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는 법을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희망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처음 들었다.
정확히는, 어떤 희망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질식시킨다는 것을.
읽다가 손을 멈췄다. 작년 이맘때 내가 딱 그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꽤 오래 "다 잘 될 거야"를 믿었다.
안 믿었던 게 아니다. 진짜로 믿었다.
출근하면서, 버티면서, 억울한 채로 웃으면서.
근데 그 희망이 나를 버티게 한 게 아니었다.
그 희망이 나를 가장 오래 도망치게 만들었다.
부당한 일이 있었다. 말해봤자 안 바뀐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삼켰다.
다음에는 나아지겠지. 내가 좀 더 참으면 되겠지.
그게 희망이었는지 회피였는지, 당시엔 구별이 안 됐다.
지금은 안다. 그건 도망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흙수저였다.
부유한 귀족 집안의 톨스토이를 질투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 직전 5분 전에 특사를 받아 살아났다. 그 5분이 그를 바꿨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물이라는걸, 그는 총구 앞에서 배웠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을 때 비슷한 감각이 왔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낙관'이 아니었다는 것.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봤다는 것. "여기서 나가면 다 잘될 거야"가 아니라, "잘되지 않더라도 나는 살아낼 것이다"는 단단한 결심.
그 차이가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인간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다.
분석하고, 반추하고, 또 분석한다. 그러다 결국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부당함을 느꼈을 때, 나는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를 수백 번 복기했다.
왜 참았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당하고만 있었을까.
근데 그 질문들은 하나도 나를 앞으로 보내지 않았다.
느낀 부당함을 안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까지 와야 한다는 걸 나는 꽤 늦게 알았다.
그게 한 걸음이었다. 딱 그 한 걸음.
고통은 더럽다. 비루하다.
미화하면 거짓말이 되고, 회피하면 곪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했던 건 단 하나였다. 밤마다 한 문장. 매일.
기분 좋은 날도, 절망 속에서도, 오늘 밤 무엇을 쓰느냐는 변하지 않았다.
조건이 없었다. 기분이 조건이 아니었다. 상황이 조건이 아니었다.
나도 그게 필요했다. 거창한 루틴이 아니라, 무너지는 날에도 딱 하나 할 수 있는 것.
나는 그게 한 문장이라도 읽는것이었다. 어떤 날은 한 문장도 못 읽었다. 그게 시행착오였다.
근데 한 문장을 읽은 날과 못 읽은 날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달랐다.
'착한 사람'이라는 가면 얘기를 읽다가 멈췄다.
착하다는 소리를 오래 들었다. 싫다는 말을 잘 못했고, 참는 게 미덕인 줄 알았다.
그게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사업가가 직원을 길들이듯, 좋은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에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거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포기해야 진짜 사람이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이걸 150년 전에 썼다는 게 억울하다.
거장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 쓰지 말라.
걱정의 90%는 일어나지 않는다.
타인의 평가는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 밖에 있다.
스토아, 니체, 도스토옙스키, 세네카, 쇼펜하우어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데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통하는 게 있다. 거장끼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그 문장이 오래 남는다.
'삶의 의미보다 삶 자체를 먼저 사랑하라.'
사형 직전 5분을 살아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억지로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된다.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미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런 시간이 있었구나.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 눈앞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도 삶 자체를 사랑하는 것.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가 아니라, 답 없는 채로 그냥 사랑하는 것.
그게 어른의 사랑이다.
도망치지 않는 것. 그뿐이다.