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이 한 줄 앞에서 나는 며칠째 멈춰 있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익어서 저절로 되는 상태를 기억이라 부르는 걸까. 아니면 무의식이 대신해주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그걸 잊었다고 착각하는 걸까.
『위험 예찬』은 문장 하나하나가 진도를 막는다. 사전을 찾아도 뜻이 손에 안 잡히고, 넘겼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저자의 강연 자료를 찾아 나섰다. 안 뒤푸르망텔은 왜 이 책을 썼을까. 그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어느 순간 안 풀리던 문장이 툭 풀렸다. 어렵던 개념 하나가 이해되는 순간, 통쾌할 정도로 강렬한 통찰이 밀려왔다.
그 통찰의 출발점은 두려움이었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두렵다는 건 애착이 있는 무언가가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뒤푸르망텔은 여기서 방향을 튼다. 끝이 닥치기 전 남는 몇몇 순간, 그 강렬한 순간을 제대로 살아낼 때 시간은 오히려 무한히 늘어난다고. 그녀는 이걸 은총이라 부르고 자비라 부른다.
유혹도 마찬가지다. 의지력만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은 헛되다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참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 앞에 서야 한다는 뜻이다.
그 다른 방식이 바로 보류 상태다.
숨을 죽이고, 그저 거기 있는 것. 눈앞의 것을 가능한 주의를 다해 바라보는 것. 감정이 일렁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게 두고,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관찰하며 화평케 하는 것. 그렇게 생각이 펼쳐져 편견이 떨어져 나가면, 세상은 거짓말처럼 가벼워진다고.
이 대목에서 강연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강연에서 그녀는 완전한 존재는 욕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욕망은 결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안전한 상태, 제로 리스크는 결핍을 없애려는 시도이고, 결핍이 사라지면 욕망도 함께 사라진다. 욕망 없는 삶은 관 속에 누운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 책에서 만난 두려움과 유혹, 보류 상태는 결국 그 진단의 각론이었던 셈이다. 두려움을 없애려 문을 걸어 잠그는 대신, 두려움과 함께 그 자리에 머무는 법을 배우라는 것.
저자는 여기서 동사를 하나 바꿔치기한다. 목숨을 걸다에서 삶을 걸다로.
목숨을 건다는 건 희생의 수사학이다. 극적이고 일회적인 결단. 반면 삶을 건다는 건 매일의 태도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이미 위험이 스며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강연 속 리어왕이 왕관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짜 주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겹친다. 주권도 삶도, 붙잡을 때가 아니라 놓을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위험 예찬』 책에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건 부드러움이다.
뒤푸르망텔은 부드러움을 약함으로 읽는 시선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부드러움은 바위를 부수는 대신 감싸고 돌아가는 물의 힘이다. 타인의 취약함을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 유연성. 앞서의 보류 상태,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고 관찰하며 화평케 한다는 그 문장과 정확히 같은 결이다.
환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책의 환대는 손님을 잘 대접하는 매너가 아니다. 이방인에게 문을 여는 순간 나의 질서와 안전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여는 행위다. 자아라는 원이 타자라는 낯선 폭발점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넓어진다.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던 보류 상태의 태도가, 여기서는 타자를 향해 문을 여는 윤리적 결단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다 열어두지는 않는다.
'비밀의 방어'는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는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시대의 압력 앞에서, 비밀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장막이 아니라 주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금고라고 저자는 말한다. 소셜 네트워크 같은 새로운 토템이 우리의 욕망을 붙잡으려 든다는 강연 속 대목과 맞닿는다. 자본과 플랫폼이 노리는 건 결국 우리의 내면이고, 비밀은 그 침입 앞에서 지켜야 할 최후의 진지다.
환대로 열고 비밀로 지킨다. 그 사이에서 부드러움이 균형을 잡는다. 세 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몸에 붙은 세 관절 같다.
저자는 2017년 여름, 리비에라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린 아이들을 구하려다 바다로 뛰어들었고, 아이들은 구조되었지만 숨지고 만다. 이론으로만 남았다면 이 책은 잘 짜인 사유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 문장을 몸으로 마저 썼다. "두렵다는 건 애착이 있는 것이 위협받는다는 것"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자기 철학이 말한 그대로, 애착이 위협받는 순간 몸을 던진 셈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라는 첫 문장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두려움과 유혹 앞에서 억지로 버티는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머무는 법을 몸이 익히고 나면, 더 이상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게 무의식이 되고, 삶이 된다는 것.
오늘 나는 어떤 위험을 환대할 것인가,라는 질문만 남기고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