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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밝은 시간
배인환 지음 / 문학아카데미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골짝과 들을 지나 강이 된 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도시의 하수구를 지나 강이 된 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삼라만상의 몸 속을 흘러 강이 된 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모든 것들은 정이 되어
그리운 어머니 가슴으로 흘러들 듯
바다로 흘러든다.
- [강물은 바다로]
왜 강물은 바다로 흘러드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물의 어머니요, 고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이때 강물은 삶 자체, 추억과 세월을 표현하게 된다. 흐르는 삶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멈추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이들에게서 흐르는 삶-강물은 성장이다.
'아이들 사이로 주일이 흘러간다./ 강물은 멈추는 일이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배우고 성장한다.'([콩나물] 중에서)라고 시인이 말하듯이. 성장과 함께 삶의 흐름은 '많은 것'을 지나간다. '길 옆에 많은 것이 그치고 지나간다./ 바람과 물, 흙, 먼지, 탄생, 어머니의 사랑, 이별'(위의 시에서)같은 것들이.
우리는 성장하지만 또한 이별한다. 탄생하고 사랑 받지만 또한 이별한다. 그래서 강물은 성장에서 추억으로 변하고 '흐르는 물'에 대한 시편은 추억의 시편으로 나아간다. 배인환의 시에서 어버지에 대한 회상이나 죽은 누이에 대한 슬픔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삶을 바다를 동경하며 흐르는 물과 같이 보는 시인의 관념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추억은, 바다로 가고싶다는 물의 꿈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다에 안착할 수 없듯이, 붙잡을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잡아보려던 안타까운 이미지/ 그것이 꺼진 후에 맛본 쓰디쓴 허망/ 유년시절에 움켜쥐던 어머니의 젖가슴/ 혀끝의 비린 감촉'([쪽빛 오랑캐꽃] 중에서)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졌던 그 추억은 꿈으로만 남지 다시 오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 추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물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이 반자연적인 것일지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허상일지라도 삶을 이끄는 힘은 바로 이 허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추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을 정지시키는 것과 같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추억을 안고 사는 것이 삶일지 모른다.
추억은, 대상을 명료히 보면 드러나지 않는다. 추억을 살리기 위한 시선은 빛 속에 드러나 있는 대상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그 형태에서 파생되는 다른 흐릿한 무엇을 찾아내는 시선이다.
그가 '그림자'를 자신의 시적 탐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림자를 보는 비법(秘法)을 알기 위해/ 시를 썼다'([그림자 보기] 중에서)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시 몇 편은 이 그림자를 드러내는 데 바쳐져 있다. 가령,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아주 불길한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다
이름도 음습한 사형대
그런데, 누가 그곳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나
신성한 그림자
흡사 밤의 어둠이
밝은 낮을 만들듯이
어두운 밤은 홀로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리기에 적당하다
-[기도] 중에서
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든 십자가의 그림자를 찾아내기도 하는데, 이 그림자는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명료한 시각으로는 잡히지 않는, 홀로 기도를 드리기에 적당한 어두운 밤에서야 비로소 그림자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료히 말할 수 없다. 그가 찾아낸 그림자에서 우리는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경험하며 그림자의 존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물에서 그림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사랑을 찾아낸다는 것이요, 그 사랑은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