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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ㅣ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3월
평점 :
우리가 배우는 서구 사상은 사실 번역에 의해 왜곡?된 사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철학을 중심으로 많은 용어들이 일본을 통해서 번역되어 들어왔고 아직도 자유라는 용어를 필두로 일본식 용어가 상당수이죠. 이 책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개인, 근대, 존재, 자연, 권리 등과 같은 수많은 대표적인 번역어가 왜 하필 이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인지를 추적하고 있는데, 그 행간에는 번역을 둘러싼 당대의 고뇌들이 잘 묻어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사회’라는 단어도 있었는데요. ‘society’는 19세기 전반부터 ‘반려’ ‘교제’ ‘집합’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고, 일본 근세를 이끈 인물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처음에는 ‘인간교제’라고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에 이르러서야 ‘단체’를 뜻하는 ‘사’와 ‘모임’을 가리키는 ‘회’를 합성해서 ‘사회’란 말로 옮겨졌고 그게 번지면서 일정한 용어로 정착했습니다.
이렇게 번역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은 당시 일본에서 당시 일본에 서구의 소사이어티가 없었고, ‘society’에 대응할 만한 현실도 역사도 없어서 그들은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생활조직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 현실에 살아 있는 일본어를 연구해 새롭고 이질적인 서구의 사상을 얘기하려 했던 일본의 번역가들은 일본인의 일상에 살아 있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현실 자체를 바꾸려 했고, 이로 인해 society의 번역 작업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즉 ‘사회’라는 번역을 통해 society라는 서양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최근 우리나라의 총선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가 ‘진보주의’나 ‘보수주의’인데, 서구어의 사전에는 ‘보수주의’의 반대말이 ‘급진주의’ ‘유물론’ 혹은 ‘마르크시즘’으로 나와 있고 우리식으로 영역될 수 있는 ‘progressivism’이란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구와 우리의 역사에서 이념적 현실적 전개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진보주의’란 용어도 서구와는 다른 내포와 활용을 갖게 되었을 것이겠죠.
자유로 번역된 ‘liberty’도 일본에는 없었던 개념이라 일본의 번역가들에게는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것이 하나의 난관이었습니다. 비록 종래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써 왔던 ‘자유’라는 용어가 있었지만 사실 이 용어는 전통적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liberty에 대한 번역어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J S 밀의 「On Liberty」가 「자유지리」로 번역된 것을 계기로 ‘자유’가 보편적인 번역어로 고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중국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던, 우리가 쓰는 다수의 한자 조어들이 실제로는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창조된 번역어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수많은 근대 외래 용어들의 번역의 행태들을 통해서 그러한 번역 용어들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 우리네 용어와 학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