 = 허무주의

그렇다면 흑역사도 언젠간 지워진다 우린 뭐든 할 수 있다! = 낙관적 허무주의


허무주의적 사고가 뇌를 갉아먹는 게 참 무서웠는데

낙관적 허무주의는 현실 기반이면서도 긍정적이라 꽤나 매력적인 것 아닌가!


어차피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면

반대로 그 모든 것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의미를 찾는 삶


<좋아하길 잘했어>는 낙관적 허무주의 그 자체다


.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언젠간 나를 슬프게 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과

끝이 정해져 있어도 똑같이 사랑할 거냐는 의미심장한 물음들이 있다


우리의 삶도 이 세계도 언젠간 끝이 난다는 건 매한가지다

길고 짧음의 차이일 뿐 결국 모든 게 끝으로 수렴하는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건 참으로 서글프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지금 아무리 먹어봤자 곧 다시 배고플 거라고 밥을 굶을 건가?


사랑이 다 소화돼서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할 수 있는 동안 끝내주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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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의 소설과 수현의 편지를 더 길-게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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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리뷰어로 선정되어 래빗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현재까지 상용화된 타임머신은 상상력을 동력으로 하는 인간의 두뇌가 유일하고,

"이 비싸 보이는 크리스마스트리는 뭐예요?"
"시제품이에요."
"뭐의 시제품이요?"
"타임머신이죠."

혁명이라는 단어는 아무 데나 갖다 붙여도 대충 말이 되면서도 맥락에 맞지 않을수록 웃겼다. 무엇보다 그 단어를 내뱉는 것 자체가 강력한 해방감을 줬다.

왜 살려고 하는 행위들은 이렇게 멋이 없을까. 왜 삶이란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기를 파괴하며 곧 죽을 것같이 구는 게 멋있어 보일까.

내 인생은 원하는 것을 좇기보단 참을 수 없는 것에서 멀어지며 여기까지 굴러왔다. 나아가는 게 아닌 밀려나는 삶. 나의 연료는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는 현재에 대한 부정이었다.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패를 끝이 아닌 과정으로 만들 것이다.

사랑. 사랑. 사랑. Q.E.D.

사랑은 가장 게으른 변명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모든 일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랑이라는 핑계는 설득이 필요 없다. 이 만능의 단어는 스위스 군용 칼 같은 면이 있다. 온갖 곳에 유용하지만 그저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 실제로 사용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계획을 짠다는 건 실패를 연습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대결에서 시간의 편에 서길 선택했다. 비록 그게 광폭하게 흘러가는 미지의 시간일 지라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지만, 괜찮다. 짝사랑은 내 전문이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워.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잃을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언젠가는 너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

이 편지가 너를 찾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 물론 집배원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수백만 가지의 재난들이 두려워. 이 편지가 결국 너를 찾아낼까 두려워.

언젠가 내가 너에게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물었을 때 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평생이라고 대답했었지. 나는 여전히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때의 네 대답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만약 우리가 서로의 장례식에 가게 된다면 정말 멋진 일일 거야. 그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친구였다는 뜻이니까. 말 그대로 평생인 거지. 우리 꼭 장례식에서 만나자. 그때까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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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비실
이미예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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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이상한 사람 하나씩은 다 있지 않나요?

특히 탕비실 희한하게 쓰는 사람들


있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럼 본인이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


서바이벌이든 연프든 일반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리얼리티 합숙 프로그램들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요즘

이런 걸 아예 안 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나도 원래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유행을 하든 말든 안 보는 주의였는데 한 번 보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팡인이 됐다

이미 나와있는 것이며 나올 예정인 것까지 수두룩해 그저 즐거움이 끝이 없는 티빙 같은 삶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간 봤던 여러가지 서바이벌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빌런'이다


첫 회차에 나 빌런이요 소리치는 출연자는 거의 없다

합숙한지 며칠 지나고 회차를 거듭할수록 빌런의 씨앗이 보이다가

결국 어떤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 부분이 꼭 화제가 되곤 한다


사람을 가둬놓으면 좀 이상해지나?

아니면 원래 이상했던 사람이 가면을 벗은 건가?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렇게(?) 됐을까?

저 사람은 본인이 이상하다는 걸... 알까?


보통 그런 장면들을 보다보면 위와 같은 의문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익숙하게 보던 사회성을 발휘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빌런의 존재가 너무나도 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발상의 전환으로 싸그리 몽땅 빌런들만 모아놓은 서바이벌은 어떨까


.


나도 알아 내가 이상하다는 거

vs

내가... 이상해?



책에는 크게 나누자면 이 두 부류의 빌런들이 등장하는데 서바이벌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주변에 있는 도무지 이해 안 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봐도 좋다


사람 싫으면 답 없다 퇴사하라는 말이 비일비재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모 아니면 도로 나뉘지 않으니까


이상하고 싫은 사람과 한 공간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어떻게 하면 내가 죽거나 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늘 하루 무탈히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작은 꿀팁 정도?


미지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시스루 괴물을 상대하는 게 더 쉬우니까


그런데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끝까지 다 보고 나니까 일본 영화 괴물을 보고나서 떠올랐던 의문이 들기도 했다


.


서바이벌은 결국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시스템인데

사실상 프로그램을 쭉 보다 보면 우승을 누가 했고 최종 커플은 누가 됐고 뭐 이런 마무리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누가 됐든 결국 정해진 결말이라 어쩐지 김이 빠지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달려가는 내내 보여주는 과정들인데 바로 이 부분을 책에서 아주 정확하게 캐치해서 보여준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최소 일주일은 촬영하고 다회차로 편성이 되니까 호기심에 다가온 뉴비들도 회차에서부터 진입장벽을 느끼곤 한다


도대체 그런 걸 왜 만들고 왜 보는 건지 궁금해도

그 긴긴 시간을 들여 직접 체험하고 싶지는 않고

쇼츠로 봐도 앞뒤 서사 모르니 이해도 안 되고

어디서 살짝 제대로 찍먹해볼 수는 없나 두리번거렸다면


한 시간 내로 털어낼 수 있는 얇은 볼륨

하지만 담긴 내용은 인류사 다큐 그 자체


일반인 리얼리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 책

심지어 <달러구트 꿈 백화점> 작가님의 신작인 이 책!

<탕비실>을 강력 추천한다


오락성만 짙을 거라 생각하고 펼쳤던 책을 보며 좋은 측면으로 여러가지 환기도 하게 된 뜻깊었던 독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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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선정되어 한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나는 살면서 싫어하는 사람을 더 알아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쉽지만 정말로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건 어렵다. 나는 이 게임이 단순히 탕비실에서 열리는 진상 콘테스트가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출연자들의 광기는 목요일 아침에 절정에 달했다.

낮의 공용 공간에 한밤 중에 혼자 있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감점을 너무 크게 당하면 가산점은 있으나 마나한 거예요."

내 얼굴엔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지만, 그건 편집자의 관심 밖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의 시선에서는 사소한 배경으로 뭉뚱그려질 뿐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무게가 드러나지 않음에 감사하면서도, 그간 봐왔던 수많은 방송들 속에서 나는 과연 보려고 마음먹은 것을 본 건지, 누군가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덥석 건네받았을 뿐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등장하는 인물 중 그 누구도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받은 적 없고,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우리가 그저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흔히 그러하듯이.

좋은 싫든 이유를 알면 좋으련만, 영문을 모른 채 싫은 사람으로 낙인찍힌 주인공은 줄곧 ‘내가 왜 싫은지‘를 생각한다. 그만한 지옥이 없다.

우리 모두는 이들을 조금씩 닮아 있다. 삶에서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삶을 어떻게 대하느냐뿐이라고 했던가. 싫어하는 대상의 기분을 한 번쯤은 상상해보는 것. 나는 단지 그 정도로 싫음을 대하기로 했을 뿐이다. 그러고 나서 늘 토하듯 뿜어냈던 싫음의 감정이 얼굴은 찌푸려질지언정 조금은 소화가 되었다고, 단지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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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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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이고도 달큼한 길티 플레저

번지르르한 칭찬 스티커가 붙은 오렌지를 푹! 찌르는 빵칼의 반란

그 스티커에는 "You nailed it"이라고 적혀 있겠지


용도에 맞지 않는다고 못 쓰는 건 아니지요

빵칼로도 오렌지를 공격할 수는 있습니다


오렌지가 먼저 시큼하게 굴었잖아요

참다 참다 반격한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그런데...

참은 걸까 외면한 걸까?


.


총 170여 페이지의 얇디얇은 책 한 권을 보면서

이렇게나 동공이 많이 흔들려도 되는 걸까

이렇게나 감정에 동요가 많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간만에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인상 깊은 문장을 품고 있어 모서리를 빼곡하게 다 접어둔 책이 등장했다


초반에는 신도시 유치원 교사인 주인공의 하이퍼 리얼리즘 번아웃 일과를 보여주는 일상 소설인 줄 알았다

첫장부터 문장들이 굉장하긴 했다만 내용은 평이했다는 것


그러다 후반으로 갈수록 휘몰아치는 스토리와 광기에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조차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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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서 떠오른 작품 리스트들은 아래와 같다


<가여운 것들>, <시계태엽 오렌지>, <더 에이트 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악은 태어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

절제와 통제만이 곧 행복을 만드는 걸까

위선자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떠올라 생각이 많아졌다


귀여운 제목에 그렇지 않은 내용

짜릿하고 강렬하며 파격적인 경험 아주 아주 귀하다


가제본이라 작품 후기가 빠져 있었는데 본편 편집과 후기가 궁금해서 서점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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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선정되어 동아시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자유가 우릴 추하게 만든다.

은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람을 미워했다. 나 또한 그런 은주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은주를 증오한다.

나는 내 발로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내 의지로, 내 행동으로 초래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자초‘라고 부르지요.

어떤 침묵은 어떤 발언보다 더 효율적인 법이다.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빗겨 갔다.

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애인아, 내가 만약 너라는 인간마저도 싫어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쓸모없는 짓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을 예측하는 지금의 끔찍함.

애정과 배척이란 인간의 눈에서 탄생하는 쌍둥이였다.

은주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부조리한 사회도 사랑하고 어긋나는 균열도 사랑하고. 비난과 염세와 절망과 좌절까지 사랑하고. 혹은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그토록 소중히 지켜왔던 ‘통제‘란 내게 무엇이었나. 그것이 내 세계의 종교였다면 자유는 내 세계의 구세주였다.

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거대하고 추악한 악행을 하자.

부끄러운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렇다면 추한 여자 또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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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발진 안전가옥 오리지널 37
서귤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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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칭찬) 이야기의 시작을 목도하다

둘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첫 출근하자마자 플러팅 갈기는 상사 어떤데

허공에 뽀뽀 갈기기는 기본

눈꺼풀에 있는 점 위치까지 알아보고 주인공이 한 말이라면

단 한 마디도 안 놓치고 모조리 기억하는 상사 어떤데


그런데... 둘 다 여자라면 어쩔래


내가 다른 사람이랑 연애했으면 좋겠냐고 묻는

박찬욱의 아가씨가 오버랩되는 대사를 치는 여자들 어쩔래!


어쩌긴 어쩌겠어

감사하게 밥그릇 들이밀면서 더 달라고 해야지

더 말아주세요 더 더 more more

여기 허위매물 아니고 진짜 사랑 맛집이에요


역시 믿고 보는 안전가옥


.


사실 처음엔 캐릭터 진입장벽이 좀 있었다


미모로 커버가 안 될 아재개그를 시도때도 없이 치는,

사슴처럼 생겨놓고 2024년에 방가방가를 쓰는 탐정 상사

(사슴인 줄 알았더니 고라니)


그렇다고 주인공이 멀쩡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탐정사무소 동료는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그는 개발자 출신 특유의 ptsd가 극심해보였다


악역은 정상적인가? 그럴리가


하지만 다 보고 나면 진입장벽 그게 뭔데

이미 모두에게 입덕한지 오래야

원래 좀 이상한 애들한테 빠지면 더 답이 없는 법


이 와중에 문체도 보통이 아니다

표현들이 어찌나 신박한지 고난이도 비문학보다도 집중해서 봐야 한다

잠깐 정신줄 놓으면 분명 한 문장인데

저 먼 안드로메다까지 다녀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진지했다가 웃겼다가 정신을 못 차리게 해


정상, 멀쩡, 평범, 평균 이런 단어들과의 거리가

2억 광년 정도 떨어져있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 소설


심지어 탐정수사극인 줄 알았던 장르는

후반부에 이르러 대차게 반전을 준다

꼭 작품의 제목처럼 브레이크 없이 뻗어나가는데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면서 이래도 되나 싶고

사랑, 도덕, 신뢰, 이타심 기타 등등 온갖 감정이 한데 버무려져

비유적으로도 실제로도 펑- 하고 터져버리는

미친 속도감의 작품


장르도 캐릭터도 내용도 결말도!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이니까

제발 영상으로 나와줬으면 좋겠다


.


필명만 알고 있었던 서귤 작가의 글을 이번에 처음 읽어봤는데

독특한 문체가 중독적이라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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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안전가옥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외톨이는 말이야, 이래서 문제야. 한 방울의 호의에도 마치 바다에라도 빠진 것처럼 푹 잠겨버린다고.

"너랑 있을 땐 괜찮아."

이번에야말로 비상이야, 비상.

"당신도 있잖아요."

"죽이고 싶은 사람들."

박민성은 몰랐던 거지. 세상에 절대 변하지 않는 악인이 존재한다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인생 최대의 악행이 게임 중 욕설인 사람이니 주변에도 다 비슷비슷한 부류들만 있었을 거야. 순진하지만, 아마도 그게 박민성이 가진 선함의 원천이었을 거고.

"현성 매니저님이랑 연애할까요?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랑?"

곽재영이 사슴 같은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어.

"다른 사람 말고."

고주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지도 모르고.

"정현성 같은 사람 말고. 좋은 사람이랑 연애하면 좋겠어."

살아야 해서 다급하게 붙잡는 동아줄 같은 관계도 사랑일 수 있을까.

뭐, 사랑이 아닐 건 또 뭐야.

그때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우리의 결말이?

어휴, 참 쓸데없다. 이런 가정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악당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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