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ft 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어내는 건 무척이나 고된 독서경험이었다. 1천 페이지 동안 삽화 하나, 사진 한 장 없이 활자로만 가득찬 책. 학술 논문을 읽는 듯 지극히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에 수없이 많은 각주는 독자를 질리게 한다. 두 달 넘게 독서라기보다 노동에 가까운 행위를 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좌파의 본원인 유럽의 장대한 이념적 역사를 총망라한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위대하다. 또한 방대한 학술서에 가까운 이 책을 간단히 몇 줄로 리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여기선 아래와 같이 역사 속 좌파 이데올로기의 인상적인 편린을 묘사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한다.

1.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인식과는 달리 산업혁명 시기 노동계급의 단일성은 신화에 가까웠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았던 수공업 중신의 숙련노동자들과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공장 프롤레타리아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비단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만이 아니라 출신 지역, 종교, 언어 등에 따른 문화적 정체성도 단일한 노동계급의 창출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이 단일 노동계급의 신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가부장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계급과 빈민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부르주아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노동계급의 여성은 고정된 ˝정숙한˝ 젠더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2.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은 ‘정통 마르크스 주의‘에 매몰되어 현실 사회를 이념의 틀에 짜맞추려는 극도의 경직성을 보였다. 이를테면 20세기 초반 독일엔 500만 명이나 되는 소농이 존재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은 소농들에 대한 지원이 자본주의의 확대에 따라 소멸될 운명인 낡은 농업형태를 구제할 뿐이라며 지원안 자체를 기각했다. 그들에겐 공장 프롤레타리아만이 진정한 노동계급이었던 것이다.

3. 마셜플랜은 트루먼독트린과 결합하여 전후 유럽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좌파를 효과적으로 위축시켰다. 미국에겐 유럽의 좌파에 의한 자생적인 사회개혁보다 반공주의의 세력화가 중요했던 까닭이다. 미국은 마셜플랜의 대가로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의 추방을 요구했고 유럽 각국의 보수반동세력은 이에 기꺼이 응해 온건좌파마저 난도질해버렸다. 이는 반공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 - 억압적 노사관계, 생산성에 대한 집착, 낮은 임금인상율 - 이 서유럽에 이식됨을 의미했다.

서유럽에 마샬플랜이 있었다면 동유럽엔 스탈린주의가 있었다. 전후 움트기 시작한 좌파 내 자유로운 사상의 물결은 동유럽 각국 공산당에 대한 모스크바의 개입과 잔혹한 숙청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혐오스러운 솎아내기 과정에서 레지스탕스나 유대인들이 입어야 했던 고난은 나치 시절과 별다를 바 없을 지경이었고, 질식할듯한 광신적 분위기 아래 좌파의 창조성은 완벽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좌파 - 정확히는 사회민주주의자 - 는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의 전통에서 벗어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좌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 대신 개혁을 선택하여 복지국가와 보편적 참정권, 여성 인권 등의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얻어냈고, 이를 기반으로 의회정치에 탄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 재림 마냥 언제 올지 모를 자본주의의 몰락 대신 비교적 평등하고 영속적인,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번영을 바라게 되었다.

4. 전후의 68혁명은 국가권력은 물론이고 좌우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대공황을 몸소 경험하고 파시즘에 대항해 전쟁을 치렀던 좌파들에게 개인의 욕망과 일상의 정치를 말하는 68세대는 무척 당황스러운 ‘아이들‘이었다. 혁명의 수단으로 록음악과 마약, 장발을 내세우는 젊은이들에게 이 구좌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겪은 고된 역사를 무기 삼아 훈계와 협박을 일삼는 것 뿐이었다. 신좌파가 등장한 68혁명은 프라하의 봄과 더불어 좌파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스탈린주의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길고 긴 좌파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의회 정치로의 진입이냐 대중 투쟁의 지속이냐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이었다. 지금 한국의 좌파의 자리매김은 어떠한가. 의회 정치로 진입하여 좌파다운 의제를 설정할 능력이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이전에 현장 투쟁의 동력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연대, 저항, 계급적 평등 같은 좌파의 핵심가치와 대중의 거친 욕망이 어긋난지 오래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좌파가 설 자리는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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