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단괴세대--> 단카이세대 강담사--->고단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황석영의 신작을 읽는다.
황석영의 밑바닥 정서와 나의 그것은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나는 행동하기보다는 사색가에 가까워 그만큼의 에너지로 세상과 맞부딪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해주는 큰 형의 이야기로 새겨듣고 있다.

이번에는 그의 성장기이다. 전작 <바리데기>처럼 현실의 시간과 추억의 시간이 오밀조밀하게 짜여 있다. <바리데기>가 '화엄의 세계'라면, <개밥바라기 별>은 '랭보의 세계'이다. 그러면서 푸코, 이반 일리히, 헤겔, 이오덕의 이야기가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문학 소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문학 소년'보다는 '종교적 소년'기를 거친 나로서는 해보지 못한 그의 찐한 '탈선'의 경험이 무용담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싫은 가냐고? 물론 아니다.

비슷하게 소년기, 혹은 청년기의 성장기를 주로 표현하는 유하나 김종광의 영화나 글이 찌질한 자기 오물들의 배설이라면, 황석영에게는 성찰의 힘과 아픔을 보듬는 힘이 느껴진다. 이게 거장과 하수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오랜만에 밑줄을, 그것도 아주 긴 밑줄을 그어보았다. 푸코, 이반 일리히, 헤겔과 이오덕이 인용되는 이 부분이 그다지 새롭지는 않지만, 다시금 학교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정도의 자퇴 이유서를 쓸 수 있는 십대라면 정말 학교는 감옥일 뿐이다. 황석영은 이 책의 주인공 준처럼 '세상을 배움터 삼아, 세상을 친구이자 스승 삼아' 그렇게 내공을 쌓아왔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가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다시금 새겨듣는다.

---------------------------------------------------------------------------------------

황석영 <개밥바라기 별>, 86~90쪽
준의 자퇴 이유서 부분

저는 학교에 다니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는 부모들과 공모하여 유년기와 소년기를 나누어놓고 성년으로 인정할 때까지 보호대상으로 묶어놓겠다는 제도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래, 등교시간부터 하교시간까지 일정한 시간을 규율에 묶여서 견디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입니다. 규율을 어긴 자는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쫒겨나야 합니다. 쫒겨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회는 규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규율을 어기면 학교에서 퇴학당함으로써 더 좋은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누릴 기회를 박탈당할 우려가 있지요.
독감이라도 걸려서 하루나 또는 이틀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던 날 우리는 은근히 놀라게 됩니다. 다른 아이들이 차가운 아침공기 속에 입김을 하얗게 뿜어대며 종종걸음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창 너머로 훔쳐보며 저것이 내 꼴일 텐데, 하며 놀라지요.
정오경에 동네 근처 네거리에라도 나서면 초등학교 꼬마들에서부터 우리 또래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거의 남김없이 자취를 감춘 처음 보는 시간과 거리의 풍경에 또 한 번 놀랍니다. 아줌마들 노인들 행상들 그리고 시장 상인들만이 어슬렁거리며 오후의 분주할 때를 준비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혼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나니까 자기 시간을 스스로 운행할 수가 있었지요. 가령, 책을 읽었어요. 그 내용과 나의 느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정리가 되어서 저녁녘에 책장을 닫을 때쯤에는 갖가지 신선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또 어떤 날에는 어려서 멱감으러 다니던 여의도의 빈 풀밭에 나가 거닐었지요. 강아지풀, 부들, 갈대, 나리꽃, 제비꽃, 자운영, 얼레지 같은 풀꽃들이며, 논두렁 밭두렁의 메꽃 무리와, 풀숲에 기적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원추리 한송이, 그리고 작은 시냇물 속의 자갈 사이로 헤집고 다니는 생생한 송사리 때를 보고 눈물이 날뻔 했거든요. 눈썹을 건드리는 바람결의 잔잔한 느낌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행렬, 햇빛이 지상에 내려앉는 여러 가지 색과 밀도며 빛과 그늘. 그러한 시간은 학교에서 오전 오후 수업 여섯 시간을 앉아 있던 때보다 내 삶을 더욱 충족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이 이런 충족된 시간들이 아니라 제도를 재생산하는 규율의 시간 속에서 영향받고 형성된다는 것에 저는 놀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장기라니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그러한 기구를 통하여 교정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십 년 이상이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거의 치료 불가능하다고 판정받았던 정신이상자들이 정상적인 환경에 놓인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부분 완치되었다지요. 자연스럽게 그냥 놓아두는 것의 힘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저는 월말 학력고사의 피해자가 저 한 사람이 아니라 믿고 있습니다. 복도에 석차와 점수가 공개되어 붙을 때마다 수치심이나 모욕감은커녕 모두 부질없다는 비웃음이 입가에 떠오르지요. 숫자 몇 개나 부호 또는 단어 몇 마디를 적어나가던 시험지의 빈칸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것을 적응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장기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가에 따라서 직업의 적성이 결정되고 어느 등급의 학교를 어느 때까지 다녔는가에 따라 사회적 힘이 결정되겠지요. 이러한 위계질서가 권력과 재산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고등수학을 배우는 대신 일상생활에서의 셈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주입해주는 지식 대신에 창조적인 가치를 터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인식은 통일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며 이것저것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하던데요, 자유로운 독서와 학습 가운데서 창의성이 살아난다고도 합니다. 결국 학교교육은 모든 창의적 지성 대신에 획일적인 체제 내 인간을 요구하고 그 안에서 지배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모두가 신사의 직업을 우리들 앞에 미끼로 내세우지만 빵 굽는 사람이나 요리사가 되는 길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독 짓는 이는, 목수는, 정원사는, 또는 아무 일도 택하지 않는 것은. 피아노 배우기에서 여러 단계의 기계적인 손동작을 강조하는 대신에 예를 들면 처음부터 직접 '등대지기'라든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같은 노래를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인지. 굳어져 버린 코 큰 외국인의 석고상을 그리기보다는 학급 친구나 아우의 얼굴 또는 늙으신 고향의 할머니를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이것들은 제도 안의 최소한의 변화인데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는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도 하지만 미지의 자유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물론 힘들겠지만 스스로 만든 시간을 나누어 쓰면서 창조적인 자신을 형성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자퇴 이유입니다. (p. 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점점 현대 소설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바이지만, 소설가들이 너무 영화를 흉내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황량한 서부 영화의 화면 투르기 같은 묘사들. 혹은 <지옥의 묵시록>의 그 놀라운 미장센을 흉내낸 듯한 느낌. 그런데 나는 영화보다도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서부 편을 잃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매력적인 작가임이 분명하지만 존 스타인벡과 윌리엄 포크너를 잇는 작가라는 말이 혹시 허언이 아닌가 싶다.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이라는 광고문구는 심한 오버이다.   

정영목의 번역은 너무 매끄러워서 가끔은 지나친 의역같이 느껴진다. 의역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문장력으로 애매한 문구들을 쓱 넘어가는 수가 있다. 정영목도 그랬고, 이윤기도 그랬다. 여튼, 원서로 확인해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후의 묵시록이자, 인간성에 대한 실험의 소설이다. 만약 이 책이 사회주의 실험 이전에 나왔다면, 사회주의는 그 실험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이렇게 많이 쳐보기는 밀란 쿤데라와 움베르토 에코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생산양식'과 '지배양식'을 오랫도록 고민해 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년에 '존재양식'을 고민하는 하이데거주의자들이 되었는데, 이 책의 저자 또한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사라마구는 미학의 존재론으로 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게 이 책이 주는 강렬한 힘일 것이다.

근데, 이 책은 무엇보다 이명박 시대에 읽어야 할 책이다. 눈 먼 자들보다 먼저 눈먼자들이었던 '장님'들은 '이명박'을 지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복화술사인 '의사의 아내'까지 눈을 멀게 했다면 이야기는 불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다. 어차피 전지적 작가 시점과 주인공 시점을 왔다갔다하는 소설인데. 그러나 저자는 '증언', '응시'가 가진 긍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단 한 사람의 눈 뜬 자를 남겨둔 게 아닐까 싶다. 사소한 것 같지만, '증언'과 '응시'가 역사에서는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데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그것은 이 소설은 어차피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떠듬떠듬 읽어가야 제 맛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실의 고백
존 테일러 개토 지음, 이수영 옮김 / 민들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 이 글은 <교실의 고백>에 대한 꼼꼼 읽기로, 서울시대안교육센터 리뷰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조금 지루해 보일지 모르나 교육에 대한 개토의 생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좌표 설정하려고 그의 텍스트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다시 정돈해 보았습니다. 많은 서평들이 원 텍스트를 꼼꼼하게 정리하는 것에 서툴다는 생각에서, 저는 무엇보다 리뷰라는 작업에서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부터 '비평'이라든지, '생산적 읽기' 같은 건 나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

 

교실의 고백 꼼꼼히 읽기

존 테일러 개토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학교교육’과 ‘교육’에 대한 그의 구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앞질러 한 가지만 말하면, ‘학교교육’은 ‘학교’와 ‘교육’의 합성어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교육’은 ‘schooling'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어인 것이다. 그래서 ‘학교∨교육’이라고 띄어쓰기를 해서는 안 되며, ‘학교교육’이라고 붙여 써야 한다. 그리고 개토가 가끔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까지 그의 논지를 확장시키지만 사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학교교육은 (근대) 학교교육이다.

개토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자주 마주친다. “많은 이들이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라든지, “학교교육은 교육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교육이 모자라면 쉽게 보충할 수 있지만, 교육이 모자랄 때 입는 손해는 보충할 길이 없습니다”식의 구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지성들의 논지와 매우 닮아 있다. 서머힐 학교의 창시자 A. S. 닐, 『탈학교사회』의 이반 일리히, 『감시와 처벌』의 미셸 푸코 등과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삼십 평생을 평교사로 살아온 교사답게 개토의 비판은 좀 더 실제적인 데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에 대한 좀 더 정돈된 평가는 그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어야 가능하다.

1. 학교, 숨통 막히는 관료주의의 극치

“제가 몸담고 있는 중학교에 큰 방, 보일러실이나 식당, 교장실처럼 늘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면, 무료급식소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법기관의 법령, 시교육청의 승인, 교장의 허가, 교직원조합의 허락, 학부모협회의 승인, 관계자들의 원만한 협조, 시설 관리 책임자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학교는 노숙자들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럼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동의를 구해야만 할 테니까요.”(존 테일러 개토,『교실의 고백』, 민들레, 26쪽)

아이들을 위한 작은 프로젝트 하나 기획하려다가 무수한 서류더미와 결재라인 때문에 좌절해 본 적이 있는 교사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지적이다. 그런데 관료주의 학교에 대한 개토의 지적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학교의 ‘고비용 저효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진보 진영들이 침묵을 지키는 부분이기도 하다(주된 침묵의 이유는 더 큰 문제를 봐야 한다든가, 시장주의적 발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 그런데 개토의 학교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낭비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사람들이 고용되고 직함이 만들어지죠. 계약되는 용역에서, 책이나 우유 같은 물품 공급에서 낭비가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종소리에 따라 복도를 우르르 왔다갔다하는 귀중한 시간이 한심하게 낭비되고 있죠. 제 경험으로 보아 가난한 학교가 부유한 학교보다 훨씬 많이 낭비합니다. 그리고 부유한 학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낭비를 많이 합니다. 학교에 딱 한 가지 공적인 면이 있다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일자리 가운데 많은 수가 정치적인 영향력 따위로 채워지지만 말입니다.(앞의 책, 85쪽)

2. 학교교육, 삶과 상관하지 않기로 작정한 몬스터 
관료주의의 극한에 도달한 비생산적인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애초에 담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다. 닐이나 일리히와 마찬가지로, 개토에게도 학교는 아이들을 생생한 삶과 격리시킨(‘유리된’이라는 표현은 개토의 생각을 담기에 너무 온전하다!) 유배지이다.
 

“학교가 다름 아닌 ‘학교’를 위해 운영되는 곳이며, 교육효과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아이들을 가두어 놓은 교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교실에는 시계나 거울이 없고, 전화와 팩스가 없고, 우표나 봉투가 없고, 지도가 없고, 주소록이 없고, 생각에 잠길 사적인 공간이 없고, 의논할 만한 회의 탁자도 없습니다. 삶이 펼쳐지고 있는 바깥 세계와 접촉할 방법이 전혀 없는 곳이 교실입니다. 실제 삶이 펼쳐지는 곳으로 가려면, 아이들은 담임교사, 과목 교사, 생활지도 교사, 학년주임 교사, 교장, 그리고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가 이 모든 이들에게 허가를 박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앞의 책, 26쪽)

그러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육의 전문가라고 불리는 교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개토 자신도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30년간 교사로 일하지 않았던가? 개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토는 이 질문을 피해갈 생각이 없다. 그는 교사 자격증 제도부터 걸고넘어진다. 

“교사 자격증이라는 환상도 파헤쳐 봅시다. 교사들은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자격증을 따고 월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교사들 가운데 전문가는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교사가 과학자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는 스스로의 열정으로 자연의 비밀을 캐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이를 탐구합니다. 이 나라의 과학수업 가운데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진지한 탐구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며, 과연 인류의 지식에 보탬이 되고 있나요? 과학 수업은 시간 때우기로 정해진 방법 그 이상이 아니죠. 아이들은 과학 용어를 외우고 늘 해왔던 순서대로 수업을 되풀이하며 텔레비전 광고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공식을 암기합니다. 과학교사는 국가 검정 과학교과서에 적혀 있는 정치적 사실들의 홍보요원입니다.” (앞의 책, 87쪽)

 조금 고약한 감이 있지만, 개토의 말에 공감을 보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물론 개토는 지금 개개 교사의 인격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더더군다나 이런 참혹한 시스템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사는 관료주의 학교교육의 집행자’임을 숨길 생각이 없다. 
 

3. 학교교육, 출구는 없다!
그러면,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교를 좀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구조를 바꾸고 조직을 정비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학교의 담장을 헐고, 현장 체험학습을 강화하면 문제는 해결될까? 그렇게 해서 지금 실패의 늪에 빠진 학교를 구해낼 수 있다고 개토는 보고 있는 것일까?
개토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개토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지금 학교가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학교는 아주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왜? 학교가 생긴 애초의 목표에 딱 맞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개토의 생각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면 이 점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딱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학교가 어딘가에 결함이 있으며, 그 결함만 해결하면 좋은 학교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나 신문들에서부터 갖가지 공청회에 이르기까지 ‘학교 실패’의 원인을 찾고 있다. (이제 그런 고만고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 기사, 공청회가 지겹다는 건 미국민뿐만 아니라 우리도 알고 있다.) 이런 해답 찾기를 개토는, 단호하게,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이라고 쏘아붙인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 학교 경영자들의 대다수는 어째서 돈을 아무리 들이고,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도 만족스러운 인간을 배출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는 게 공정할 듯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교수법, 나쁜 부모, 나쁜 아이들, 또는 인색한 납세자들같이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는 유혹을 불가피하게 받는 것입니다. 학교가 본래 의도대로 잘 작용하고 있으며 학교교육을 통해 만들어 내려고 의도한 바로 그런 인간제품을 생산해 내는 아주 잘 고안된 사회기구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실패의 원인은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학교를 인간의 교묘한 재간이 거둔 영광스러운 성공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 이러한 성공을 원하는지 숙고해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대신 가치 있는 뭔가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의 책, 100쪽)

4. '학교교육'은 '교육'과 대척점에 서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의 논지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개토에 의하면,  ‘학교교육’은 ‘교육’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교육의 대척 지점에 있다는 것. ‘학교교육’과 ‘교육’은 공존하기 힘들다는 것 말이다.
 

“학교교육은 아이들에게 배우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비밀도 아닙니다. 학교교육의 비밀은 건강하고 주체적인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법을 가르칠 의도가 애초부터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변형된 중앙 통제 경제와 날이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는 사회질서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학교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조직사회의 첫인상을 갖습니다. 대부분의 첫인상이 그렇듯이 학교에 대한 첫인상도 오래 간직됩니다. 현대 학교교육은 건강한 인간의 발전에 해악을 끼칩니다. 교실에서 하는 공부는 의미 있는 공부가 아니지요. 아이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참된 욕구를 만족 시키지 못합니다. 교실 공부는 체험을 통해서 얻은 질문, 어린 마음에 솟아나는 참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앞의 책, 65쪽)

많은 사회비판가들과 마찬가지로, 개토도 학교교육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 단순한 작업이 가능한 인간, 자기 생각을 지워버린 인간,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가 인용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래서 그의 책 곳곳에서는 미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이 자국민을 길들이기 위해서 프로이센의 학교교육을 열심히 배우고 적용시키는 역사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사범대학들, 컬럼비아 대학, 시카고 대학, 존 홉킨스 대학, 위스콘신, 스탠포드 대학 들이, 호레이스만, 존 듀이, 스탠리 홀 같은 지식인들이, 록펠러, 카네기 같은 경제인들이 어떤 공모를 했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5. 사보타주, 공교육 교사의 한줌의 도덕
여기까지 읽으니 우선 즉자적인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저렇듯 참혹한 학교교육 체제에서 개토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개토는 순순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그토록 반감을 느끼는 이 지긋지긋한 제도에서 어떻게 서른 해 가까이 살아남았을까요? 제 이야기가 다른 교사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고백하려고 합니다. 저는 작은 일이나 큰 일에서 적극적인 사보타주를 해 왔습니다. 제가 꿋꿋하게 했던 일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곧, 학교교육이 배 만들기나 집짓기를 가르치지 않으면 나쁜 교육이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 주면 그 사람들에게 유리하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따위를 말입니다. 저는 일상에서 또 일부러 사보타주를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규칙을 어겼고, 틀에 박힌 수업시간과 공간을 융통성 있게 만들고, 경직된 교과과정이지만 아이들 저마다에게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으로 평가기록을 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교사들에게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도록 권유하여 그들이 승진 피라미드에 끼어들지 않도록 꾸준히 방해 공작을 폈습니다. 저는 학교가 가진 징계제도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그 메커니즘에 도전하고 제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징계 메커니즘은 두려움을 기초로 효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관리자들끼리 반목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저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했고, 그조차 힘에 부칠 때는 지역사회의 사업가, 정치인, 학부모, 기자들의 힘을 동원해 운신의 폭을 넓혔습니다. 한번은 제가 심한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려 있을 때 아내에게 학교의 이사로 출마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는 이사로 선출되어 교장을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당들을 은근슬쩍 여러 방법으로 처벌했죠.”(앞의 책, 86쪽)

코믹하게 묘사된 부분에서는 슬며시 실소를 머금기도 하지만, 꽉 막힌 공교육에서 한 번쯤 저항해 본 사람들은 분명 박수를 보낼 만한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가 개토의 오랜 교직 생활에서의 투쟁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건 역시 학생들을 위한 그의 마음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탠리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스탠리는 제가 뉴욕 시에서 가르칠 때 만났던 학생입니다. 스탠리는 한 달에 하루만 학교에 왔는데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 그렇게 지냈습니다. 담임인 제가 그 아이를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범법자가 되려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스탠리는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말해 주었고, 그 아이에겐 그렇게 하는 게 학교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교육효과가 높다는 데 제가 동의한 것입니다. 스탠리는 삼촌과 고모가 다섯 있었는데, 모두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스스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스탠리는 그 뒤를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삼촌과 고모들은 꽃장수, 미완성 가구업자, 정육점 주인인, 작은 식당 주인, 용달업체 사장이었습니다. 스탠리는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 삼촌과 고모의 가게에서 돈을 받지 않고 번갈아 가며 일했습니다. 스탠리는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옮겨다니며 무료로 일하는 대신 사업을 배운 겁니다.” (앞의 책, 64쪽)

6. ‘학교교육’은 넘어선 ‘교육’의 길은 어디에?
적어도 개토의 생각대로라면, 사보타주식의 접근 외에 공교육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외의 유일한 선택은 학교를 떠나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학교교육을 넘어서, 교육의 본질에 도달하는 현실적인 방법도 의외로 심플해진다.
 

“우리는 학교교육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의 탐욕스러운 손아귀를 벌여야 합니다. 학교들이 자유롭게 교육을 펼치도록 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학교들이 여전히 나쁜 학교, 돈 많이 드는 학교로 남아 있을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급 쪽을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바우쳐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 정신을 가진 교사들과 학부모, 사업가 기관, 그리고 가치 있는 모든 이들이 학교교육에 전망 있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여 그들이 공정하게 겨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실패했고, 더 이상 나빠지리라고 상상하기 힘드니까 말입니다. 교육세의 일부를 학부모에게 돌려주어 그들이 낡은 형식과 새로운 형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학부모들이 지금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 문제를 다루는 옳은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앞의 책, 50쪽)

지금 개토는, 다양한 주체들에게 학교 경영권을 주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국가가 부모로부터 빼앗아간 그 자녀 교육권을 부모에게로 돌려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교육개혁의 방향도 한국도 점차로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과격하게 공교육에 사망선고를 내린 사람치고는 너무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한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지금 미국의 주된 교육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바로 학교 개혁론자들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학교 개혁론자들이 바로 근대 학교교육 이데올로그들의 적자라는 사실을 개토는 잊은 것일까? 그는 왜 학교 개혁론자들의 생각에 곧 바로 투항해 버린 것일까? 급기야 그는 학부모와 시장에 교육권을 돌려주라고 손쉽게 선언해 버리고 만다. 

“부모의 손에 완전한 선택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시장이 학교교육을 다시 정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만큼 다양한 학교교육 형태가 발전하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관료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펼치게 하는 것입니다.”(앞의 책, 140쪽)

순진한 걸까? 개토가 생각하는 것처럼, 국가 독점이 해소된다고 ‘교육’이 살아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나쁜 것만을 몰아내는 한판의 전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을 만약 전투에 비유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람시의 말대로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에 가까운 것이다. 개토라면 적어도 찬찬히 공교육에서의 의미 있는 경험들을 축척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의 본질 찾기는 시작된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그의 책 곳곳에 언급되어 있는 아미시 공동체 같은 극단적인 문명 비판론으로 그 자신을 귀속시키든지 해야 마땅한 게 아닐까? 개토의 순진한 결론은 ‘학교교육’과 ‘교육’을 대척점에 놓은 그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논법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낡은 학교교육 속에서 헐벗고 있는 누추한 ‘교육’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역시 쉽지 않은 문제이다. 개토마저 손쉽게 투항해 버릴 정도니 말이다. 30여 년의 녹녹치 않은 경험이 주는 그의 학교교육 비판은 여전히 솔깃하지만, 우리에게는 대안의 구체적인 의미를 하나씩 축척해갈 수 있는 생산적인 논의가 더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길러낸 아이들의 이야기는 계속 음미하고 싶을 만큼 흥미롭다. 이들은 과연 공교육의 예기치 않은 소득물일까? 

“제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몇 명은 학교를 떠나 아마존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아마존 인디언과 함께 살며 정부의 댐 건설이 전통적인 인디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스스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니카라과에 가서 전투부대에 합류하여 그 땅의 민중들의 삶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름다운 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만들어 상을 탔고, 어떤 이들은 코미디언이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사랑을 이루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사랑에 실패했습니다.” (앞의 책, 86~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