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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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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김영사

어린 시절 유난히 좋아하던 책이 몇권 있었다. 내 방 책장 가장 손이 잘 닿는 칸에 꽂아놓고 틈날 때마다 꺼내 보던 너덜너덜한 책들. 그 중 한 권이 ‘창가의 토토’였다. 열심히 보던 와중에도 예쁜 그림이 있는 표지가 상할까 책장에 조심조심 꽂았던 기억이 있다.


뭐가 그리 재미있었을까? 그 땐 단순히 토토가 다니는 '도모에 학교’가 참 즐거워보였던 것 같다. 땅에서 자라난 교문이 있고, 못 쓰게 된 여섯 량 전철로 만든 교실에 삼삼오오 모여 각자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점심에는 산에서 난 것과 바다에서 난 것을 나눠먹으며,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최선을 다해 뛰어노는 도모에 학교 어린이들. 자유로운 환경과, 사랑스런 친구들, 그리고 어린이의 말에도 귀기울여주는 멋진 선생님까지. 나의 초등학교 시절도 지금 돌이켜보면 크게 나쁜 구석은 없었으나, 언제나 도모에 학교에서의 '존중받는 어린이의 삶'을 참 동경했던 것 같다. 


사실 토토의 일상은 당시 시대 배경을 생각해보면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학교도 학교지만, 부모님이나 주변 환경만 해도 토토가 올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게 이끌어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으로 가득하다. 불합리한 질서와 차별도, 위선과 강요도 없는 곳. 나는 '창가의 토토'가 실존 인물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그래서 토토는 마음껏 말하고 노래하고 꿈꾸는,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구나. 진심으로 '함께하는 법'을 아는, 깊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구나. 토토, 그러니까 구로야나기 테츠코는 그렇게 멋진 어른이 되어 현재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민 MC 및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잔뜩 사랑받은 만큼, 지금까지도 모든 일본인에게 사랑받는, 그리고 그만큼의 사랑을 베풀고도 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이쯤에서 딱 2를 곱하면 지금의 나이가 된다. 새로 나온 개정판을 들고 읽고 있는 나는 도모에학교가 마치 나의 오래전 모교처럼 그립다. 그 때와 많은 것이 변했지만, 솔직하고 담담한 토토와 도모에 학교의 이야기는 변함없이 여전하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 그 토토의 마음을 절반, 고바야시 선생님의 마음을 절반, 딱 반반씩 공감하며 '창가의 토토'를 다시 읽었다. '넌 정말 착한 아이구나'라는 말을 듣고도 싶고, 그 말을 누군가에게 해주고도 싶다. 나의 말을 세시간이고 네시간이고 들어줄 단단한 버팀목이 필요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버팀목이 되어주고도 싶다.


+

표지의 일러스트가 토토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 아닌 이미 그려져있던 이와사키 치히로의 일러스트를 쓴 것을 이제야 알았다. 어떻게 이리도 예쁘고 잘어울릴까? 토토의 투명한 두 눈이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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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 율리와 타쿠의 89일 그림일기
배율.진유탁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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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서는 천천히 걸을 것>

배율,진유탁

김영사


아, 어쩌나. 여행 가고 싶다. 언제 떠날 수 있을지 모르니 늘 가방에 여권을 넣고 다닌다던 어떤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큰 고민 없이 가방만 대충 챙겨 당장 떠나고 싶다.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 그러니까 설렘과 긴장 사이에서 느껴지는 ‘낯선 여유로움’이 책 속 모든 그림과 단어 사이에서 넘실거린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 중에서 가장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무언가를 딱히 달가워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나에게 여행은 절대 휴식일 수 없었다. 물론 아름다운 경관과 미술품들, 음악과 이야기들은 좋은 영감이 되었지만 매번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마음 한 켠에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남았다. 비행기 좌석에 모로 누워 고민해 보고 있노라면 아, 그래, 나는 부지런히 찾아가는 여행을 싫어하는구나-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나를 찾아오는 여행이라면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에 닿았다.

이런 나에게 <치앙마이에서 천천히 걸을 것>은 마치 나의 마음을 누군가가 대필해준 책처럼 느껴졌다. 내가 걷는 곳에 나른히 불어오는 바람같이, 늘 함께 있었던 비슷한 온도의 공기같이, 어느새 찾아오는 풍경들, 노래들, 사람들. 내가 추구하는 여행의 형태이다. 나는 이걸 ‘게으른 여행’이라고 부른다. 나이브함의 끝을 달리는 여행.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보지 못한 관광지도 많을 것이고, 먹지 못한 맛집도, 그럴듯한 기념사진도 찍기 어려울 테지.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내가 별난 부류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여행객도 있다고 생각해주시길’이라는 문장을 발견한 이후로 나의 치밀하지 못한 여행을 사랑하기로 했다.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는 다른 소라게보다 성장이 빠르다. 나는 딱 맞는 껍데기를 찾은 소라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82p


“자고, 먹고, 일하고. 더불어 놀고, 운동하는 일상들이 작은 병정 무리마냥 착,착,착, 줄지어 간다. 에너지가 넘치는 여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익숙했던 일상도 아닌, 딱 그 중간쯤 되는 생활. 별 것도 아니면서 가끔은 새로 발견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들이 하루를 채우는 날들. 내가 알기론, 바로 그런 걸 ‘평화로운 날들’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116p


사실 요즘 비슷한 분위기의 여행 에세이를 많이 접했다 보니 책의 초반부까지는 크게 인상적인 부분이 없었다. 인스타툰, 글, 사진들이 어떤 날의 일상을 재잘재잘 말하는 조금은 성긴 구성. 하지만 한 장씩 읽어나갈 때마다 어쩐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마음에 쏙 들었다. ‘맞아, 이런 기분이지!’ 공감 가는 구석이 많았다. 꼼꼼히 기록된 타인의 여행에서 이런 공감대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글이 꾸며진 여행기가 아닌 담백한 일기였기 때문이다. 치앙마이에서 무엇을 봐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하 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여행정보는 없더라도, 여행지에서의 기분, 감정, 마음, 대화, 웃음, 평화, 여유같은 것이 가득하다. 가본 적도 없는 치앙마이가 괜스레 그리운 것도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나면, 나도 노마드가 되어 어딘가를 떠돌고 싶다. 목적지 리스트에 치앙마이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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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
고든 마리노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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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요즘. 매순간이 어렵고 뜬 눈으로 만나는 새벽이 당연했다. 어느새 밝아오는 아침은 끔찍하리만큼 싫었고.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몸은 급류에 휩쓸려 진흙탕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이유를 시시콜콜 말할 수는 없지만 (남이 듣기엔 재미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나쁜 일상을 보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나로 존재하는 용기'라는 이 책의 제목이 어찌나 부담스러운지. 이 책이 내가 가야할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면, 나는 이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불편함이 들었다. '불안'과 '우울'을 논하는 글들을 체하지 않고 소화시킬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겨우 넘겼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아주 온화하게 실존주의를 논한다. 넌 행복할 수 있어, 라고 은글슬쩍 강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우울과 불안을 내가 겪어야할 당연한 것으로 단정짓지도 않는다. 힘들 땐 항우울제가 도움이 된다는 솔직한 실존주의자는 그저 다양한 '극복'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 모든 방법들은 결국 나의 내면을 직시하는 법으로 귀결된다. 삶의 매 순간은 나 자신의 선택이고, 나 자신의 의도이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던지 어쨌든 우리는 이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의 부제인 '진실한 삶을 위한 실존주의적 처방'과 같이, 작가는 키르케고 포함 여러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삶 속의 수많은 틈들을 메울 수 있도록 독자에게 처방을 내린다. 이는 꽤 실용적이다.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 단어들은 아주 가깝고도 멀며 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 괴로운 과정들이 인간 본성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부족한 것을 파악하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집중하기. 나의 부족함을 부정하지 말고, 너무 미워하지 말기.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해도, 너무 슬퍼하지 말기. 이렇게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니까. 나는 아주 착실하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실존주의, 더 나아가 (따뜻한)허무주의를 좋아하는 편이다. 억지스런 이상과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달콤한 말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진정성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란 괴롭기 그지없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임은 틀림없다. 우울과 절망을 혼동하지 않고, 나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쓰디쓴 후회를 통해 더 나은 나를 만나기. 절대 쉽지 않겠지만, 일단 마음을 먹는 것 만으로 하지만 오늘을 참아내는데에 약간의 도움이 된다. 마음에 드는 논리, 개념, 구절만 쏙쏙 골라 나만의 철학을 만들었다. 과거의 우울이 어느새 그림이 되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 과 같이,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어려움 또한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고.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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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게, 메뚜기, 불가사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 - 생김새의 생물학
모토카와 다쓰오 지음, 장경환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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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와 가깝지 않은 것들이 흥미로울 때가 있다. 아주 이따금씩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진다. 특히 충동은 서점의 과학 서적 코너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평소엔 눈여겨 본적 없던 생물, 탐사, 진화, 실험과 같은 단어들이 갑자기 반짝여보인다. 그럴 아는 하나 없는 분야일지라도, 괜히 덥썩 집어들어 구매하는 것이다. 얼마전엔 그렇게 구매했던 조류학자 가와카미 가즈토의조류학자라고 새를 좋아하는 아닙니다만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이번엔, ‘성게, 메뚜기, 불가사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또한 제목부터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성게, 메뚜기, 불가사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 일본의 동물생리학자모토카와 다쓰오교수가 집필한 책이다. 사실 모토카와 다쓰오의 책을 이전에 읽어본 적이 있다.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이라는 다쓰오 교수의 대표작이었는데, 때도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코끼리와 라는 이유로 꺼내 들어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동물의 크기가 다르면, 그들의 경험하는 시간의 속도 또한 다르다는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해석한 내용으로, 나와 다른 동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지, 그들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있었던 멋진 글이었다. 


성게, 메뚜기, 불가사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 동물들의생김새 집중한다. 모든 동물은 각기 다른 구조를 지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산다. 저자는 동물들의 몸구조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들의 독자적이고 다채로운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동물을 분류하는 34가지의 (생물 분류 단위 하나) 대표적인 자포동물문, 절지동물문, 연체동물문, 극피동물문, 척삭동물문을 위주로, 특히 그중에서도 저렇게 생겼지?’ 하고 한번쯤은 생각해봤을 법한흐물흐물무척추동물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꿈틀꿈틀 유쾌하지 않은 인상의 곤충, 살아는 있는건지 의심이 될정도로 기묘한 형태의 연체 동물, 아주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바다동물, 1초에 수백번 진동하는 얇은 날개... 동물들의 괴상한 생김새는 모두환경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한 진화에서 왔다. 진화는 생물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일어난다. 책을 통해 동물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 살펴보니 변화 과정이 아주 역동적이고 신비롭다. 같은 생활 환경에서도 다른 전략을 선택해 살아남는 . 누구는 빨리 달리고, 누구는 느리게 달리며, 어떤 동물은 단단한 갑옷을 입고, 어떤 동물은 부드러운 몸을 하고 틈새로 숨어든다니. 동물들이살아남는 방법 그저 처절하고 숨가쁜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수학적 원리를 몸으로 끌어안고 조금씩 변화해가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단계의 연속이었다. 


사실 책의 모든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는, 요구되는 생물 관련 지식이 광범위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친절한 과학자인 저자는 일러스트와 같은 시각자료, 심지어 직접 만든 노래까지 곁들여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단순하게 그려진 모식도는 동물의 신체 부위를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으며, 용수철, 로켓과 같은 구조에 비유하며 자세히 묘사하니 처음 보는 동물의 구조더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있다. 장의 끝마다 실려있는 동물 찬가는 정말사랑스러움 자체인데, 1절은 기본이고 4절까지 이어지는 귀엽고 재치있는 가사를 보고 있자면 저자가 얼마나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은지 눈에 읽힌다.


극피동물문 챕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해삼 천국 가사를 보라. 


보지도 않고, 귀도 코도 없단다- 근육은 있다지만 아주 적단다- 

보고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래도 해삼이 동물일까요-? 

어떻게 이렇게 있을까요, 왠지 전혀 수가 없어요- 

그런 걱정 전혀 없어요-  에너지절약 챔피언 야호! 

모래 먹고 사는 우리들의 , 모래 씹어먹는 우리들의 -

세상의 생활같지 않아 행복해, 모래를 먹고 먹고 모래 먹고 먹고- 

여기가 바로 바로 해삼 천국이라네, 여기가 바로바로 해삼 파라다이스라네-!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모든 동물들, 각각의 개체들의 살아가는 삶은 이토록 경의롭고 멋지다. 그들의 삶들을 훑어가다보면, 전작인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같이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한발짝 물러서게 해준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저들은 저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위치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버텨내고 있다. 충분히 , 살아가고 있다.



p.s. 멍게, 해삼, 성게, 이제 너희들을 먹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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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는 뇌 상식사전
이케가야 유지 지음, 박소현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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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편향' 퀴즈쇼 - 착각하는 뇌 상식사전

우디 앨런의 <섹스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내 머리 속에서도 작은 인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분홍색 관제센터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일 것이다. 무한한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고,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테니, 정말 극한 직업이 따로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가끔 저지르는 바보 같은 실수도 이해해줄 만하다. 단결력과 협동심으로 똘똘 뭉친 팀이라도 손발이 맞지 않을 때가 있으니. 인식과 사실에 차이가 발생해도, 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착각에 빠져 나머지 일을 수행한다. 어떤 상황에 대하여 직감적으로 해석하고 판단을 내려도 내가 지금껏 겪었던 케이스만을 분석해 내놓은 결과이기 때문에, 틀린 답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 속 작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팀워크에 고취되어 오류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즉, 일상 속에서 숱하게 접하는 판단 오류는, 뇌의 귀여운 실수로 일어나게 된다.


'인지 편향'. 인간의 뇌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려고 최적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버그'이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동안 일종의 '습관'이나 '버릇', '취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이 습성들은 하나의 관계망을 구축해 나만의 '뇌 사용법'을 만들어낸다. 이 비합리적이고 요상한 시스템은, 일상 속에서 꽤나 큰 역할을 한다. 결정과 판단의 순간 이 시스템이 발동하면 우리는 '촉이 왔다'고 말하고, 내 머리 속에서 가장 그럴듯한 경우의 수를 선택해 결정을 내린다. 실제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때도 많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져내린다.

이 책은 그런 인지 편향, 일상 속의 착각을 수십개의 샘플로 아카이빙했다. 대표적인 인지 편향 80 항목을 퀴즈 형태로 풀어볼 수 있다. 몇몇 퀴즈들은 말그대로 '편견'적 시각이 느껴져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읽다보니 작가의 연구 의도가 점차 선명해졌다. 문제를 하나씩 풀어갈수록, 지금껏 꽤 친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뇌와 조금 서먹해지게 된다. 이 녀석, 생각보다 실수가 잦다. 즉흥적인 선택 뿐만 아니라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에도 어리석은 판단 오류가 자리한다. 심지어 자존심도 강해, 틀린 결정에도 그럴 듯한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착각, 착시, 오류, 실수, 자기합리화. '논리'와 '이성'과는 거리가 먼 뇌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나의 일상이 이토록 편견 투성이었다니. 이제 좀 더 느긋하고 꼼꼼한 생각의 단계를 거쳐 행동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러다보면 작가의 말대로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의 반은 머리 속 작은 뇌의 계략이니까. 나를 그리고 타인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진다. 이젠 더이상 뇌에게 속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해봤자 무용지물일테니- 그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각하다는 사실만 가슴 깊이에 새겨본다. 그 것만으로 충분하다.

덧붙이기 -

80개의 퀴즈 이외에도 50가지의 착시 오류 용어가 정리되어 있는데, 이 착시현상들이 모두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재미있었다. '루빈의 꽃병' 착시, '악마의 포크', '헤르만 격자' 착시... 오랜만에 눈의 초점을 풀어가며 착시 현상 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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