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대한 예술가는 무엇을 훔쳤을까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정상희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차용이란 것은 가장 강력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다. (중략) 어떤 예술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10)."
제목이 도발적이다. 위대한 작품은 오로지 위대한 예술가의 창의성으로 완성될 것 같지만, 실은 누군가에게서 훔쳐온 것이라는 사실을 단정한다. 어떤 예술가가 무엇을 훔쳤을지 궁금하다.
저자는 미술사학자이자 아트 스토리텔러이다. 책은 6개의 주제인 영감의 기원, 배움의 여정, 아이디어의 순환, 영향의 흔적, 연결의 순간, 변형의 기술로 나누어 미술사에서 유명한 129점의 작품이 실은 작가의 100% 창작이 아님을 비교 분석한다.
"파블로 피카소가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중략) 모방하는 것은 일시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의도를 전제로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다. 반면 훔치는 것에는 그러한 전제가 붙지 않는다. 일단 취하면 자신의 것이된다(8)." 저자는 예술가는 소극적 모방보다 적극적 '훔치는 행위'를 통해 과거의 예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확장시켜나간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화가는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직접 스승에게서 배우거나, 스승이 없다면 미술관에서 유명한 작품을 모사하면서 혼자 배운다. 선배들의 기법과 색채, 구도, 상징과 서사를 모방하다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동료 화가로 부터 아이디어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 한 화가의 작품을 보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작품 속 인물의 의상, 자세, 특정 몸짓이 과거의 작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혹은 원작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였는지를 분석해낼 수 있다.
반 고흐는 정규미술 수업 대신 독학을 선택햇다. 사실주의 대가인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는데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1850)과 고흐의 모사작품(1881)은 아주 비슷해 보인다. 또한 일본 판화를 수집하면서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매화 정원>1857를 모사한 <꽃 피는매화나무>(1887)은 한자까지 따라 그려넣을 정도로 유사하다. 두 작품은 한 화면에 모이게 된다.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1888)은 히로시게의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나무와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며, 두 작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물을 묘사할 때 의상, 자세, 어떤 특정 포즈가 과거 미술과 연결되는데,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방어군의 처형>이 그렇다. 그림 속 흰 셔츠를 입은 사형수는 양팔 벌린 십자가의 그리스도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2세기에 '승리하신 그리스도'라는 조각을 참고했으리라 추측한다. 그 상징적 의미는 서로 통한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인간의 육신에서 해방되어 인류를 구원하고 천국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의연함을 보여주고, 고야의 작품 속 인물은 처형하려는 자들을 쳐다보며 신성한 정의를 품은 채 맞선다. 포즈를 통해 그 상징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감상이 수준 높다.
엄숙하고 높은 가치를 가진 명작들을 모욕하는 수준의 뒤샹의 작품은 예술작품인가라는 의문을 품게한다. 이미 판매되고 있는 <모나리자> 엽서를 사서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제목으로 <L.H.O.O.Q>(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라 쓰고 자신의 작품으로 내놓는다. 다빈치가 살아돌아왔다면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량 생산된 엽서에 수염을 그리고 모욕적인 제목을 단 것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받아 들이기 어려워보인다.
한 화가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작품이 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비교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한 작품 속에 여러 선배의 작품이 녹아있는 것을 전문가의 눈으로 분석해 주고 있어서 만족스럽다.
서양미술과 화가들에 관심이 있다면 감상하는 시야를 넓혀줄 책이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