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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굴욕적이고도 달큼한 길티 플레저
번지르르한 칭찬 스티커가 붙은 오렌지를 푹! 찌르는 빵칼의 반란
그 스티커에는 "You nailed it"이라고 적혀 있겠지
용도에 맞지 않는다고 못 쓰는 건 아니지요
빵칼로도 오렌지를 공격할 수는 있습니다
오렌지가 먼저 시큼하게 굴었잖아요
참다 참다 반격한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그런데...
참은 걸까 외면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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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70여 페이지의 얇디얇은 책 한 권을 보면서
이렇게나 동공이 많이 흔들려도 되는 걸까
이렇게나 감정에 동요가 많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간만에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인상 깊은 문장을 품고 있어 모서리를 빼곡하게 다 접어둔 책이 등장했다
초반에는 신도시 유치원 교사인 주인공의 하이퍼 리얼리즘 번아웃 일과를 보여주는 일상 소설인 줄 알았다
첫장부터 문장들이 굉장하긴 했다만 내용은 평이했다는 것
그러다 후반으로 갈수록 휘몰아치는 스토리와 광기에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조차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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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서 떠오른 작품 리스트들은 아래와 같다
<가여운 것들>, <시계태엽 오렌지>, <더 에이트 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악은 태어나는 걸까 만들어지는 걸까
절제와 통제만이 곧 행복을 만드는 걸까
위선자를 도덕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떠올라 생각이 많아졌다
귀여운 제목에 그렇지 않은 내용
짜릿하고 강렬하며 파격적인 경험 아주 아주 귀하다
가제본이라 작품 후기가 빠져 있었는데 본편 편집과 후기가 궁금해서 서점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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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선정되어 동아시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은주는 사람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람을 미워했다. 나 또한 그런 은주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은주를 증오한다.
나는 내 발로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내 의지로, 내 행동으로 초래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자초‘라고 부르지요.
어떤 침묵은 어떤 발언보다 더 효율적인 법이다.
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애인아, 내가 만약 너라는 인간마저도 싫어하고 있다면 어떨 것 같아?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쓸모없는 짓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을 예측하는 지금의 끔찍함.
애정과 배척이란 인간의 눈에서 탄생하는 쌍둥이였다.
은주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부조리한 사회도 사랑하고 어긋나는 균열도 사랑하고. 비난과 염세와 절망과 좌절까지 사랑하고. 혹은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그토록 소중히 지켜왔던 ‘통제‘란 내게 무엇이었나. 그것이 내 세계의 종교였다면 자유는 내 세계의 구세주였다.
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
부끄러운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렇다면 추한 여자 또한 태어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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