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등신불 시편 - 김종철 시집
김종철 지음 / 문학수첩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시의 저항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바로 언어의 色 속에서 空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無임을 잊어버리고 강고한 물질이자 권력이 된 현대의 언어에 구멍을 내는 '게릴라'의 싸움일 것이다. 색과 공의 엉킴을 사색하면서 쓰여진 시편들을 담고 있는 김종철의 신작 시집 {등신불 시편}에서 필자는 이런 '게릴라'를 보게 된다. 이런 게릴라 전술을 시인이 의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필자는, 사실 좋은 시인들은 물화된 삶을 균열시키는 게릴라 전사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관심은 각 시인들의 게릴라 정신은 무엇이며 그 전술은 어떤 것인가에 있다. 김종철의 이 시도 예외가 아니다.

김종철의 시들은 매우 철학적이다. 물론 세계에 대한 사유를 담는 철학은 게릴라와는 거리가 멀 터. 철학함은 게릴라와 같은 전술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전략을 짜는 큰 틀을 마련하기 위한 사색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시가 철학적 사유를 담되 게릴라와 같은 전술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와 있음 사이에 있는 언어와 삶의 역설 자체에 대해 사색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언어를 조직하여 언어와 삶을 받치고 있는 심연을 드러내면서 삶의 역설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동화되고 굳어진, 물화된 삶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들에 '낯섬'으로서 충격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무의식화되고 자동화된 우리의 상식과 믿음, 생활의 부스러기에 불과하게 된 행복의 꿈, 이런 것들을 바로 무의 문턱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의 철학을 내세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언어와, 그것에 의해 조직된 삶을 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삶을 무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는 무와 물질, 공과 색의 뒤엉킴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 뒤엉킴의 자리가 김종철의 시에서 육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언어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육체는 그냥 있는 것이지만 의미화되지 않았을 경우, 그 측면에선 무와 같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의미의 세계로 가득 들어찬 우리네 세계는 언어-의미에 오염되지 않는 육체는 없을 것이다. 정신의 육체에 대한 정복 과정이 바로 문화의 역사 아니겠는가. 시인은 유와 무가 뒤엉킨 자리라 할 육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바로 의미화된 육체의 의미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모더니즘 -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리차드 아피냐네시 지음 / 이두 / 1996년 4월
평점 :
절판


워낙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주제가 광범위하고 그 내용도 어려운지라, 낯선 내용도 많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200면 안쪽의 책으로서, 그리고 적은 분량의 활자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정리된 책도 보기 힘들 것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포스트모더니즘의 계보학에서는 예술운동을 중심으로 모더니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모더니티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자체가 역설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더니티가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말한다면 모던을 넘은, 혹은 지난 포스트모던 역시 모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말, 과학 기술의 발달에 의한 문화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특히 예술, 미술을 통해 그 문화혁명을 이 책은 소개해주고 있다. 그것은 사진의 발달로 인한 미술에서 재현의 위기로 촉발된다. 미술은 이제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는데 그 목표를 두지 않는다. 세잔느, 피카소, 입체파를 거쳐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추상화에서는 '현실의 모든 자취를 제거'(25면)하려고 한다. 다다와 폴록의 추상 표현주의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해진다. 이로써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소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아우라는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와 전시장에 전이된다. 뒤샹의 복제 예술을 보면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워홀이란 작가와 전시장이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할 수 있다.

보이즈의 설치 예술... 뒤샹의 비판(41-42면)-네오 아방가르드는 다시 미학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즉 변기를 미학적 아름다움으로 찬양하고 있다... 기성품은 복제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현장은 미니멀리즘과 개념예술로 나아가고 있다.(43-44) 예술의 자기 폐지를 향해 전진하는 예술이라 할까. 아우라는 이제 소비주의적 아우라로 전이된다. 오래 전에 제조된 기념품들(전축같은 것)이 아우라를 띤다. 심상 소비주의. 예술을 전시하고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미술상들. 이들은 반예술도 예술화시키고 예술가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재편하여 판매에 이용한다. 보드리아르는 예술의 과정을 4단계로 보여준다.(54-55) - 1. 현실의 총체적 침투, 2, 현실을 은폐 왜곡, 3. 현실의 부재, 4.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자신의 순수한 모조품.

2부와 3부에 대한 정리는 지면의 부족으로 생략하겠으나, 어쨌든,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간명한 해설서를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길주 옮김 / 푸른숲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19세기 러시아와 20세기의 한국은 한국이 식민지 경험을 거쳤다는 점에서 식민지 경험이 없는 러시아와 큰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점도 있다. 서구를 바라보며 따라가려는 후진 사회라는 점이 그 하나요, 서구를 따라잡으려다 보니 문화적으로는 서구 자유주의의 물결에 영향을 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전제정치의 강압에 지식인들을 포함, 민중들이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는 점이 또 하나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글을 썼다.

도스또예프스키로서는 러시아 지식인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서구의 실체를 알아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젊었을 때부터 갈구했던 유럽여행길에 도스또예프스키의 정치적 문제(그는 사형수였다!) 때문에 오르지 못하다가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여행길에 올랐다. 이때의 여행기가 바로 이 책이다.

그런데 유럽은 도스또예프스키의 기대와는 달리 많은 문제들로 뒤덮여 있었다는 점을 이 책은 작가적인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여 보여준다. 이른바 근대성의 문제에 서구가 병을 앓고 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서구는 따라가야 할 모범이 아니었다. 서구의 길은 러시아가 앞으로 피해가야 할 부정의 케이스였다.

그가 주목한 것 중에 흥미로운 점은 바로 군중의 발견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에 의해 지하의 암흑 속에 버려진 이들'이라고 도스또예프스키는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동-물질의 위력을 바알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바알신은 사람들을 물질의 노예로, 술과 방탕에서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박에 없는 무기력한 자들로 만든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도스또예프스키는 선진제국 속에서 추출해낸다.

선진 자본주의를 쫓아가려는 후발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도스또예프스키의 비판적 시각은 교훈적이다. 우리는 선진 자본주의를 찬양만 하고 뒤쫓으려고만 하지 않는가? 어쩌면 후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선진국의 문제점들을 도스또예프스키처럼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선진국의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의 그들의 생활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기에 버려 문제들을 문제로서 바라보기 힘들다. 그 사회와 다른 사회에 사는 도스또예프스키와 같은 처지의 동양의 우리들이 선진국의 문제점들을 더 많이 파악하고 그들에게 역으로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의 3부는 도박꾼이었던 도스또예프스키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3부는 도박꾼의 강박관념이 솔직하게 표현된 편지글 모음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소월 시 전집
윤주은 / 학문사(학문출판주식회사) / 1994년 9월
평점 :
품절


김소월의 시들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는 쓸쓸함, 암울함, 슬픔이 대부분이다. 그의 시에선 '운다'라는 시어가 너무 자주 등장한다. 좀 짜증이 날 정도... 그러나 시 한편 한편은 치밀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 역시 '거대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대시가 갓 등장한 당시로서는 감성을, 그리고 분위기를 이 정도 무리 없이 잘 엮어 내려간다는 것은 천재적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으리라.

그의 까닭 없는 슬픔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그리고 무덤가의 쓸쓸한 정조를 그가 즐겨(?) 그린 것은 왜일까? 시인의 개성일까? 아니면 경험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무덤에 비유한 것일까? 그렇지만 소월의 건강한 시를 근거로 소월의 슬픔이 민족 상황에서 유래한다고 일직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소월의 슬픔엔 형태가 없다. 그러나 당시 일반 민중의 정서를 향토적, 농민적 언어로 집어냈다고는 생각된다. 물론 민중의 정서를 '슬픔'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될 것이지만.(분노, 생기 등을 민중적 정서로서 보지 않는다면 민중의 힘을 거세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월은 이 슬픔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슬픔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슬픔을 고향 상실감으로 구체화시켜 보여준 시인은 후대의 백석이나 이용악 같은 시인들이다. 소월이 보여주지 못한 것을 이들 후배시인들은, 소월의 정조를 이어받으면서, 더 나아가 보여주었다. 특히 소월이 창출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방랑자로서의 시인 상은 백석이 이어받는다.

그리고 민중의 슬픔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를 분노라는 민중의 다른 정조와 연결하여 '혁명의 불길'로서의 생명력과 슬픔을 융합하여 보여준 시인은 신동엽이다. 비록 소월이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월이 개척해 놓은 슬픔의 정서는 후배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소월은 역시 국민시인으로서의 위치를 여전히 갖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시간 창비시선 152
백무산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평점 :
품절


80년대-90년대 초의 노동문학이 과학적 진실의 선전, 행동을 위한 선동, 자본에 대한 비판, 풍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지만, 그것이 일면성을 벗어나려면 좀 더 큰 세계관, 우주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집은, 첫 시집 이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시인이 결코 활동을 멈춘 것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세계를 넓히려는 사상적, 문학적 노력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 시집이 이전 백무산 시의 투쟁성이 탈각되어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갔다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시행을 보면 백무산의 새 시편들이 그의 첫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의 연장선상의 발전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너와 나의 관계에도/ 아침에 먹은 밥상 위에도/ 국가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있다/ 지배와 착취의 질서가 고스란히 박혀있다/ 부분이라고 전체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중에서)

인용 시의 4행까지는 백무산의 예전 시를 보는 듯하다. 그것은 백무산이 예전의 당파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사고가 좀 더 깊이 있게 변모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다섯째 행에서 나타난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분을 통해 전체를 봄으로써, 부분을 하나의 틀 속의 요소로 보지 않고 부분이 자체 소우주를 가지고 있음을 통찰하려는 자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 시에서 보여주었던 사회과학적 인식의 시적 변용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부분에 대한 시적 통찰을 하겠다는 것, 또는, 불교적 통찰을 시도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서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사고에서 '모든 것이 전체'라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의 눈을 가녀린 자연물들에게로 돌리고, 그 관찰을 통해 '운동의 힘'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시에서 '뿌리와 가지를 먹고 자랐으나/ 그들과 단절한 꽃을 보아라/ 우리의 경계는 그곳에서도 시작된다'([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중에서). 그는 가녀린 꽃에서 단절의 힘, 혁명의 힘을 보게되는 것이다.

백무산의 시는, 노동문학의 소생은 아마 좀 더 큰 세계관을 획득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당파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