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쎄 Strong Words - 말대꾸 에세이
딥박 지음, 25일 그림 / 구층책방 / 2020년 7월
평점 :
책 커버가 인상적이다. 앞 면의 저 계란 후라이같은 그림 아래 '아, 그때 받아쳤어야 했는데'라는 혼잣말이 있고, 책 뒷 면에는 노른자 같은 것이 튕겨 올라가는 그림 밑에 '이제는 말대꾸로 탁!'이라고 써있다.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치겠다는 이 책, 뭔가 굉장히 드세다.
딥박이라는 저자 이름만큼 특이한 자기소개가 인상적이다. 일자목 엑스레이 사진을 들이대면서 자신은 일자목이라 어쩔수 없이 짧게 쓴다고 밝힌다. 신뢰가 간다. 저자 말대로 책을 후루룩 넘겨 보면 시집같이 운율을 맞춘 듯 짧은 글과 삽화가 여유롭다. 글자만 빽빽한 책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읽기도 전에 매력에 빠진다.
책은 3장으로 되어있다. 1장 TV를 보다가, 2장 퇴근을 하다가, 3장 혼자 밥 먹다가다. 그러나 굳이 장을 나누지 않고 읽어도 좋다. 무릎을 탁치는 기발함과 깨달음을 주는 짧은 글들로 가득하다. 몇 개를 소개해보자.
소식이 궁금해.
(대식가)
엄마랑 싸우면 직방으로 오피스텔 시세를 알아보면 되고
상사랑 싸우면 잡코리아로 내 시세를 알아보면 된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스마트한 방법)
죗값을 달게 받겠다더니 진짜 교도소에서 꿀을 빨더라.
죗값을 치르겠다더니 진짜 돈만 내고 나오더라.
(언행일치)
질질 끄는 건 싫으니까, 일시불
덕분에 회사 또 끌려가 일, 시불
(일시불)
... (중략)...
우리는 인생에서 몇 장면을 빼고는
대부분 빛나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다.
햇살 좋은 테라스보다 남들과 똑같은 인공조명 아래에서
크게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눈부신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하면서 눈싸움하는 날보다
모니터 전자파나 정리되지 않은 문서파일들과
눈싸움하는 날이 더 많다.
...(중략)...
(기타 등등에서 기세등등)
한 단어의 이중적인 뜻을 교묘하게 잘 이용해 쓰기도 하고, 회사에 대한 불만도 쿨하게 담아내고, 씁쓸한 인생살이도 담고, 자기 비하도 했다가 자존감도 살렸다가, 말 장난같기도 하고 또 진지하기도 하다.
이렇게 명언과도 같은 문장을 만드느라 카피라이터와 같은 수고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는데 책 말미 부분에 저자가 카피라이터라는 힌트가 나온다. Enter의 미학에서.. 역시 그랬구나.
특이하게도 이 책은 글마다 맨 아래에 제목이 나온다. 그래서 읽어 내려가며 제목 맞추기를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정성을 많이 들이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 책은 읽으면서도 감탄스럽다. 늘 주고 받는 말인데, 흔하게 쓰는 단어인데 뒤집어 보거나 조금 비틀어 보면 정말 전혀 다른 뜻과 세계를 보여준다. 머리를 마구 쥐어짜도 잘 나오기 힘든 아이디어가 만연하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토로한 대로 645일간 523개의 글을 쓰고 그 중 절반을 덜어내고 가장 좋은 것들만 골랐다는데, 정말 애썼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을 하루만에 다 읽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뭔가 루틴한 생활에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곁에 두고 그때그때 찾아 읽으면 저자도 억울해하진 않겠다.
세상을 향해 쎈 말을 던지고 싶어도 잘 못한다. 단지 '그걸 누가 표현해주면 속이 시원할텐데...' 하는 생각이라면, 이 책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