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일본 작가라고는 히가시노 게이고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으면서 김난주라는 번역가 이름을 익히고 있었던 까닭에 왠지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저자인 에쿠니 가오리는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라고 한다. 저자의 도쿄타워가 내가 본 영화(키키 키린이 나온)일 거라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전혀 다른 작품이다. 어찌 되었든 좀 엉뚱하지만, 결론적으로 처음 보는 작가의 작품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친근감을 갖고 선택하게 되었으니 인연인가 보다. 감성적이고 소박한 글이 마음에 든다.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작가의 일상 생활을 보여주는 에세이와 짧은 소설의 모음집이다. 집에 머물 때는 자신의 글을 쓰거나,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 데에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가끔 지인을 만나러 나가거나 여행을 한다.

책은 '쓰기', '읽기', '그 주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쓰기'에서는 에세이와 소설 쓰기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일기를 보여준다. '읽기'에서는 몇 몇 책을 소개한다. '그 주변'에서는 외출이나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구분은 하였으나 저자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소곤소곤 꾸밈없이 들려주고 있어서 굳이 구분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곳에 올린 글들을 모았는데, 1990년대에 쓴 글도 있고, 가깝게는 2015년에 쓴 글도 있다.

저자의 엉뚱함을 보여주는 글도 재미있다. 저자는 책을 읽는데 80%를 쓰기 때문에 20%만 현실 세계에서 산다. 그래서 현실의 시간에 적응하기 어렵다며 에피소드를 들려 준다. 늘 다니던 CD점인데, 가보니 모두 없어진지 오래고, 20년 전에 은퇴한 야구선수 이야기에 여동생이 당혹스러워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현실과 진짜 현실 간의 괴리가 심하다. 그래서 한시 빨리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당혹스럽다.

글에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가득하다. 저자는 옛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죄다 끌어 안고 있는데, 1968년에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인 자기에게 보낸 엽서도 포함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신문에서 자기와 닮은 아이를 보고 가족이 엄청 웃었으니 너희 가족도 한 번 보라는 내용이다.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바삐 사느라 잊고 있던 일들도 가끔 떠올려 보면 아스라하다. 감성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도 아날로그적이어서 놀랍다. 팩스를 사용하는지 그 용지를 체크한다든지, 배달이 오면 도장을 찍어 준다든지 말이다.

'읽기'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책은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며 읽었다. 작게라도 책표지 사진과 그 설명을 달아 주면 어땠을까 싶다. 인생을 바꾼 책인 <플라테로와 나>는 어릴 적 읽은 책이라는데 한국어 번역서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고 싶다. 열 세살에 좋아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도 함께 말이다. 내심 어른들을 위한 서평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동화책과 어린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유명한 '마가릿 와이즈 브라운'의 그림책들을 번역하기도 한 것을 보니, 대단한 작가이긴 하다. 귀여운 토끼인 '미피 시리즈'를 아직도 기억하다니 의외다.

저자가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문구도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곳으로 떠나는 일이고, 떠나고 나면 현실은 비어 버립니다. 누군가가 현실을 비우면서까지 찾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게 되는 책을,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129)."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에 대한 멋진 말이 아닐까싶다. 영화<인셉션>이나 <매트릭스>처럼 현실의 시간을 버리고, 책 속에 빠져 버리게 하는 책을 쓰고 싶다니. 참 멋진 말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열렬한 팬이라면 솔직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책을 좋아하겠다. 그러나, 처음 접하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좋다. 꾸밈없고, 소심하지만 섬세한, 쓰고 읽는 것에 빠져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좋은 번역가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먼 기억'이라고 표현한 것은 역시 멋진 번역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작가의 말'만큼 '옮긴이의 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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