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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 문화마당 4-009 ㅣ (구) 문지 스펙트럼 9
정과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1월
평점 :
문학 평론가인 정과리의 이른바 문명 비평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상사 속 지나치기 쉬운 사건들, 현 문화의 이미지에 대한 열광, 영화 등에 성찰한다. 특히 컴퓨터 문화에 대한 성찰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화 속에서의 문학을 생각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어 문학 평론가의 본령을 잊지 않고 있다.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가 펜으로 쓰던 글쓰기와 어떻게 다른 의미를 띠고 있으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네트 상의 문학 동아리가 과연 문학의 민주화를 달성하고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그 예인데, 컴퓨터 문화에 대한 시대적 인류학적 사유를 진행시키고 난 후의 성찰이라 피상적이지 않고 무게가 있다.
저자의 현 디지털 문명에 대한 관점은 비판적이지만 부정적이지는 않다. 현 문명의 발전 형태와 진행 방향에 대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려봤자 태양은 떠 있듯이, 등을 돌린다고 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일군의 문학 비평가나 문학인들이 디지털 문명에 대해 혐오를 표시하며 자연 친화적 사상으로 무장하려는 것에 비해 현 문명에 더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듯하게도 보인다. 저자는 디지털 문명의 방향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이를 그냥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명의 문제점들을 그는 지적하려 한다. 그 문제점들, 그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문명의 배꼽'이며, 그 '풀릴 수 없게 엉켜있'는 지점, '배꼽'을 투시하는 노력이 바로, 저자 자신이 비평 작업의 모토로 삼은 '깬 채로 홀리지 않기'(20면)이다.
왜 깨어 있는가? 현 문명이 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문명의 흐름에 끌려 다니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문명이 자동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구조와 '전문가'에 의해 부여된 체제 속에서 틀 지워져 흐른다고 본다. 지금 문명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가장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그 자유는 이미 구조화되고 틀 지워져 있다는데서, 그리고 그 틀에 대한 반성이 교묘히 원천 봉쇄되었고 그 의욕도 생성되기 힘들다는데서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미혹의 문명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게 저자의 주장이고 그 작업이 이 책을 이룬 것이다.
디지털 문명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깬 채로 비판적으로 투시하려는 것은 저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반란은, 전복은 항상 내부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문명의 내부를 투시하는 것은 바로 반란의 지점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매끈한 컴퓨터 세상의 금간 곳을 찾아내려고 한다. 자신이 혹시 아날로그 세대가 아닌가, 잠시 멈춰서서 생각도 하지만, 그 역시 컴퓨터 속의 네트 '항해'를 즐기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불공정한 비판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디지털 문명의 균열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되곤 한다. 오문에 대한 결벽증을 보였던 문학 비평가가 어떻게 오문을 쓰게 되었는가를 컴퓨터식 글쓰기의 맹점과 연관시킨 것이 그 한 예다. 내가 동의하고 있는 이 책의 관점도 좋았지만, 이런 자신의 삶에서 문명의 반성을 이끌어내는 태도 역시 성실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전복은 또한 자신의 내부에서도 찾아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그야말로, 비판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텅빈 시니피앙으로, 사람들을 끄는 유혹의 이미지만으로 전락할 것이기에.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날카로움이다.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비판이나, 네트를 통해 읽은 네트 찬양론에 대한 비판 등, 유명 학자, 전문가에 과감히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고유의 사유를 진행시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갖출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위 신세대 문학이 상업적으로 구성된 범주라는 비판, 컴퓨터 기능의 한계 등에 대한 지적도 역시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에 대해 환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좋은 문명 비평서를 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