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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 고전에서 찾아낸 뜻밖의 옛 이야기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평점 :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율곡의 <석담일기>를 비롯해 <어우야담> 등 개인이 남긴 문집과 야사집 등 48권의 고전을 통해서 찾아낸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뜻밖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입니다.
사실 조선은 왕이 사망하면 그가 재위하는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의 기록을 엮어 실록으로 남겨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0여 년 동안 시간 순으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불러도 될 만한 정사를 소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실록 밖에도 역사는 존재하는데 우선 사대부들이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사상과 정치, 제도, 과학, 역사, 인물, 세태, 풍속 등 광범위한 분야의 방대하게 양산해낸 저작물들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는 경제가 발전하고 신분제도가 느슨해지면서 일부지만 여성은 물론, 중인 이하의 하층민들도 기록물을 생산하여 우리의 기록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죠. 이들이 남긴 저작물에는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또 실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선조 때 문신 박동량(1569~1635)이 쓴 야사집 '기채잡기'에 따르면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밖으로 돌아다니기 좋아해 한 달 이상 대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날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덕형(1566~1645)은 '죽창한화'에서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외국 관광객들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옛날 모자들이 인기라고 하는데, 조선사람들은 유난히 모자를 좋아해서 식사를 할 때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는 반드시 썼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덕무(1741~1793)의 '앙엽기'에는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며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은 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으며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겼는데,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고 모자의 폐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 손에 시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고종은 명성황후가 쫓아낸 상궁 엄씨를 황후가 죽은 지 불과 5일 만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이후 엄씨는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정사에 간여해 뇌물 챙기기에 급급했는데, 그 정도가 명성황후에 못지않았다고 전합니다. 한편 명성황후는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며 자식이 잘 되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는데, 거기에 워낙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바람에 대원군이 비축해놓은 재물을 1년도 안 돼 탕진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