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선 - 인간의 역사 아우또노미아총서 60
마커스 레디커 지음, 박지순 옮김 / 갈무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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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영국에서 노예 해방의 결정적인 단초가 된 그림. 서부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사이 중간항로를 따라 대서양을 횡단하며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노예선 브룩스 호의 조감도이다. 배를 빙 돌아가며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히 누워 있는 294명의 노예들. 그들은 말 그대로 ‘화물’로 적재되어 있었다. 층층이 겹쳐져 일어날 공간조차 없이, 옆 사람과 더불어 족쇄에 매여 몇 달을 견뎌야 했다.

삼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노예선은 1,240만의 노예들을 실어 날랐고, 도중에 180만명이 질병과 폭력으로 인해 사망했다. 죽은 노예들은 배 밖으로 던져져 상어밥이 되었다(상어들은 노예선을 따라 대서양을 횡단하곤 했다). 팔려간 노예들은 설탕과 면화를 생산했고,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를 형성했다. 노예선은 그 자체로 잔인한 폭력의 수단이었고, 상업과 전쟁의 도구였다.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나무 기계인 노예선. 그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선장은 노예는 물론이고 휘하 선원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서부 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를 싣고 북중미로 가서 팔아 치우고, 다시 설탕이나 면화를 싣고 유럽으로 돌아와 이윤을 남기는 국제 자본주의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 구도에서 노예선 선장의 위치는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노예선 내에서는 선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률적, 사회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노예선은 때때로 경쟁 국가와의 전쟁에도 동원되었다. 노예선이면서 동시에 사략선의 역할도 떠맡았던 것이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상존했기 때문에 노예선은 다량의 무기와 화약을 싣고 다녔고, 이는 언제든지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다.

대서양사 전문사가인 저자 마커스 레디커는 2007년,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맞아 이 책을 출간했다. 가해자인 영국과 미국은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애써 외면했다. 역사의 진실은 외면한다고 해서 잊혀지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노예선에 실려 신대륙으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뱃동지’가 된 노예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특유의 흑인 문화를 형성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노예선에서 시작된 인종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의 <검은 꽃>이 떠올랐다. <검은 꽃>의 인물들은 자발적으로 배에 올라 멕시코로 떠났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예로서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을 당했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노예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세상이 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채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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