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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ㅣ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평점 :
최근에 읽은 <멋진 신세계>(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3대 작품 중 하나다. 미래의 모습이 겉으로는 평화롭고 갈등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수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사회다. 어찌 보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이 없이 완벽한 세계이지만 철저한 계급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지고, 비판이나 불만없이 시스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암담한 세계이기도 하다. 이 책 <유토피아>는 시민들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지도자와 선한 사람들로 구성된 플라톤이 그렸던 이상적인 국가를 구현한 도시를 그리고 있다는데 과연 어떠할지 궁금하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우토피아)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과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좋은 곳은 세상에 존재하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책은 2권으로 이루어져있다. 1권은 저자 토마스 모어가 라파엘로부터 유토피아 공화국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사유재산이 모든 사회악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2권에서는 사유재산이 폐지된 유토피아라는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상세히 묘사한다. 말미에는 여러 사람이 유토피아를 읽고 쓴 서신과 시들을 수록하였다.
저자 토마스 모어(1478-1535)는 런던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수도사의 삶을 동경하며 고행을 실천하며 수도사처럼 살기도 하고, 성서와 교부철학,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에라스무스, 존 콜릿과 같은 르네상스 학자들과 친분을 쌓고, 1529년 대법관이 되었으나, 헨리8세의 이혼문제로 충돌하면서 1535년 반역죄로 사형당했다.
토머스 모어는 대법관을 할 정도의 당시의 지도층 인물인데, 왜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을까? 당시 시대상황을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영국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치며 무법천지가 되었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부유한 귀족들은 공유지를 사유지화하면서 농민을 내쫓고 그 땅에 양을 키워 비싼 양모를 팔아 이득을 남기며 날이 갈수록 부유해지고, 농민들은 떠돌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상황이었다. 모어는 이를 비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이 사유재산이 없이 재산을 공동소유함으로써 평등하고 행복한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후에 칼 마르크스(1818-1883)의 <자본론>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야기는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섬에 다녀온 포르투갈인 라파엘 히틀로다이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형식이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그 섬의 모습과, 도시들, 관리들, 직업, 사회조직, 여행, 분배, 양육과 학문, 노예, 전쟁, 종교에 대해 묘사하고 설명한다. 섬에는 똑같이 생긴 54개의 도시가 있고, 사람들은 같은 양모 옷을 입고, 집은 10년마다 돌아가며 살고,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노예가 있어서 도축이나 불결한 일을 처리하고, 가장을 중심으로 아내와 아이는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관리인과 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루 6시간을 일을 하고 생산물은 공동소유한다. 금과 은은 노예의 사슬로 사용하는 세상 천한 물건이고, 철을 확보하기 위해 무역을 한다. 전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높이 사지만, 싸워야할 때를 대비해 남녀가 모두 훈련을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만 일을 해도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데 충분하다는 상황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인구의 절반인 여자들, 수많은 성직자, 불한당같은 대지주, 병자행세를 하고 다니는 거지들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반면, 유토피아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하고, 일을 안하는 불필요한 직업을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노동으로도 충분한 생산을 만들어낸다. 남는 시간에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고 배우기를 힘쓴다. 이것은 <거대한 분기점>에서 네덜란드 사상가 루트허르 브레흐만의 주장을 연상케한다. 그는 쓸데 없이 일을 하지 않는 모든 직종의 '관리자'를 없애고, 생산을 하는 일자리만 증가시키되, 모든 이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하루 3시간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은 시간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을 읽으며 가능한 이야기인가를 의심했는데 모어의 설명을 들으니 일 안하고 소비만 하는 사람들도 일을 한다면 가능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유토피아의 사회제도에서 의외의 설정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식사는 관청에 모두 모여 먹는데 연장자를 공경하여 그들 앞에는 최고로 좋은 음식을 차리고, 여자와 청소년들은 서빙을 하고,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이 남긴 음식을 먹는다. 어찌 보면 '동양의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또한, 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지만, 환자가 고통을 끝내고자 한다면 스스로 자살을 택할 수 있다는 점은 카톨릭을 신자인 저자에게는 획기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한다. 혼전순결을 강조하고, 결혼 전 서로 알몸으로 상대에게 있을 육체적 결함을 찾아내는 의식 또한 놀랍다. 설명에 의하면, 집에서 키울 짐승을 고를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하물며 배우자를 고를 때 이 정도는 살펴야 서로 속이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혼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락되고 재혼도 제한적이다.
읽으며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여성의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가부장적인 봉건적인 사고방식도 있지만, 반대로 현재 유럽 여러나라에서 행하고 있는 복지제도는 상당히 닮아 있다. 저자가 법관으로서 '법은 단순해야 지키기도 쉽고 처벌하기도 쉽다는 것'을 강조한 저자의 소신도 설득력있다.
과연 이 완벽해 보이는 유토피아에서 산다면 행복하기만 할까? 매일 루틴하게 6시간 노동 후 책읽기와 배우기 외에 특별한 활동이 제한되어 있고, 죽어가는 환자에게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자살을 허락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에 자살을 권하는 사회라면 좀 두렵다. 남에게 피해 입히지 말아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의 생활을 절제하고, 자유연애와 결혼이 제한되는 사회라면 왠지 답답하다. 뭔가 지나치게 통제되고 있는 사회라는 느낌이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듯이 지나치게 완벽하기에 부족해 보이는 유토피아다.
유토피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저자의 상세한 묘사에 감탄할 것이다. 1516년에 쓰여진 고전이 현재 읽어도 많은 생각을 일으키기에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