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스푼 -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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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에세이스트 샘 킨의 데뷔작. 번역은 믿고 보는 이충호. 여느 샘 킨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과학사의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은 원소 주기율표를 소재로 하는데, 샘 킨의 다른 책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라면 주기율표 상 비슷한 성격의 원소들을 묶어서 챕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연(Zn), 금(Au), 텔루륨(Te), 유로퓸(Eu), 알루미늄(Al)을 한데 묶어 ‘돈으로 쓰이는 원소들‘이라는 챕터를 만드는 식이다. 주기율표에 등장하는 원소가 너무 많으니 이런 형식을 택한 게 아닌가 싶은데, 주기율표 순서대로 차례차례 서술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게 읽힌다.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같은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사라진 스푼‘은 과학자들이 즐겨 하는 장난을 지칭하는 말이다. 갈륨은 실온에서 고체로 존재하지만 녹는점이 29.8℃로 낮은 편이다. 그래서 손님에게 뜨거운 차와 함께 갈륨으로 만든 찻숟가락을 내놓고, 찻숟가락이 차에 녹아서 사라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는 손님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다. 원소의 특성을 이용한 경쾌한 트릭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하겠다.

<사라진 스푼>은 주기율표의 원소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는데 하나같이 흥미롭고 기이하다. 원소들이 인류의 역사와 경제, 문화, 전쟁, 심지어 철학에 미친 영향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기율표의 산물인 셈이다˝라는 책 속의 글귀가 실감된다.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자. 영국은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소금에 8.2 퍼센트의 높은 세금을 부과한다. 간디는 이에 항의하기 위해 ‘소금 행진‘을 벌이며 인도 국민들에게 스스로 소금을 만들어 세금을 내지 말라고 촉구한다. 이로 인해 인도에서는 주민들이 집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드는 소위 보통 소금이 널리 퍼진다. 문제는 이 보통 소금에는 요오드가 거의 들어 있지 않다는 것. 서구 국가들은 건강에 아주 중요한 원소인 요오드를 소금에 반드시 첨가하도록 법제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도는 독립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요오드가 없는 보통 소금이 주류였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주 정부들이 보통 소금을 금지하려 했지만 큰 저항에 부딪힌다. 요오드를 섭취하지 않으면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고, 갑상선은 여러 호르몬의 생산과 분비를 조절하기 때문에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심지어 정신 지체를 유발하기도 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 역사적 사실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증거로 들었다. 러셀은 말한다. ˝생각하는 데 쓰는 에너지는 화학적 기원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요오드 결핍은 똑똑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정신적 현상은 물질적 구조에 속박돼 있는 것 같다.˝ 즉, 인간의 이성과 감정과 기억이 뇌 속에 있는 물질적 조건에 의존한다고 본 것이다.

주기율표의 순서는 해당 원소 원자핵의 양성자 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기율표 아래로 가면 방사성 원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원소 연구의 주체가 화학에서 물리학으로 옮겨가는 것이 곧 19~20세기 과학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마리 퀴리가 노벨 화학상과 노벨 물리학상을 차례로 수상한 진기록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책의 구성상 이 역사가 잘 정리되지 않은 채로 책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점은 못내 아쉽다.

사실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할지 좀 난감했는데, 책이 온통 원소에 얽힌 자잘한 에피소드와 이에 딸린 소소한 지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주기율표라는 소재만 있을 뿐, 책을 관통하는 확실한 주제가 있는 게 아니라 감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원소에 대한 과학적 트리비아 덩어리인 이 책이야말로 내 지적 허영을 가뿐히 채워 줄 수 있었지 싶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머릿속이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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