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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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괴세대--> 단카이세대 강담사--->고단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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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고백
존 테일러 개토 지음, 이수영 옮김 / 민들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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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 이 글은 <교실의 고백>에 대한 꼼꼼 읽기로, 서울시대안교육센터 리뷰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조금 지루해 보일지 모르나 교육에 대한 개토의 생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좌표 설정하려고 그의 텍스트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다시 정돈해 보았습니다. 많은 서평들이 원 텍스트를 꼼꼼하게 정리하는 것에 서툴다는 생각에서, 저는 무엇보다 리뷰라는 작업에서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부터 '비평'이라든지, '생산적 읽기' 같은 건 나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

 

교실의 고백 꼼꼼히 읽기

존 테일러 개토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학교교육’과 ‘교육’에 대한 그의 구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앞질러 한 가지만 말하면, ‘학교교육’은 ‘학교’와 ‘교육’의 합성어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교육’은 ‘schooling'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어인 것이다. 그래서 ‘학교∨교육’이라고 띄어쓰기를 해서는 안 되며, ‘학교교육’이라고 붙여 써야 한다. 그리고 개토가 가끔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까지 그의 논지를 확장시키지만 사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학교교육은 (근대) 학교교육이다.

개토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자주 마주친다. “많은 이들이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라든지, “학교교육은 교육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교육이 모자라면 쉽게 보충할 수 있지만, 교육이 모자랄 때 입는 손해는 보충할 길이 없습니다”식의 구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지성들의 논지와 매우 닮아 있다. 서머힐 학교의 창시자 A. S. 닐, 『탈학교사회』의 이반 일리히, 『감시와 처벌』의 미셸 푸코 등과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문적인 학자가 아닌, 삼십 평생을 평교사로 살아온 교사답게 개토의 비판은 좀 더 실제적인 데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에 대한 좀 더 정돈된 평가는 그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어야 가능하다.

1. 학교, 숨통 막히는 관료주의의 극치

“제가 몸담고 있는 중학교에 큰 방, 보일러실이나 식당, 교장실처럼 늘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면, 무료급식소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입법기관의 법령, 시교육청의 승인, 교장의 허가, 교직원조합의 허락, 학부모협회의 승인, 관계자들의 원만한 협조, 시설 관리 책임자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학교는 노숙자들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럼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동의를 구해야만 할 테니까요.”(존 테일러 개토,『교실의 고백』, 민들레, 26쪽)

아이들을 위한 작은 프로젝트 하나 기획하려다가 무수한 서류더미와 결재라인 때문에 좌절해 본 적이 있는 교사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지적이다. 그런데 관료주의 학교에 대한 개토의 지적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학교의 ‘고비용 저효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진보 진영들이 침묵을 지키는 부분이기도 하다(주된 침묵의 이유는 더 큰 문제를 봐야 한다든가, 시장주의적 발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 그런데 개토의 학교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다 못해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낭비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사람들이 고용되고 직함이 만들어지죠. 계약되는 용역에서, 책이나 우유 같은 물품 공급에서 낭비가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종소리에 따라 복도를 우르르 왔다갔다하는 귀중한 시간이 한심하게 낭비되고 있죠. 제 경험으로 보아 가난한 학교가 부유한 학교보다 훨씬 많이 낭비합니다. 그리고 부유한 학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낭비를 많이 합니다. 학교에 딱 한 가지 공적인 면이 있다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일자리 가운데 많은 수가 정치적인 영향력 따위로 채워지지만 말입니다.(앞의 책, 85쪽)

2. 학교교육, 삶과 상관하지 않기로 작정한 몬스터 
관료주의의 극한에 도달한 비생산적인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애초에 담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다. 닐이나 일리히와 마찬가지로, 개토에게도 학교는 아이들을 생생한 삶과 격리시킨(‘유리된’이라는 표현은 개토의 생각을 담기에 너무 온전하다!) 유배지이다.
 

“학교가 다름 아닌 ‘학교’를 위해 운영되는 곳이며, 교육효과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아이들을 가두어 놓은 교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교실에는 시계나 거울이 없고, 전화와 팩스가 없고, 우표나 봉투가 없고, 지도가 없고, 주소록이 없고, 생각에 잠길 사적인 공간이 없고, 의논할 만한 회의 탁자도 없습니다. 삶이 펼쳐지고 있는 바깥 세계와 접촉할 방법이 전혀 없는 곳이 교실입니다. 실제 삶이 펼쳐지는 곳으로 가려면, 아이들은 담임교사, 과목 교사, 생활지도 교사, 학년주임 교사, 교장, 그리고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가 이 모든 이들에게 허가를 박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앞의 책, 26쪽)

그러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육의 전문가라고 불리는 교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개토 자신도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30년간 교사로 일하지 않았던가? 개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토는 이 질문을 피해갈 생각이 없다. 그는 교사 자격증 제도부터 걸고넘어진다. 

“교사 자격증이라는 환상도 파헤쳐 봅시다. 교사들은 마치 전문가인 것처럼 자격증을 따고 월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교사들 가운데 전문가는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교사가 과학자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는 스스로의 열정으로 자연의 비밀을 캐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이를 탐구합니다. 이 나라의 과학수업 가운데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진지한 탐구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며, 과연 인류의 지식에 보탬이 되고 있나요? 과학 수업은 시간 때우기로 정해진 방법 그 이상이 아니죠. 아이들은 과학 용어를 외우고 늘 해왔던 순서대로 수업을 되풀이하며 텔레비전 광고 노래를 따라 부르듯이 공식을 암기합니다. 과학교사는 국가 검정 과학교과서에 적혀 있는 정치적 사실들의 홍보요원입니다.” (앞의 책, 87쪽)

 조금 고약한 감이 있지만, 개토의 말에 공감을 보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물론 개토는 지금 개개 교사의 인격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더더군다나 이런 참혹한 시스템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사는 관료주의 학교교육의 집행자’임을 숨길 생각이 없다. 
 

3. 학교교육, 출구는 없다!
그러면,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교를 좀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구조를 바꾸고 조직을 정비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학교의 담장을 헐고, 현장 체험학습을 강화하면 문제는 해결될까? 그렇게 해서 지금 실패의 늪에 빠진 학교를 구해낼 수 있다고 개토는 보고 있는 것일까?
개토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개토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지금 학교가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학교는 아주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왜? 학교가 생긴 애초의 목표에 딱 맞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개토의 생각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면 이 점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딱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학교가 어딘가에 결함이 있으며, 그 결함만 해결하면 좋은 학교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이나 신문들에서부터 갖가지 공청회에 이르기까지 ‘학교 실패’의 원인을 찾고 있다. (이제 그런 고만고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 기사, 공청회가 지겹다는 건 미국민뿐만 아니라 우리도 알고 있다.) 이런 해답 찾기를 개토는, 단호하게,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이라고 쏘아붙인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 학교 경영자들의 대다수는 어째서 돈을 아무리 들이고,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도 만족스러운 인간을 배출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는 게 공정할 듯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교수법, 나쁜 부모, 나쁜 아이들, 또는 인색한 납세자들같이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는 유혹을 불가피하게 받는 것입니다. 학교가 본래 의도대로 잘 작용하고 있으며 학교교육을 통해 만들어 내려고 의도한 바로 그런 인간제품을 생산해 내는 아주 잘 고안된 사회기구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실패의 원인은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학교를 인간의 교묘한 재간이 거둔 영광스러운 성공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 이러한 성공을 원하는지 숙고해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대신 가치 있는 뭔가를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의 책, 100쪽)

4. '학교교육'은 '교육'과 대척점에 서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의 논지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개토에 의하면,  ‘학교교육’은 ‘교육’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교육의 대척 지점에 있다는 것. ‘학교교육’과 ‘교육’은 공존하기 힘들다는 것 말이다.
 

“학교교육은 아이들에게 배우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비밀도 아닙니다. 학교교육의 비밀은 건강하고 주체적인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법을 가르칠 의도가 애초부터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변형된 중앙 통제 경제와 날이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는 사회질서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학교는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조직사회의 첫인상을 갖습니다. 대부분의 첫인상이 그렇듯이 학교에 대한 첫인상도 오래 간직됩니다. 현대 학교교육은 건강한 인간의 발전에 해악을 끼칩니다. 교실에서 하는 공부는 의미 있는 공부가 아니지요. 아이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참된 욕구를 만족 시키지 못합니다. 교실 공부는 체험을 통해서 얻은 질문, 어린 마음에 솟아나는 참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앞의 책, 65쪽)

많은 사회비판가들과 마찬가지로, 개토도 학교교육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 단순한 작업이 가능한 인간, 자기 생각을 지워버린 인간,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가 인용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래서 그의 책 곳곳에서는 미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이 자국민을 길들이기 위해서 프로이센의 학교교육을 열심히 배우고 적용시키는 역사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사범대학들, 컬럼비아 대학, 시카고 대학, 존 홉킨스 대학, 위스콘신, 스탠포드 대학 들이, 호레이스만, 존 듀이, 스탠리 홀 같은 지식인들이, 록펠러, 카네기 같은 경제인들이 어떤 공모를 했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5. 사보타주, 공교육 교사의 한줌의 도덕
여기까지 읽으니 우선 즉자적인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저렇듯 참혹한 학교교육 체제에서 개토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개토는 순순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그토록 반감을 느끼는 이 지긋지긋한 제도에서 어떻게 서른 해 가까이 살아남았을까요? 제 이야기가 다른 교사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서 고백하려고 합니다. 저는 작은 일이나 큰 일에서 적극적인 사보타주를 해 왔습니다. 제가 꿋꿋하게 했던 일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곧, 학교교육이 배 만들기나 집짓기를 가르치지 않으면 나쁜 교육이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 주면 그 사람들에게 유리하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따위를 말입니다. 저는 일상에서 또 일부러 사보타주를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규칙을 어겼고, 틀에 박힌 수업시간과 공간을 융통성 있게 만들고, 경직된 교과과정이지만 아이들 저마다에게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으로 평가기록을 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교사들에게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도록 권유하여 그들이 승진 피라미드에 끼어들지 않도록 꾸준히 방해 공작을 폈습니다. 저는 학교가 가진 징계제도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그 메커니즘에 도전하고 제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징계 메커니즘은 두려움을 기초로 효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관리자들끼리 반목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저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했고, 그조차 힘에 부칠 때는 지역사회의 사업가, 정치인, 학부모, 기자들의 힘을 동원해 운신의 폭을 넓혔습니다. 한번은 제가 심한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려 있을 때 아내에게 학교의 이사로 출마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내는 이사로 선출되어 교장을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당들을 은근슬쩍 여러 방법으로 처벌했죠.”(앞의 책, 86쪽)

코믹하게 묘사된 부분에서는 슬며시 실소를 머금기도 하지만, 꽉 막힌 공교육에서 한 번쯤 저항해 본 사람들은 분명 박수를 보낼 만한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가 개토의 오랜 교직 생활에서의 투쟁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건 역시 학생들을 위한 그의 마음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탠리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스탠리는 제가 뉴욕 시에서 가르칠 때 만났던 학생입니다. 스탠리는 한 달에 하루만 학교에 왔는데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 그렇게 지냈습니다. 담임인 제가 그 아이를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범법자가 되려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스탠리는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말해 주었고, 그 아이에겐 그렇게 하는 게 학교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교육효과가 높다는 데 제가 동의한 것입니다. 스탠리는 삼촌과 고모가 다섯 있었는데, 모두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스스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스탠리는 그 뒤를 따르고 싶어 했습니다. 삼촌과 고모들은 꽃장수, 미완성 가구업자, 정육점 주인인, 작은 식당 주인, 용달업체 사장이었습니다. 스탠리는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 삼촌과 고모의 가게에서 돈을 받지 않고 번갈아 가며 일했습니다. 스탠리는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옮겨다니며 무료로 일하는 대신 사업을 배운 겁니다.” (앞의 책, 64쪽)

6. ‘학교교육’은 넘어선 ‘교육’의 길은 어디에?
적어도 개토의 생각대로라면, 사보타주식의 접근 외에 공교육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외의 유일한 선택은 학교를 떠나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학교교육을 넘어서, 교육의 본질에 도달하는 현실적인 방법도 의외로 심플해진다.
 

“우리는 학교교육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의 탐욕스러운 손아귀를 벌여야 합니다. 학교들이 자유롭게 교육을 펼치도록 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학교들이 여전히 나쁜 학교, 돈 많이 드는 학교로 남아 있을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급 쪽을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바우쳐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 정신을 가진 교사들과 학부모, 사업가 기관, 그리고 가치 있는 모든 이들이 학교교육에 전망 있는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하여 그들이 공정하게 겨룰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실패했고, 더 이상 나빠지리라고 상상하기 힘드니까 말입니다. 교육세의 일부를 학부모에게 돌려주어 그들이 낡은 형식과 새로운 형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학부모들이 지금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 문제를 다루는 옳은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앞의 책, 50쪽)

지금 개토는, 다양한 주체들에게 학교 경영권을 주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국가가 부모로부터 빼앗아간 그 자녀 교육권을 부모에게로 돌려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교육개혁의 방향도 한국도 점차로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과격하게 공교육에 사망선고를 내린 사람치고는 너무 안이한 해결책을 제시한 게 아닐까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지금 미국의 주된 교육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바로 학교 개혁론자들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학교 개혁론자들이 바로 근대 학교교육 이데올로그들의 적자라는 사실을 개토는 잊은 것일까? 그는 왜 학교 개혁론자들의 생각에 곧 바로 투항해 버린 것일까? 급기야 그는 학부모와 시장에 교육권을 돌려주라고 손쉽게 선언해 버리고 만다. 

“부모의 손에 완전한 선택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시장이 학교교육을 다시 정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만큼 다양한 학교교육 형태가 발전하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관료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펼치게 하는 것입니다.”(앞의 책, 140쪽)

순진한 걸까? 개토가 생각하는 것처럼, 국가 독점이 해소된다고 ‘교육’이 살아나지 않는다. 교육은 단순히 나쁜 것만을 몰아내는 한판의 전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을 만약 전투에 비유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람시의 말대로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에 가까운 것이다. 개토라면 적어도 찬찬히 공교육에서의 의미 있는 경험들을 축척하는 것으로부터 교육의 본질 찾기는 시작된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그의 책 곳곳에 언급되어 있는 아미시 공동체 같은 극단적인 문명 비판론으로 그 자신을 귀속시키든지 해야 마땅한 게 아닐까? 개토의 순진한 결론은 ‘학교교육’과 ‘교육’을 대척점에 놓은 그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논법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낡은 학교교육 속에서 헐벗고 있는 누추한 ‘교육’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역시 쉽지 않은 문제이다. 개토마저 손쉽게 투항해 버릴 정도니 말이다. 30여 년의 녹녹치 않은 경험이 주는 그의 학교교육 비판은 여전히 솔깃하지만, 우리에게는 대안의 구체적인 의미를 하나씩 축척해갈 수 있는 생산적인 논의가 더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길러낸 아이들의 이야기는 계속 음미하고 싶을 만큼 흥미롭다. 이들은 과연 공교육의 예기치 않은 소득물일까? 

“제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몇 명은 학교를 떠나 아마존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아마존 인디언과 함께 살며 정부의 댐 건설이 전통적인 인디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스스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니카라과에 가서 전투부대에 합류하여 그 땅의 민중들의 삶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름다운 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만들어 상을 탔고, 어떤 이들은 코미디언이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사랑을 이루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사랑에 실패했습니다.” (앞의 책,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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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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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다. 무대의 중심에는 두 사람의 거장이 있다.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플라톤, 땅을 가리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림을 좀 확대해서 보면 플라톤은 (그냥 알파벳 식으로 읽으면) ‘티메오’라는 책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티카’라는 책을 들고 있다.


읽어 보지 않았지만, ‘티메오’, 그러니까 <티마이오스>는 우주의 탄생과 세계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손에 그의 베스트셀러 격이라 할 수 있는 <변명>이나 <향연>, 혹은 <국가>가 아닌 <티마이오스>가 들려져 있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에는 왜 <형이상학>이 아닌, ‘에티카’, 그러니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들려져 있는가?

그건 아마도 라파엘로 당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한 방식 때문이 아닐까 한다. 관념론의 뿌리로 플라톤을, 경험론의 뿌리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놓는 방식 말이다. 따라서 <아테네 학당>은 라파엘로 당대의 관점으로 해석한/혹은 이해한 고대 그리스철학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보면, 어쩌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해석된 것보다 훨씬 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가깝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차이를, 막연히, 세계에 대한 해석/이해의 차이라는 식으로 돌릴 게 아니라, 플라톤이 씨름했던 현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씨름했던 현실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한국어 번역본을 산 건 지금부터 13년 전이다. 그때까지 나는 플라톤의 경우 엉성한 번역본으로나마 <변명>, <향연>, <국가> 등을 읽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요하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일별했을 뿐이다. 그러던 차에 하이데거의 <기술과 전향>을 읽게 되었고, 기억이 어렴풋한데, 원문이었는지, 역자해설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계속 읽어나갔던 하이데거의 책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물론 그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개념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의 일반적인 어휘였을 것이다. 기술(techne), 인식(episteme), 진리(aleteia), 산출(poiesis), 자연(physis), 활동(energeia), 능력(dynamis) 같은 어휘들에 허우적대면서 결국 그리스 고전 철학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도 모락모락 피어났다. 저 어휘들을 보라. 오늘날 우리가 쓰는 무수한 개념들이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에, 혹은 그리스 철학 사상에 맹아적으로나마 다 녹아 있는데, 공부해고픈 욕심이 솟아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최명관 번역본을 구입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3.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플라톤의 책과는 또 다른 명쾌함이 있는 책이었다. 중간 중간 아리스토텔레스가 드는 예들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물어가는 철학하는 사람의 전형을 이 책에서 보여 주었다. 그냥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주는 ‘중용’이라든지, ‘행복’의 개념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니까 ‘중용’, ‘행복’ 같은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 없이 쓰는 무미건조한 단어들이 오랜 철학적 고민의 산물인지를, 우리가 사는 동안 계속해서 곱씹어 보아야 할 말들인지를, 이런 말들을 숙고하는 것 속에 철학함이 있음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더불어 윤리학을 논하는 책에서 ‘정치학’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학문 일반에 대한 이야기가 왜 언급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윤리학 책이면서도 윤리학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학, 철학 일반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책이었다.    

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중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학문적 인식에 대한 논의가 들어있는 제 6권이었다. 기예(techne), 학문적 인식(episteme), 실천적 지혜(phronesis), 철학적 지혜(sophia), 직관적 지성(nous) 등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부분 말이다. 잡 잡히지는 않은 이 개념들을 속 시원히 이해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때였다. 물론 한국어 번역본, 그것도 영어본에서 중역한 게 확실한 책만 가지고 이 개념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 많은, 그리고 더 좋은 번역본과 해설서가 없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4.

올 초에 그리스 철학 전공자들이, 그리스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우리말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가급적 두툼한 해설서까지 더해 두 권의 책이 나오기를, 아니 개념어 사전까지 더해 세 권의 책이 나오길 바랬다. 그래서 그럴까. 비록 두툼하지만 한 권으로 된 책을 받은 지금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리스 원전에서 직접 번역했다는 것에, 그래도 애쓴 흔적이 보이는 해설(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둘러싼 이야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구조에 대한 해설),  용어해설, 그리스-우리말 대조표가 있다는 걸로 만족해야 할까.


이 책은 의역이 아닌 직역을 택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흐름을 놓치면 다시 거듭 읽어야 하는 만년체가 수두룩하다. 따라서 독파가 그리 수월할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2002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 출판한 브로디와 로우(Broadie & Rowe)의 탁월한 영역본을 옆에 놓고, 올해가 가기 전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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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0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무지 힘든데 리뷰를 잘쓰셨네요. 저도 대학원 다닐때 읽어 봤는데 어려워 죽는 줄 알았어요. 서광사에서 번역한 책이거든요.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