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평전 - 복수의 정치학
사이드 K. 아부리쉬 지음, 박수철 옮김 / 도서출판 자전거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저자, 사이드 K. 아부리쉬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이 책을 이라크의 고통받는 어린이들에게 마친다.
나는 겸허하게 경의를 표하여 너희들의 옷자락에 입을 맞춘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매일 밤 눈물을 흘린다.
이 것은 저자가 이책을 쓰면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며 느낀 감정을 고백한 것이다.

저자가 책 앞과 본문중에도 자주 이야기 하지만 아부리쉬는 아랍 출신으로 영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는 사람이며 서방에 적을 둔 아랍인이라는 장점으로 후세인의 대화창구를 맏은 에이전트들 중에 하나이다. 아부라쉬 이외에도 수백명의 에이전트들이 후세인의 손발, 눈과 귀가 되어서 서방과 이라크를 연결했다. 

이미 알려진대로 후세인 통치하여 이라크는 매우 페세된 사회였고 서방의 제제조치에 따라 후세인 말기에는 봉인된 국가였다.

또 후세인은 그의 제멋대로인 정책과 매우 사적인 국가운영으로 다른 국가와의 직접 소통이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에이전트가 꼭 필요했다. 또 다른 국가들, 전인류가 원치 않던 이들은 꾸미다 보니 대리인 꼭 필요했다. 

 

이들 대리인들이 정상적인 이성과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임에도 후세인을 도왔던 이유에는 돈이외 어떤 이상 때문이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어찌보면 변명으로도 들리지만 그들이 후세인이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에는 제국주의 수준으로 아랍을 쥐고 흔들려고 하는 영국과 미국의 압제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후세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글르 돕는 것이 아랍을 미제국주의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매우 고무적인 생각을 가졌었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개인 생각일 것이다. 대부분이 돈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초창기 이들이 보기에도 후세인은 속을 알수 없는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어찌 되었건 이들의 도움으로 후세인은 부도덕하고 반인류적이며 정신병에 가까운 괴물이 되어간다.
 


 
미국과 영국의 이중생활 

영국과 미국은 결국 후세인을 축출하고야 만다.
그런데 이들은 20세기 초부터 이라크에 대해서 비 이성적인 정책을 퍼고 그 결과 엉뚱하게 진행이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후세인이 어떤 인물인가를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미국과 영국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정책으로 이라크와 후세인을 오염시켰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라크는 고대의 문명 발상지로  바그다드난 아주 오래된 문화유산과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인류 최고의 문화를 발생시킨 곳이다.

또 오랜 세월 여러 민족의 지배하에서도 잘 견디고 후세인 집권 시절에도 아랍민족의 대표를 자처하던 나라이다.

그런데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이 오스만에게서 뺴앗은 이라크를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식민지 경영자체가 문제이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아랍 민족의 특성상 실리보다는 체면을 중시하는 것등에 대해 무지한 서방세력은 식민지 운영의 편의를 위해 엘리트 계층인 수니파의 일부를 허수아비를 세운다. 이는 오스만이 이라크를 지배하면서 매수한 계층인데 영국도 그것을 답보한다. 이것은 마치 미국인 한국을 군정하는 기간에 일본에 충성한 관료나 기득권층을 대거 영입하면서 실리를 취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당장에 운영에서는 편리했는지 몰라고 오랜 분쟁의 씨. 즉 다수인 시아파를 소수의 수니파가 지배하는 불안정한 구조로 인해 이후 계속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좀 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슬람 윈리주의인 시아파는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기반을 두었기 떄문에 국가보다는 같은 이슬람 민족들간의 통일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국가 권력의 수립이나 이교도인 서방의 개입은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잇었다. 이에 반해 수니파는 소위 실리적인 노선으로 종교보다는 국가라는 체제와 부자이고 발달된 서방의 도움이라도 받아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사고를 가졌다. 또 수니파는 민족이나 종교보다는 자신들의 군력 쟁취가 더 시급했다. 권력이 없다는 소수인 자신들은 제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서방, 딱 꼬집어 미국과 그의 추종인 영국은 이라크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석유의 확보를 위해 쉬운 방법으로 이라크 문제에 접근한 것이다. 이런 멍청한 정책은 대륙 건너편의 한반도와 일본, 동남아시아, 남미에서도 그대로 재현이 된 것들이다.

서방이 아랍과의 이익을 취하려고 보다 신중한 접근을 취하고 상호 존중의 정신을 가졌다면 그들의 민족성과 문화, 종교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여 협상을 통해 또는 사업수단으로 적절한 이윤을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섣부른 욕심으로 접근한 아랍문제에서 특히 최근에 나타난 문제에서 이라크에 대한 그들의 정책은 치졸함과 멍청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들은 아랍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지원은 독재자에게 돌아갔고 그러면서도 독재자를 제어하고자 반대파에게 지원을 했다.

그들의 의도는 아랍지역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면서 비난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는 말 잘듣는 대리인을 세운 후 그에게 악역을 시키고 뒤에서 조정한 후 필요없으면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이중적인 정책을 실행하면서는 매우 어리석은 가벼운 행동으로 일을 그르치기가 일쑤였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똥찬 머리를 굴려 배를 채우는 동안 대상 국가의 국민들이 죽어갔고 또 서방국가 집권층의 놀이판에 각 국가의 국민들의 비싼 세금을 내면서 그들 지도자들의 어설픈 국제정치 놀이에 기만 당한다는 것이다.
 

 

후세인의 이중생활
 

후세인은 시아파 중에서도 별볼일 없던 부류인 베드인족 그리고 이라크에서도 변두리인 티크리트 지방에서 태어난다.

가난이 말도 못하는 집안 형편에 아버지도 모르는 사생아 이고 구타가 일상화된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그런 그가 고단한 생을 이겨 나갔던 에너지는 단 하나 그의 자존심이었다. 놀림과 배고픔 그리고 늘 꺽이는 자존심으로 그의 내부에는 분노의 에너지가 쌓여갔고 성공에 대한 왜곡된 에너지와 타인에 대한 불신은 이후 그의 행동에서 나타는  정신병적인 이중성의 원인이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와 삼촌은 그의  생에 전환점으로 마련한다. 반란에 연류되어 지방 한직 교사였단 삼촌 밑에서 자라게 된 후세인을 초급 교육을 받게 되고 삼촌의 지인들을 통해 반체제 조직의 끄트머리를 잡게 된다.

청년시절 후세인은 뺴어낸 외모와 강렬한 카리스마로 주목을 받기는 하지만 그의 출신상 선입견과 이기적 성격, 돌출 행동으로 바트당 당원으로도 거부된다. 하지만 그는 늘 튀는 행동을 하고 결국 정치깡페로 반역행위에 가담하였다면 추방을 당한다. 이집트에서 망명 기간동안 그는 매우 세련되어 지면 자신을 포장하는 법을 배우고 바트당의 하부 조직의 책임자를 맡는다. 또 바트당 중요 인물의 신뢰를 얻어 이라크로 돌아가면서 당내에서의 서열 상승을 하게 된다.

후세인은 30이 되기 전에 이미 바트당에서 상당한 권력을 쥐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세련된 외모와 예의바르고 당당한 품행, 굳은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이라크를 근대적이며 아랍권의 지도국가가 되리라는 위상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에 매우 당당했으면 윗사람들에 대해서는 깍듯한 예의를 갖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의 겉 모습과 달리 그는 폭력적이며 권모 수술에 응하면 자신이 이끌러 청치깡페 조직을 운용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또 이집트 망명시절 자신의 힘만으로는 권력 쟁취가 불가능했다고 판단해서인지 CIA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늘 말하던 아랍민족의 통일과는 반대되는 행동이며 이라크 민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만 행동이었다.

바트당에서 그의 위치가 높아질 수록 그의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점덤 심해진다.

심지어 그는 그의 친구이면서 정치적인 동반자라고 불리는 바트당 동료들까지 살해하는데 그 미망인을 방문하여 눈물을 쏟으면 몇일을 집무실 갇혀 울고 나온것은 그를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행동들이다.  


70년 이전의 이라크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민주주의라는 관점을 배제하면 후세인의 독재에서 일반 국민이 손해를 본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기간에 이라크는 아랍국가중에서 가장 큰 경제 발전을 했고 국방력에서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중동에서 가장 최강이었다. 또 아이러니 하게도 이 기간주에 이라크의 국가 청렴은 아랍국가중에서는 최고였다. 지금도 거의 모든 아랍국가의 권력과 경제가 왕족에게 몰려있고 이들의 부정부페는 당연히 여겨질 정도인데 이라크에서는 다른 서방국가에서도 당시에 공공연하던 수수료 관행까지도 처형의 대사일 정도로 청렴했다. 후세인 자신도 이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켰으니까... 그의 성격상 관료들의 부정부페는 쳐죽일 일이었다. (걸프전 전후로 그와 그의 가족이 보여진 부정부페와 엽기적인 행각은 참 아이러니이다. 이것은 후세인이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이중성이 결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후세인의 이중성은 정신병적인 해석까지 가능할 정도인데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이중성은 극에 달한다. 그는 미국에게 상당히 의존하고 미국으로 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는다.

미국이 그토록 치를 떨었던 핵무기나 생화학 무기 프로그램도 미국의 지원없이는 불가능했다. 후세인의 말기 행보의 대부분은 미국과 관련된 것으로 1차 걸프전이나 쿠웨이트 침공 때도 후세인은 미국의 눈치를 살폈고 미국은 애매한 태도를 내비치면서 사실상 후세인의 행동을 조장했다. 이렇게 미국에게 의존하던 후세인은 한편으로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조치들을 펼친다. 그는 미국이 필요했지만 미국의 의도에 따르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는 미국을 배제한채 독자 노선을 가려고 했다.

어찌 보면 악마 후세인은 영국에 의해 태어나고 미국에 의해 길러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후세인은 사실상 제거되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좀더 입맛에 맞는 독재자를 앉히고 싶어했다.

자신들이 말에 좀더 고분고분 했다면 후세인 만큼 알맞는 독재가 없을 것이다. 폭력적이며 국민들에게는 강하고 서방에는 약한 그런 독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후세인은 적임자였는데 딱 하나 맘에 안드는 구섯이 있었는데 그것이 서방을 배제한 독자적인 아랍국가의 완성이라는 그의 이상은 애초부터 미국과는 맞지 않았지만 미국은 섣부르게 판단한 것이다.

40년 전에 독재 권력을 겪었고 그 권력자에 대한 평가가 아직 엇갈리는 우리, 작은 반도안에 북한이라는 또 다른 독재 국가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 다른 여러나라들 처럼 미국의 영향아래에 있고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인 우리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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