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공정하지도 않다.
이 두 문장을 머리로는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딘가에 정답이 숨어 있을 거라 믿고 살아왔다. 누군가 이미 걸어놓은 길, 누군가 이미 검증받은 방식, 누군가 먼저 도달한 자리. 그 뒤를 그대로 밟아가면 언젠가 그 성공의 끝자락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었다. 믿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정답을 스스로 찾는 것보다 이미 나와 있는 정답을 베끼는 쪽이 훨씬 덜 무서웠으니까.
돌이켜보면 늘 그런 식이었다. 성공한 사람의 루틴을 따라 했고, 잘 팔리는 글의 문장 구조를 분석해서 그대로 써먹었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고 계산했다. 계산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계산에 너무 오래 기대어 있었다는 것이다. 남의 답을 베끼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효율적인 학습'이라고 포장했다.
알베르 카뮈가 물었다. 남의 오답을 베끼며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느냐고.
뜨끔했다. 남의 정답을 베끼는 게 아니라, 남의 오답을 베끼며 살고 있었다는 지적. 누군가 실패해서 걷어낸 길, 누군가 시행착오 끝에 포기한 방식, 누군가의 한계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아 답습하고 있었던 셈이다. 정답인 줄 알고 따라간 길이 실은 이미 누군가의 오답이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셀 수 없었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오답도 없다는 뜻이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땐 위로처럼 들렸다. 채점하는 사람이 없으니 틀릴 일도 없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안일하게 받아들였다. 곱씹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답이 없다는 건 정답도 없다는 뜻이고, 정답이 없다는 건 매일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기댈 정답지가 없다. 확인받을 곳이 어디에도 없다. 이 자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차라리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걸 못 맞힌 것뿐이라면, 다음엔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다. 애초에 맞고 틀리고의 기준 자체가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는가.
시지프는 매일 같은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 올린다.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다시 산을 내려가 처음부터 그 일을 반복한다. 세계는 그 반복을 지켜보지 않는다. 박수도 없고 응답도 없다. 그럼에도 다음 날 또 손을 뻗는다. 결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다. 바위를 밀 때 손바닥에 닿는 거친 감촉, 오르막에서 느껴지는 다리의 무게, 거칠어지는 숨소리,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가루. 그 순간순간에 머물기 위해 다시 바위 앞에 선다. 카뮈는 그런 그를 두고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썼다. 이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누군가 만든 성공 공식을 모방하면 언젠가는 그 자리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 계산이, 실은 스스로를 일하는 도구로, 보상받는 기계로 바꾸어놓는 짓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버렸다. 오늘 이만큼 참았으니 이만큼은 풀어도 된다는 자기거래. 이만큼 애썼으니 이 정도 결과는 나와야 한다는 은밀한 흥정. 그 회계 장부를 나도 모르게 매일 밤 손으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 카뮈는 이런 회계가 인간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부식시킨다고 했다.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파는 행위였다는 뜻이다.
성실하면 언젠가 보답받을 거라는 약속.
그건 세계가 한 적 없는 약속이다.
세계는 그런 약속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혼자 세계와 그런 계약을 맺었다고 착각하며 성실을 담보로 결과를 요구해왔다.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꼈다. 그 배신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계약서에 세계의 서명은 없었으니까.
남은 방법은 하나다. 남의 답안지를 베끼는 대신, 내 손으로 내 오답노트를 써 내려가는 것. 실천하고 실패해도, 그 실패의 기록이 곧 나만의 길이 되는 것. 남이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재탕하는 대신, 나만의 새로운 실패를 만들어가는 것. 결과를 세계에 맡기지 않으니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결과에 휘둘리지 않으니 과정 그 자체에 온전히 머물 수 있다. 그 머묾이야말로 카뮈가 평생 말한 자족의 핵심이었다. 만족이 아니라 자족. 밖에서 주는 상장 없이도 스스로에게는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
외부의 보상 없이도,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
내면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하는 책 『내면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