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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성적이고 청아한 문체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새로운 에세이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가 나왔다.
에쿠니가오리는 내 독서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 감성의 일부는 그녀의 글에서 온 것인지도.
20대 시절, 그녀의 신간이 나오면 그 날 바로 서점에 가 구입해 볼 정도로 열렬히 좋아했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늘 위안이 되었고 작가의 정서도 문체도 닮고 싶다 소망하던 날들이 있었다.
애정했던 사람이기에 작가의 많은 것들이 궁금했는데, 이 책이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해 준 것 같다.

작가가 살아가는 보통의 일상을 보여주는 일러스트
개와 산책을 하고, 목욕을 하고, 씨없은 피오네 포도를 먹고, 글 쓰는 매일의 삶
파트1 쓰면서 살아가는 삶을 담은 '쓰기'
쓰는 것에 영감을 받은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자신의 일상을 건조하게 담은 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는 말은 아주 많습니다. 꿈을 가져라, 뭐 하나라도 좋으니 열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라. 호기심을 가져라,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필요치 않습니다, 하고 나는 단언합니다. 물론 그것들을 정말 갖고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중략)
자신과 자신 이외의 것이 이어질 때, 세계는 갑자기 열립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그러니 그전까지는 가만히 있는 것도 괜찮아요. 다만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몸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비가 내리면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스스로 느낄 것.
그릇장에서 나왔을 때, 그것들은 기본 체력이 됩니다.
'그릇장 속에서' 38p
알기 쉽게 쓰면 안되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의문이, 어려워야만 문학적인 것일까, 하는 종류의 분개가 되어 에너지를 주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소박한 소설' 47p
가령 내가 안녕이라고 쓰면,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큼의 구멍이 내게 뚫려서, 그때껏 닫혀 있던 나의 안쪽이 바깥과 이어진다. 가령, 이 계절이면 나는, 겨울이 되었네요 하고 편지에 쓸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그때껏 나의 안쪽에만 존재하던 나의 겨울이 바깥의 겨울과 이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중략)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 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음,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투명한 상자, 혼자서 하는 모험' 54p
파트2 읽고 기록하는 삶을 담은 '읽기'
자신이 영향을 받은 책을 추천해주고,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을 기록해놓았다.
일상의 이야기만이 아닌 짧은 소설이 담겨있어 읽는 재미가 더해졌던 파트.
읽고 쓰면서, 어찌되었든 소설 안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이야기.
천장까지 닿은 짙은 갈색 책장, 그 책장 앞에 세워진 사다리, 각각의 장소에 줄짓고, 쌓이고,꽂힌 수많은 책들, 한 권씩 저마다 자기 자리가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사가라거나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은다.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기분 좋게 그저 거기에서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다. 모든 통로에 그 기척이 가득하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나는, 그립고 그윽한 고요함이다.
'그 은밀한 기척, 책들이 만드는 음울함의 깊이' 88p
나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서점과 도서관을 참 좋아한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풍기는 고요한 분위기.
작가의 글이 내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듯 했다.
파트3 여러 기억을 담은 '그 주변'
도시, 공간, 장소에서의 추억과 여러날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에세이인데도 그녀가 엮어내는 일상들은 소설에 가까워보였다.
이전의 책들처럼 잔잔하고 소소하면서 따뜻하다.
책을 읽으며 다행이라 느낀 건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에쿠니가오리만의 문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녀는 변함없는 온기를 지닌 사람이었고,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삭막한 일상에 조금의 낭만을 불어넣어준 책.
이 책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가의 글로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나는 한동안 그 안에 머물렀고 함께 존재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에쿠니가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