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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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의 한적한 바닷가 시골 마을 라임. 그곳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 귀족의 아들 찰스, 부유한 상인의 딸 어니스티나, 그리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 사라는 난파선에서 표류한, 중위 계급을 참칭한 프랑스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 찍힌다. 찰스는 어니스티나와 약혼한 사이지만, 촌동네인 라임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인 사라에게 이끌린다. 빅토리아 시대 - 이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이다 - 의 숙녀상과는 거리가 먼 사라는 이후 20세기 초에 등장하는 신여성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소설을 쓴 존 파울즈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로 불리우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그의 대표작이다. 언뜻 빅토리아 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소설 곳곳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손길을 찾아낼 수 있다. 작가가 스스로 작품 속에 등장인물로 현현하여 이후 펼쳐질 플롯을 설명한다든지,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행태에 대한 고충을 서술한다든지, 작품의 결말을 여러 가지로 만들어 독자가 선택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지금이야 흔한 기법이지만 이 소설이 발표된 1960년대엔 꽤나 생경했을 터다.

하지만 이 소설을 잘 읽어보면 이러한 서술 기법만으로 찬사를 받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껍데기는 흔한 빅토리아 시대 연애 소설 같지만, 그 속살은 세 명의 주인공이 얽힌 이야기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인간상과 시대상을 낱낱이 벗겨내어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 파울즈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찰스와 사라가 서로에게 변증법적 영향을 미쳐 비로소 20세기적 인간상이 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는 인습과 규율에 얽매인 때였지만, 동시에 자유와 해방 사상의 싹이 움트던 때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신구의 충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개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숨막히는 갑갑함을 못 견뎌 해서 이 소설을 읽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루한 초반부를 거쳐 서사가 누적되는 중반부를 넘기면서부터는 급격히 이야기의 흡입력이 높아잔다. 61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44장부터 독자가 마음을 꽉 붙잡아야할 정도로 속도를 높이며, 마지막 두 장에선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한 밀도를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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