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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어디서 툭 튀어나온 햇볕이 종일 창가에서 논다.

열감기 앓고 나온 아이 같다. 앓고 나면 맑아질 수 있어서 사람도 자연도 살아남았겠지.

진로문제로 열병을 앓고 있는 둘째아이는 오늘은 아예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다.

어미인 나도 덩달아 같이 앓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창가의 햇살이 더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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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림 그리는 엠마를 좋아해요. 그래서 내 별칭도 그림 그리는 엠마라고 지었어요. 오늘 아침에 바꿨어요. 원래는 푸른개였는데 어떤 사람들이 무섭대요. 내 생각도 비슷해요.  난 천성적으로 푸른 기운, 그러니까 신비주의는 아니라는 거죠. 숨어있으면 그게 더 무서워요. 잊혀질까봐요. 그래서 그림 그리는 엠마에 게 붙기로 했어요.

 나는 그림책도 좋아하고 연애도 좋아해요. 그림책은 내 눈과 내 가슴이 좋아하구요. 연애는 내 심장이 펄쩍 뛸 정도로 좋아해요.  우리집은 그림책으로 둘러친 동굴이에요. 나는 그 안에 눌러붙은 곰이구요. 겨울잠도 잊고 벌써 몇 해 겨울을 그냥 뜬눈으로 났는 걸요. 나는 연애도 그렇게 해요. 심장을 뛰게 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 그것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게요. 연애는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에요.

 나는 요즘 양다리랍니다. 그래서 피곤해요. 그런데 양 손 떡이 다 말랑말랑하고 찰진 것이라 어쩌지 못하고 있어요. 그림책은 오래된 애인이구요. 요즘새로 사귄 애인은 시예요. 이 친구는 참 까칠해요. 그래서 전율 덩어리예요. 한번씩 엎어치기할 때마다 온몸이 쩌릿쩌릿하답니다.

 엠마 아세요?

 난 조금 알아요. 엠마는 내가 그림책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을 때 만난 나의 이웃이에요. 고양이도 좋아하고, 나무 오르기도 잘 하고, 주말이면 자식들이 몰려와 풍성한 저녁 만찬을 즐기고 돌아간답니다. 엠마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려고 애를 썼어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음 하는 때 말이에요. 엠마는 혼자 살아요. 그러니까 누군가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엠마 생일날 가족들이 엠마에게 고향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선물했어요. 하지만 그 그림은 엠마가 말하고 싶어하던 고향 마을이 아니었어요. 엠마는 새로운 생각을 해냈어요. 왜 여지껏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요.

 엠마는 시내에 나가 가장 좋은 그림도구를 사왔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엠마 가슴 속에 오래 오래 남아있는 고향 마을의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어요. 그리고는 그 고향 그림을 선물받은 그림과 바꾸어 달았죠. 엠마는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행복하기 그지없었어요. 어느 날, 그림을 미처 바꾸어 달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엠마의 그림이 알려지게 되었어요.

엠마의 다 큰 아들이 엠마에게 그림을 계속 그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엠마가 하는 말이 "이미 여러 장 그렸어."라고 말하며 벽장 문을 열었는데, 글쎄 그 안에 엠마가 그린 그림이 가득히 있는 거예요. 차라리 잘 되었죠. 이제는 숨기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엠마의 집 벽에는 온통 엠마가 그린 그림이 걸렸어요. 사람들이 엠마의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왔어요. 엠마와 차를 마시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엠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사실, 엠마는 그림 그리기 전에는 무지하게 외롭고 쓸쓸했거든요. 아마 엠마는 그림 전시회도 했을 걸요. 보세요. 세상에 누가 엠마를 퉁퉁하고 나이 먹은 할머니라고 하겠어요. 엠마는 그냥 엠마예요. 엠마 할머니가 아니라요. 고백하는데요. 사실 저도 엠마처럼 살고 싶답니다. 앞으로 몇 십년 뒤에요. 꼭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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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 장서리 내린 날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2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지음, 김은정 옮김, 이순원 강원도 사투리로 옮김 / 북극곰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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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곳곳의 눈 오는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 가 봅니다. 

<눈 오는 날>은 우리 나라 그림책인 줄 알았어요. 눈 풍경 안에 버섯처럼 솟은 뽕나무며, 나직나직한 시골 집이며 굴뚝새 딱따구리 여우 당나귀 소 모두 낯익은 것들이라서 말입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마을에도 대관령 너머 마을처럼 흰눈이 한 길이나 펑펑 내리는가 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황소 아저씨>도 생각나고, 우크라이나 민화인 <장갑>도 떠오르게 하는 그림책입니다.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도 하구요.  

"정말 다행이지 뭐에요! 우리한테는 쉴 곳도 있고 먹을 것도 넉넉하고 아늑한 잠자리도 있잖아요." 

"그나저나 밖에 있는 동물들이 걱정이네요." 

당나귀 아저씨와 젖소 아줌마가 주고 받는 말 속에는 어릴 적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두런 두런 주고 받던 말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는듯 합니다. 

서울 아이들은 강원도 사투리를 읽는 것 조차도 힘들어 하지요. 그런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출판사 사이트에 작가가 직접 사투리로 들려주는 클릭 단추가 있습니다.  

문밖에서 사는 어렵고 헐벗은 생명들이 어디 한겨울 장설 속에 갖힌 짐승들 뿐이겠습니까. 

아직 눈도 오지 않은 이 늦가을에도 세상 곳곳에는 아프고 배고프고 상처입은 생명들이 무수히 있습니다. 비좁은 자리 한 켠만 비워줘도 따뜻하게 숨 돌릴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 한 권의 그림책이 큰 울림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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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2011-11-1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자체만 읽어도 벌써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푸른개님도 마음이 따뜻한 분인가봐요. ^^
 
[중고] 미래소년 코난 Vol.1~7 셋트 (7Disc)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매니아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0월
평점 :
판매완료


화질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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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파티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00
존 버닝햄 지음, 이상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 그랬다. 개와 고양이를 키워보면 참 다르다고 말이다. 개는 사랑받기 위해 안달을 하는 반면에 고양이는 날마다 도도하고 무슨 엄청난 비밀을 안고 사는 것 같다고.  

비밀파티의 주인공이 고양이라!

고양이는 소리도 없이 날쌔고 조용하고 은밀하다. 소파에 소리도 없이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도 어딘가를 갈때에는 마치 중요한 일이 언뜻 생각난듯이 날쌔게 움직인다. 누군가 뒤따라갈까 가끔 뒤도 돌아보다가 모퉁이 뒤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함께 여러날 살아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좋아도 좋은지  싫어도 싫은지 알 수 없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다.  

 어른들의 파티도 아니고, 늘 보는 친구들과의 생일파티도 아니고 고양이의 비밀피티라니! 모두 잠든 한밤에 파티복으로 가라입고 잠귀 밝은 개들도 따돌리고 어느 지붕 위에서 펼치는 비밀 파티.   

 비밀파티장으로 달려가는 고양이를 볼 줄 아는 눈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밤마다 어딘가를 다녀온 후 낮동안 씩씩 잠만 자는 고양이는 누구나 볼 수 있어도 밤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파티장으로 향하는 말콤이라는 고양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존 버닝햄이 또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달아준 셈이다. 그 눈을 달고 잠깐 딴 세상을 살다 왔다. 

세상이 한 겹이 아니라 아주 여러 겹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본다. 늘 한 겹의 세상만 펼쳐진다고 지루해하지 말고 열어보자. 밤마다 곳곳에서 비밀파티들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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