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참으로 좋아하지만 여행에세이는 잘 보지 않는 편. 여행을 가기 전 가이드북을 읽는 것 외에는 여행에 관한 서적은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독자가 마치 직접 보고 겪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화자를 '당신'이라 지칭하는 독특한 설정. 그 덕에 쿠바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꼈던 특별한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제목에 나와있듯이 [아바나의 시민들] 즉, 쿠바 혹은 아바나의 여행기라기보다 그 곳의 시민들에 초점을 맞추어 쓴 수필이다. 낯선 장소에서 만난 그 곳의 사람들. 그 들의 표정, 감정,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글.
잔뜩 꾸며낸 듯한 화려한 포토북이 아니라 더 마음에 들었다. 저자가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컷한컷 찍어낸 자연스럽고 거친 느낌의 사진들을 담아두어 아바나의 모습을 더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쿠바에 대해선 사전정보가 없었던 터라 아바나란 도시 자체는 조금 낯설었지만, 아는 것이 없어도 아바나의 소탈하고 솔직한 사람들을 만날 준비만 되어 있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 백민석님은 이번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서정적이면서 고독한 느낌의 사색적인 문체가 마음에 쏙 들었다.
글도 글이지만 바로 앞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시민들과 교감을 나누는 모습들이 좋았는데 그 중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장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풍족하진 않지만 치열하지 않고 여유로운 사람들.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오히려 마음의 풍요를 느꼈다.
정말 좋아하는 사진.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이라고 할까, 사진들마다 밝게 웃으며 즐거워 하는 아바나의 시민들.
재즈클럽에 가는 걸 참 좋아한다.
낮은 음으로 둥둥 울리는 베이스와 목관악기의 조화로움.
특히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본 사람이라면 반가울 듯한 클럽의 공연 모습.
최근의 나는 한 가지 목표가 생겨 조금 치열해졌다. 바쁘게 살다보니 마음의 여유도 달아난 것이 사실.
휴식시간에는 스마트폰과 웹서핑을 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장소에 놀러가면 감상을 하기보다 사진을 찍기에 바쁘게 살아왔다.
와이파이도 잘 잡히지 않는 곳에서의 초라하고 고독한 여행이 그 어느 것보다 가치있고 위대해 보였다.
물질의 풍요는 없지만 마음만은 차고 넘치는 밝은 표정의 [아바나의 시민들].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사는 건 아니었을까.
이 늙고 단순하고 물러설 줄 모르는 불굴의 낚시꾼 같은 말레콘은, 19052년부터 당신 같은 여행객들을 상대해왔다. 말레콘은 즐거움만을 주지 않는다. 고통은 말레콘이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이다. 목마름과, 이런저런 사고와, 격렬한 햇볕에 반비례하는 어두운 상념 속에서 문득 당신은 중얼거리게 된다.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다르지 않으며 에스프레소의 쓴맛처럼 고통이 때론 즐거움의 풍미를 더 깊게 할 것이라고.
53p
당신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보면서, 실은 당신 자신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실존에 끊임없이 그어지는, 그러면서도 금세 스러지곤 하는 주름을 보는 것이다. 상념, 행복했던 한때이든, 불행했던 한때이든, 또 미래의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불안까지 드리워진 상념에서 당신은 헤어날 길이 없어진다. 말레콘에서 당신은 상념에, 당신 자신에 중독된다. 알면서도 당신은 말레콘의 산책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날에도 다시 찾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이 주는 옅은, 희박한 고통을 놓고 싶지 않다. 삶의 고통은 아직 참을 만하고, 심지어 적당히 즐길 만하다.
56p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아바나에서 가장 볼만한 피사체인데, 사진은 휘발될 운명의 추억에 물성을 부여해, 한정된 형태로나마 현실에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당신은 그러니까 그들을 당신의 남은 생애만큼 당신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던것이다. 어떤,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76p
카메라를 잃은 다음 얻은 당신의 저렴한 깨달음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한다. 당신은 기계 눈으로부터 해방 되는 것보다 기계 눈에 복종하고 기계 눈을 신뢰하는 편이 훨씬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기계 눈을 쓰지 않자 시야는 넓어졌지만 저장은 할 수 없었다. 당신의 기억력은 믿을 수 없고 당장 망각이 걱정스럽다. 혹자는 사진에 찍힌 것만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진 없는 추억들은 언젠가 휘발되어, 오염되고 왜곡된 흐릿한 흔적만 남게 되지 않을까.
171p
사람들은 숲을 보라고 하지만, 숲을 보려면 일단 숲에서 나와야 한다. 아바나에서도 그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당신은 너무 세계 안쪽에서만 부대끼며 살았다. 그런 삶이 당신의 시야를 기계 눈의 디스플레이 틀 속에 한정 지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26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