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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 산책 - 느리게 걷고 깊게 사유하는 길
윤재웅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평점 :
이십여년 전에 유럽의 몇 개국을 여행하며, 우리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른 유럽 도시들의 모습에 충격이었다.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울퉁불퉁 네모난 길바닥을 걸으며, 현대적인 도시에서 날아온 사람에게 유럽은 과거의 시간이 멈춰져있는 것이 아닐까했다. 그러다가 도심에 한 두개 낯익은 현대적인 건물이 오래된 건축물 사이사이에 끼어 있으면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한번 유럽을 가게 된다면, 여러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싶다. 미술관만 돌아본다거나, 유명한 건축가들의 건물을 돌아본다거나, 폐허처럼 남아 있는 고대의 유물들을 돌아보거나 말이다. 이 책은 인문학을 바탕으로 유럽의 세 나라를 돌아보는 여행기다.
저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세 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산책하다가 마음이 가는 곳에 오래 서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썼기 때문에 읽을 때도 조심스레 내 생각과 상상을 더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건축, 미술, 문학, 철학이 조금씩 가미되지만, 주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시구를 적어서 상당히 문학적인 책이다. 셰익스피어, 윌리엄 워즈워스, 릴케, 단테의 작품과 정지용, 미당 서정주, 윤동주의 시들도 만날 수 있다. 이를 테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별들이 바람에 따라 흐르는 길' 조각 앞에서 저자는 칸트의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 내 가슴에는 도덕률'이라는 묘비명을 떠올리고, 윤동주의 <서시>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떠올린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명한 대성당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영화촬영지를 방문하는 여행이 부럽다. <시네마천국>의 촬영지인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해변 체팔루, 영화 <일포스티노>의 촬영장소 살리나섬의 사진은 영화만큼이나 아름답다. 프랑스에서는 과거와 현대 건축물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히지만 점차 사람들의 생활속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흥미롭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된 유리 피라미드가 그렇고, 철골구조물로 파리와 어울릴 것 같지않은 초현대적 빌딩인 퐁피두센터가 그렇다. 스페인에서는 최근 한창 유행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사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처음 순교한 제자이다. 프랑스 남쪽 국경선에서 야고보(산티아고)의 묘가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800km의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부른다.
유럽을 다 커버하지는 않지만, 풍부한 예술과 건축이 아름다운 나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을 문학적인 소양을 기본으로 해서 문화와 역사를 조금씩 힌트받아 산책하고 싶다면 일독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