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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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리우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테드 창처럼 중국계 SF 작가라는 것만으로 작품 스타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림짐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이 책 <종이 동물원>을 읽어 보니 둘은 꽤 성향이 다른 작가였다. 테드 창은 무척이나 철학적이고 톱니바퀴처럼 정밀한 플롯을 구사하는 작가이지만, 켄 리우의 단편들은 SF 답지 않게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는 바가 크다. 또 테드 창은 그의 작품만 읽어서는 중국계라는 걸 전혀 알 수 없지만, 켄 리우는 중국인, 나아가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다수의 단편 주인공 이름이 중국계라는 걸 넘어 근대 동아시아의 어두운 역사를 작품의 소재로 활용한다. 켄 리우를 소개할 때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하버드 법학 전문 대학원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독특한 이력을 강조하는데, 막상 그의 작품들을 읽어 보면 직업적 경험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켄 리우 작품의 독특한 점으로 꼽고 싶은 것은 소재 조합의 의외성이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동양의 고전적인 구미호 이야기와 서구 산업혁명의 스팀 펑크를 기묘하게 결합하고, <파(波)>에서는 영생을 통해 진화와 신(神)의 개념을 진지하게 고찰한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는 양자역학과 역사 실증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조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편집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한 SF에서 그치지 않고 비극적인 동아시아 역사를 주제로 긴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는데 있다. 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는 글자를 따라 읽는 것조차 괴로운 731 부대의 만행을 생생하게 재연하는데, 중일 전쟁 당시의 난징대학살을 다룬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을 연상케 한다(아이리스 장은 이 논픽션을 내고 일본 극우 세력의 집요한 괴롭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파자점술사>에서는 국공내전 패배 후 대만으로 건너간 장제스 정부가 미국과 합작하여 본성인(명·청 시대에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역사의 비극을 다룬다.

‘만약 1930년 런던해군군축조약이 발효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일본 군부가 자극 받지 않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대공황을 미국과 일본이 합작하여 태평양 횡단 터널을 뚫는 것으로 해결했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출발한 대체역사,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에서는 얼핏 평화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도 일본 군부는 수없이 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을 통해 얻은 포로에게 비참한 강제 노역을 시키고, 인부들을 위해 조선인 위안부를 동원한다.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가 눈앞에 어른거릴 수밖에.

이 밖의 단편들에서도 켄 리우 특유의 빼어난 창의력을 흠뻑 만끽할 수 있다.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게 만들고, 그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새로운 현실을 꿈꿀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게 SF의 역할이자 매력이라고 한다면, 켄 리우의 작품만큼 그 역할에 충실한 SF가 또 있을까 싶다. 그의 작품을 오래오래 잔뜩 읽고 싶은 소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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