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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문화정치 - 게릴라총서 8
이광석 지음 / 문화과학사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20세기 말에 들어서 새롭게 등장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 사이버 공간. 이 공간을 통해 문화는 생성되고 문화 이면의 계급, 성, 인종 문제에서 비롯된 정치적 투쟁 역시 각인된다. 사이버 문화 공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새로운 공간은 이제 삶과 세계를 변혁하려고 하는 개인 및 집단에게 무시할 수 없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장소로 다가오고 있다. 이런 생각은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바이지만, 이광석의 이 책을 보고 더 확실하게 사이버 공간의 정치적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만큼 이 책은 설득력있게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득력은 외국의 사이버 정치의 활동상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빠띠스타의 인터넷을 이용한 선전활동, 배드 서브젝트의 정치적 교육의 장으로서의 네트 활용, 사이버 펑크 작가들의 현재의 사회적 모순을 미래로 투사해서 더 현실성을 성취해 낸 예, 해커들의 아나키즘적 활동, 전자 프런티어 재단의 네트의 민주화와 네트 상의 인권보장 운동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활동 집단들을 소개함으로써 네트 공간이 정치적 장으로서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사이버 정치가 현실적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선 일부는 귀동냥으로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새로운 정보를 이 책은 나에게 제공해준 셈이다. 사실 읽으면서 고마움까지 느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활동이 실제 활동, 사빠띠스따의 게릴라 활동이나 시민단체의 거리 시위 등, 몸으로 하는 활동을 대체시켜주진 못한다는 균형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 무게와 신실성이 있어 보인다. 사이버 정치를 너무 강조하다 사이버 상에서의 담론 활동이 곧 민주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직접적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리력을 갖춘 국가와 자본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되고, 곧 공허한 정치, 결국 수사적인 저항에 그치고 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도 동의하겠지만, 이런 사이버 공간을 과소 평가하는 좌파 정치 집단 역시 문제가 있다.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집단은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하고 여러가지 형태의 실천을 시험해야할 것이다. 어쩌면 사빠띠스따는 생사의 기로에 있는 절박한 실천 집단이기에 사이버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일지 모른다. 절박한 그들은 어떤 가능성의 싹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 싹을 틔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한국 저항 정치에 있어서 역시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에 대해 소개해준 셈이다. 한가지 문제점으로 짚히는 것은 이런 실제적 소개 뒤에 너무 일반론적인 결론으로 책을 맺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지만, 새롭지만 급박한 탐구 영역을 개척한다는 이 책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말을 탄 채 한 손에 총, 한 손에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는 사빠띠스따 게릴라들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전근대, 근대, 포스트 근대가 한 몸에 결합된 저항집단을 그 모습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아마 불균등 발전이 중첩되고 모순된 상태로 있는 제3세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저항집단도 그에 맞추어 저항 양태를 신축성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을 더 진행시키면, 이 모습은 근대/전근대/포스트 근대라는 경계선을 무화시키면서 현재 상황이 근대냐 포스트 근대냐라는 시대 규정 및 그에 따른 저항 전략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저항전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적 권력의 상징인 총과 담론의 배제를 통한 통제 전략으로 권력을 구사하는 포스트 근대의 상징으로서의 노트북은 저항에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근대라고도 할 수 있고 포스트 근대라고도, 또한 세계적으로 볼 때 전근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시대에 맞서 복합적 저항 전략의 필요성을 일깨워준 것이 사빠띠스따 아닐까. 근대와 포스트 근대의 논쟁을 횡단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