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일시품절


이 책은 한마디로 공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놀이(슈필)와 공간(라움)의 합성어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을 의미하는, 우리나라말에는 없고 독일어에만 있는 단어인 ‘슈필라움’을 통해서 이를 풀어갑니다. 즉 누구든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이자 '슈필라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저자에 따르면 아무리 드넓은 공간을 물리적으로 소유해도 그곳이 슈필라움이 되는 것은 아니며, 값비싼 과시용 가구들로 그 공간을 가득 채운다고 해도 슈필라움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체적 개인의 아이덴티티가 취향과 관심으로 구체화돼야 비로소 진정한 슈필라움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라면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즐겁고 행복할 수 있으며,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고, 무엇보다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고 합니다.

 

1938년부터 1년간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브루노 베텔하임은 '슈필라움'이 보장되지 않으면 인간이 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학자입니다. 그는 수감자들을 관찰하고 다양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내놨는데, 그 중 하나가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살아남은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행태를 보인 사람들뿐이라는 결론입니다. 즉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슈필라움'이 부재했을 때, 인간은 자존심을 버리고 유아처럼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동산'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온 한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바로 집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즉 저자는 한국 사회의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2012년 돌연 자신이 떠밀리듯 살아왔다고 반성하며 여수로 떠난 후 화실 '미역창고'에서 바닷가를 마주한 채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슈필라움'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해 왔다고 합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사회심리학적 문제는 대부분 이 ‘슈필라움’의 부재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저자의 분석과 부동산 광풍이 맞물리며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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