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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평점 :
이 책은 저자가 말년에 쓴 글을 모아 사후인 1977년과 1978년에 각각 출간한 '사유'와 '의지'를 한 권에 묶고 저자의 미완성 원고인 칸트 정치철학 강의록인 '판단' 부분을 끝부분에 실어 놓은 책입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사유' 번역본이 2004년에 같은 역자의 번역으로 나왔는데 '의지'는 초역이라고 합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간 정신 활동에 관심을 두게 됐었는데, 특히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나는 천박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렌트는 ‘사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사유의 부재', 즉 무사유가 악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어떤 전통이나 학파에 머물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대 그리스부터 당대까지의 철학 사상을 연구합니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한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해체하는데, 가령 사유를 직업적인 사상가들의 몫으로 둔 것이랄지, 사유의 최상의 형태인 관조를 활동의 우위에 놓는다는지 의지를 욕구로 이해한다든지 하는 식의 형태를 촘촘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아렌트는 무엇이 오늘날 우리를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지 묻습니다. 즉 매일매일 해결해야 할 일에 쫓겨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따른다면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반복되는 일상의 습관을 중단하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즉 "멈춰서 사유할(stop and think)" 여유를 강조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옳음과 그름을 말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이 판단 능력만이 인간의 정신 능력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능력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책을 읽고 아렌트에 대해서 하나씩 공부하면서 요즘 일본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안부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소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수많은 징용자들을 가혹한 노동으로 죽음에 몰아넣었던 일들조차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인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부인하고 나아가 다 끝난 과거일로 치부하며 이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들이나 양심가들을 공격합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피해국의 대법원 판결을 빌미로 피해국에 또 피해를 입히겠다며 피해국과 수 십 년 동안 공존해온 경제적 기반조차도 아무 망설임 없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극우 정치인뿐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반적인 일본의 인간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즉 일반의 양심과 상식이 사라진 나라이자 국가주의에 언론은 침묵하고 국민들은 의식도 없이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어떤 진실에 무관심하고 죄악에 아무런 의식없이 자기 일을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더 큰 가해자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은 역사적으로 보면 1차 세계대전 후 자신들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들 때문에 졌다면서 다시 군국주의 몰이를 했던 히틀러 집권기 시절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세계 2차 대전의 전범으로 수많은 학살에 가담했던 아돌프 아히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그리고 타국의 최고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이 경제보복에 70% 이상 찬성을 한다는, 늘 쓰레기를 줍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며 개인적으로 착하다고 하는 보통 일본인들이 아렌트가 말한 제대로 된 '사고력이 결여‘된 존재들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베나 일본 우익의 왜곡에 현혹되어 2차 대전에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군으로 다시 변신할 가능성이 큰 위협적인 존재들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워낙 방대한 책이고 또 쉽지 않은 철학서라 정확하게 읽기가 쉽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통절한 아렌트의 분석이 이웃 일본을 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