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머레이의 하늘문을 여는 기도
앤드류 머레이 지음, 임종원 옮김 / 프리셉트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1세기 초 그러니까 1900년 초반이 씌어진 책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검색한 정보에 의하면 19c말~ 20c초반 영국출신 기독교 영성 활동가이며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1900년으로 접어들면서 서구 기독교가 쇠락하기 시작한다. 1800년대 있었던 각종 집회, 세미나를 통해 기독교의 부흥와 초기 교회의 신실함으로 돌아가는 그의 생각이 정리된다. 

저자 앤드류 머레이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는 1828년 남아프리카의 그라프 라이넛에서 출생했다. 스코틀랜드의 에버진대학교와 네덜란드의 우드레이드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1848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개혁교회의 지도자로 남아프리카 선교에 힘썼다. 그는 1877년에 웰링턴 선교대학을 세워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1895년의 케직 사경회와 노스필드 사경회 등의 강의로 영국과 미국의 많은 성도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세기 네덜란드개혁교회의 가장 유력한 인물로서 국제적인 신망을 얻은 복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개혁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성령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신학은 장로교와 감리교, 오순절 교회 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약 240편의 주옥 같은 글들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과 기도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저서는 신앙의 정수(精髓)를 일목요연하게 해설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앤드류 머레이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기에 더욱 깊이가 있다.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앤드류 머레이의 삶과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책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4753785'


 

필자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불교같은 타 종교에 비해 대다수의 비기독교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 너무 남들에게 보이는 행동과 눈에 띄게 팽창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으로 생각했다. 특히나 같은 기독교 종파(개신교중에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인 천주교와 비교해서도 거의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나 종교지도자 중에 밖으로 보이는 교회의 규모 공동체의 건물, 교회의 크기나 디자인에 신경쓰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그런 왜곡된 생각들이 그대로 신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과연 밖으로 보이는 집회나. 공동체의 크기가 부흥을 증거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자라면 개인 각자가 부활을 꿈을 꾸며 사는 것이 본질이 아닐까?

하느님을 믿고 부활을 위해 우리가 할 일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교류가 아닌가? 나와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류, 그것을 통해 늘 새로운 믿음과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기독교인의 자세이다. 그리고 자신의 구한 후 주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주님과의 교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기도이다.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그 분의 뜻이 무엇인가 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뭔가 이루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위급의 상황에서 나를 구할 수 있지만 하느님와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런 이기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본질적인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기도하며 그분의 뜻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기도이다.  무엇을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와는 달리 그분과의 진지한 대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 기도는 대와 그 분과의 매우 개인적(?)인 행위이다. 기도를 위해 여럿이 모일 필요도 없고 남에 대 기도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기도는 골방에서 하는 것이다.   

대규모 부흥회나 기도회. 예배등은 결국 개인의 영성을 돕고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에 잘 사용되는 도구이지만 하느님의 대화인 기도를 위한 모임은 결코 아니다. 그런 모임에서 은혜를 받고 하느님과의 대화중에 응답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대규모 모임에서 일방적인 기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분과의 대화가 다 된거란 생각은 문제가 있다.

주일예배나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회에서 몇 시간을 기도한다고 해도 하느님과 나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집회 중에서도 개인적 대화는 가능하다. 분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골방에서 1:1로 하는 대화와 군중 가운데서 하는 대화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기도하지 않는 죄


저자는 기도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또 하나의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까지 한다.
아무리 집회에 열심이라도 기도가 빠지고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죄에 대해 속량을 받으러 와서 불경의 죄를 짓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저 우리 뜻을 들어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면 잘못을 따져서 혼을 내는 존재도 아니다. 영생의 단 열매를 주더라도 본인에 맘에 드는 자녀에게만 그 열매를 주시는데 그 뜻은 인간이 바로 알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반드시 그 분에게 묻고 답을 얻어야 한다. 묻고 뜻을 듣는 과정이 바로 기도이다. 매우 개인적인 그 분과의 대화 만이 그 분의 뜻을 알고 그분이 주는 열매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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